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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할매의 속삭임

[사람]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

작성자난파|작성시간24.07.14|조회수7,090 목록 댓글 11

 

출처 : https://namu.wiki/w/%EC%9A%94%EC%A0%9C%ED%94%84%20%EB%A9%A9%EA%B2%94%EB%A0%88

SS 군의관 시절의 멩겔레

1. 개요

인종 유전학자 오트마 폰 페르슈어의 아들.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행한 각종 인체실험으로 어마어마한 악명을 떨친 나치 독일의 내과의사이자 SS 대위.

죽음의 천사(Todesengel)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졌다.

수용자에게 잔학한 인체 실험을 했다는 점에서 이시이 시로와 유사하다.

유사한 인물로 카를 게프하르트, 카를 브란트가 있다.

이와 반대되는 인물로는 한스 뮌히 (Hans Münch) (1911년 5월 14일생) 박사가 있는데 같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서 일하였고 SS 출신의 의사였으나 인체실험 목적으로 들어온 포로들과 유대인 여성들을 살려주고 치료해 주었다.
(말 그대로 그냥 의사로서의 본업만 묵묵히 한 셈이다.)

후에 크라쿠프에서 열린 1차 아우슈비츠 재판 때 아우슈비츠에서 일한 사람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왼쪽부터 리하르트 베어, 요제프 멩겔레, 루돌프 회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그는 바이에른의 귄츠부르크(Günzburg)에서 카를 멩겔레(Karl Mengele) (1881년 ~ 1959년)와 발부르가 후파우어(Walburga Hupfauer) (1880년 ~ 1946년)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실업가였으며 남동생으로 각각 카를(Karl) (1912년 ~ 1949년)과 알로이스(Alois) (1914년 ~ 1974년)가 있었다.

멩겔레 가(家)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바로 그다.

1930년 귄츠부르크 김나지움(고등학교)을 졸업한 그는 뮌헨 대학(University of Munich)에서 의학과 인류학을 공부하였으며 테오도르 몰리슨(Theodor Mollison) 교수의 지도로 1935년《4대 인종 그룹 간의 아랫턱 앞부분의 차이에 따른 인종형태학상의 연구(Racial-Morphological Examinations of the Anterior Portion of the Lower Jaw in Four Racial Groups)》 를 작성해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유전 생물학 및 인종 위생학 연구소에서 오트마어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와 함께 연구를 진행한 그는 1938년《갈라진 입술과 구개에 관한 가족사 연구》 라는 논문으로 의학 학위를 받았다.

나치 우생학에 대한 그의 믿음은 이 시기의 논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뮌헨 대학과 프랑크푸르트 대학은 1964년 그의 학위를 취소하였다.

그가 눈뜬 단체는 하필이면 나치였는데, 1938년에는 친위대에 가입하였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번호 5574974을 받았으며, 슈츠슈타펠의 군번 3177885을 받았다.

1939년 이레네 쇤바인(Irene Schönbein)과 결혼하여 롤프(Rolf)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1940년 예비군 의무대로 배속되어 무장친위대(Waffen-SS) 군의관으로 소집되었다.

소속부대는 비킹사단이었는데, 동료들 말로는 "성실하고 괜찮은 친구였다." 는 평을 받았다.

1942년 독소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그는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았으며, 친위대 대위로 진급하였고, 불타는 전차에서 승무원을 구출하는 등 군의관으로선 꽤 용맹한 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는 1941년부터 1942년까지의 동부 전선에서의 수훈으로 1급 및 2급 철십자 훈장과 동부전선 훈장을 수여받았지만 악행이 드러난 후 그의 동료들은 비킹 사단에서의 그의 공훈을 모두 삭제했다고 한다.

1944년 졸라휘테에서 멩겔레

2.2. 죽음의 천사가 되다

해당 생존자는 맹겔레가 병균을 주사한 쌍둥이 피실험군이 고열을 앓는 와중에 이를 기록한 차트를 보며 웃으며 빈정댔다고 증언했다.

1943년 5월 24일 그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집시 캠프 군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44년 8월 수용자들이 모두 가스실로 간 후 캠프가 해체되면서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의무대장이 되었다.

당시 아우슈비츠의 의무대장은 그의 상관 에두아르트 비르츠(Eduard Wirths)였다.

수용소에서 머문 21개월 동안 수용소 수감자들은 그를 히틀러의 의사로도 불렀지만 훗날 그의 별명이 될 죽음의 천사로도 불렀는데, 이는 친절한 의사처럼 보이지만 하는 짓은 악마보다 더한 그의 행동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마른 체형으로 머리카락은 늘 포마드를 발라 단정히 정돈했고 옷을 깔끔히 다림질하여 입었는데, 수염은 보이지 않도록 말끔하게 면도했으며 SS 정모를 약간 기울어져 쓰고 늘 미소를 머금고 가볍게 인사를 하는 친절한 군인 아저씨의 모습이었다고 수용자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특히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쌍둥이들은 자신들에게 잘해주던 그를 친절한 요제프 아저씨라고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교대로 가스실로 보낼 유대인들과 강제 노역에 동원할 유대인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는데, 선별 기준은 없고 그냥 마음대로 유대인들을 색출해냈다.

이 선별 과정에서 그는 원칙적으로 노동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어 분류 과정 없이 절멸 대상으로 자동 분류되는 계층인 노인과 아이들 중 아이들 소수를 선별해서 좋은 음식을 먹이고 잘 갖추어진 시설에서 생활하게 만들었으며 만약 쌍둥이가 발견된다면 매우 기뻐하며 쌍둥이들을 한쪽 수용소로 모으게 했다.

그는 스승이었던 페르슈허 박사의 영향을 받아 쌍둥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수감자들이 도착하면 즐겁게 웃으면서 “Zwillinge heraus!”(츠빌링게 헤라우스! / “쌍둥이들 나와라!”) 라고 소리쳤다.

그는 강제 수용소로 실려 온 수감자들을 쭉 세워 놓고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른쪽을 가리키면 가스실행, 생체실험 대상, 강제 부역자라는 신호로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때 유대인 수감자 중 그의 조수로 차출되어 일한 미클로시 니즐리 (1901년 06월 17일 ~ 1956년 05월 05일)의 말에 따르면, 멩겔레가 죄수들 중 실험 대상을 선별하는 일을 마치 오케스트라가 지휘하듯이 손으로 쉽게 가리켜서 했으며 멩겔레가 너무나 활기찬 표정으로 그 일을 진행하여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니즐리는 무보수 노예 노동을 하긴 했으나 멩겔레가 직접 뽑은 조수였기 때문에 카포들처럼 우대받고 전후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멩겔레가 동네 의사처럼 셔츠와 넥타이 차림에 백의를 입고 있으면 아주 친절하게 대할 것을, 초록색 수술복을 입고 나타나면 곧 누군가가 가죽 끈에 묶여서 수술대로 가게 될 것을, 녹회색 SS 전투복을 입고 오면 별의별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한 끝에 죽어서야 실험실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그는 3가지 제복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렸다.

2.3. 그의 악행

그가 이토록 악명이 자자한 이유는 어린 아이들까지 생체실험을 위한 도구로 썼기 때문이다.

실려오는 수감자의 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그는 20여 개월 동안 1,600여 쌍의 쌍둥이에게 별의별 실험을 할 수 있었지만 쌍둥이를 제외하고 어린 아이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실려온 수감자 중 어린 아이들을 골라내 벽에 150cm 키의 줄을 긋고는, 150cm에 이르지 못하면 청소년이든 갓난아기든지 신경쓰지 않고 모조리 가스실로 보냈다.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은 이 선택된 쌍둥이들을 "멩겔레의 아이들" 이라고 부르며 매우 부러워했는데, 실상은 건강한 실험체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면 그는 바로 이 아이들을 가지고 인체 실험을 실시했다.

눈동자 색깔이 화학물질을 통해 변형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쌍둥이의 눈에 화학물질을 주입하거나 파란 눈동자를 만들기 위해 파란 물감을 눈으로 주사하였는데, 이는 유대인을 아리아 인종으로 바꾸는 실험의 일환이었다.

물론 우리가 보는 눈 색은 홍채 자체의 색이므로 유리체에 물감을 주입해도 눈이 파래지지 않고 피험자는 실명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마취 없는 발치나 늑골 적출, 기타 잔인한 외과 실험들이 포함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숨을 거둔 피실험자들의 눈은 그의 수집품이 되었다.

그의 악명을 드높인 연구인 쌍둥이 실험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쌍둥이들을 한 쌍씩 모든 부분의 크기를 재고 기록한 후 한 아이에게 온갖 종류의 독약, 세균, 화학물질 가운데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쌍둥이에게 주입한 후 결과가 나타나면 멀쩡한 다른 쌍둥이 아이와 비교, 분석하였다가 아이들을 죽여서 해부한 뒤 장기 등을 골라서 그의 스승인 페르슈허 박사가 근무하고 있던 연구소로 보냈다.

게다가 그는 어느 날은 안경 쓴 사람만 골라 가스실에 넣었다가, 또 어느 날은 키가 큰 사람만 잡아 죽였다가, 또 어느 날은 뚱뚱한 사람만 골라 죽이는 짓을 해댔고 심지어 어떤 날에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아우슈비츠에 들어오자 이상하게도 임산부에게 생체실험을 하지 않고 살려주었는데, 그녀는 아이를 출산한 후 멩겔레가 자신을 살려준 이유를 알았다.

그는 "갓난아이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로 며칠이나 살까?" 를 실험하기 위해 그녀를 살려줬던 것이었고 결국 아이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끝에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사하고 말았다.

또 한 번은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사람들 중에서 어떤 아이와 엄마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자 그 자리에서 즉시 총을 꺼내서 아이를 먼저 쏴 죽이고 그 다음 엄마를 사살했고,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어떤 가족을 보자 그는 그 어머니에게 "내가 책임지고 아이들을 맡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 고 친절하게 이야기하며 아이들을 데려갔고 그 아이들은 처참하게 생체실험에 이용된 후에 살해당했다.

쌍둥이들이 정말 뱃속까지 동일한지 확인하기 위하여 쌍둥이 아이들 중 몇 쌍을 선택하여 자신의 실험실로 부른 후 침대에 눕히고 잠을 재운 후 클로로포름을 심장에 바로 주사하여 즉사시킨 뒤 해부했다.

심지어 아이들은 이때까지도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그의 친절한 모습 때문에 "멩겔레 아저씨" 라고 말하며 웃으면서 숨졌다.

그는 쌍둥이에 집착하여 쌍둥이의 장기나 혈액을 교환하기도 했고 남녀 이란성 쌍둥이를 근친교배하였다.

특히 그는 샴쌍둥이에 대한 집착을 보여서 평범한 쌍둥이들의 몸의 일부를 자르고 꿰매 인공 샴쌍둥이 비스무레한 것을 만들고 얼마나 살아남는지 관찰하기도 했지만 연결시켰던 정맥이 염증을 일으키면서 아이들의 연결 부위가 썩어들어갔다.

그는 아이들의 믿음을 쉽게 얻기 위해서 실험은 철저히 실험실에서만 하고 밖에서는 절대 냉혹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웃어주며 사탕이나 과자를 주는 등 완벽한 이중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순진하게 그를 믿고 요제프 아저씨라고 따르기까지 했다.

그는 그런 아이들을 잘 대해 주고서는 하루 뒤 혹은 12시간 안에 바로 그 아이들을 가스실로 보내거나 실험실로 불러서 해부해 버렸다.

731 부대에서 실행했던 바닷물 주사 실험도 했는데 "어떻게 하면 바닷물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들까?" 를 연구하기 위해 바닷물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바닷물을 화학 처리하여 수감자들에게 음식은 며칠 동안 주지 않고 화학 처리 된 바닷물만을 먹게 했다.

당연하지만 인간이 바닷물만 마실 경우 인체에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실험한 결과 이용된 모든 사람이 장애를 갖게 되었다.

전쟁 중 상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정맥, 동맥을 묶어버리는 실험도 했고 결국 그들은 그 부위가 썩어들어가면서 사망했다.

게다가 일부러 상처에 갈린 유리를 문지르고 나무 톱밥을 집어넣는 등의 방법으로 염증을 일으켰으며 독극물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을 보기 위하여 군인들이 일부러 총알에 독을 묻혀서 수감자들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수감자들이 모르는 사이 수감자들의 음식에 독을 타기도 했다.

쌍둥이 외에도 그는 특별 임무를 맡기려고 한다며 여성 수감자 중 건강하고 젊은 여자들을 모집했고 지원했던 여성들을 상대로 그의 동료인 호르스트 슈만을 비롯한 자들과 함께 불임 수술, 이른바 X-선 실험을 실시했으며 여성들에게 전기 충격 요법 등을 실험했다.

인간이 얼마만큼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고저압실험을 하고자 수용자들을 고압실과 저압실에 넣고 얼마나 견디는지 그 결과를 측정했다.

이 실험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

사람이 차가운 물속에서 얼마동안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얼음이 떠 있는 차가운 얼음물 속에다가 사람을 최대 3시간 동안 넣 어둔 후 그 온도가 몸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서는 다시 따뜻하게 만들어서 신체가 제대로 작동하는가를 연구했는데, 당연하게도 동상과 면역력 저하로 인하여 엄청난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러다가 모기가 말라리아를 전파한다는 것을 보고 궁금증이 생기자 말라리아 원충을 가지고 있는 모기를 이용하여 수감자를 전염시킨 뒤 다른 수감자는 주사로 원충을 집어넣어 병의 진행 정도를 연구하였고, 이를 치료하겠다는 명목하에 온갖 종류의 약물과 화학물질을 투여했다.

이 말라리아 연구에는 약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용되었으며 실험자들의 절반 정도가 사망했다.

아우슈비츠에 왜소증 환자들이 실려오자 매우 기뻐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실험하기도 했는데, 유전병의 원인을 찾기 위하여 왜소증 환자들의 골수를 뽑고, 치아를 발치하고, 귀에다 뜨거운 물, 차가운 물을 집어넣는가 하면 눈에 화학물질을 넣어 장님으로 만들었고 한 실험자는 정상인 부모 밑에서 왜소증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손가락과 귀에서 피가 뽑히고서 실험에 이용되었다.

나중에 왜소증 환자들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 그는 2명의 왜소증 환자를 죽인 후 물에 삶아서 뼈만 발라내어 전시하기도 했다.

피실험자 대부분 실험 또는 사후 감염 등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실험으로 사망한 사람은 40만 명에 이른다.

1,600여 명의 쌍둥이 실험 중에서 살아남은 쌍둥이는 200쌍 정도였고 그나마도 온갖 후유증으로 인해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오직 100쌍만이 살아남았다.

게다가 그는 직접 아이들의 머리에 총을 쏴서 살해하기도 했으며 하루 밤 사이에 14쌍의 쌍둥이를 살해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용소 탈출을 시도한 소년 300명을 잡아서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고 휘발유를 끼얹어서 산 채로 태워 죽였다는 잔학무도한 일화도 있다고 하며 약 750여 명의 여성들이 수용되어 있던 수용소에서 벼룩이 발생하자 그는 약 750명의 여성 수용자들을 모조리 가스실로 보내 처리했다.

하는 일이 다 이 모양이니 왜 아우슈비츠에서 몇 십만 명이 죽어나가도 다들 침묵했고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된 일화지만 그에게 춤을 보여주면서 생명을 연명해야 했던 일화도 있다.

에디트 에바 에거

기사에 의하면 수용소에 홀로 남은 17세 소녀 에거의 부모를 죽게 한 그는 에거가 갇힌 곳으로 찾아와 자신을 즐겁게 해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다른 수감자들은 죽을 것이 겁나서 발레리나였던 에거에게 춤을 추라고 권유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음악에 맞춰 춤을 춰야 했는데 당시를 회상하며 너무 무서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에거에게 보상으로 빵 한 덩이를 더 줬고 이 빵을 에거는 다른 소녀들과 나눠 먹었다.

이후에도 수시로 그에게 불려가서 춤을 춰야 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소련군의 진격으로 폐쇄되자 다른 수용소로 이동되었고 감금되어 한참 동안 먹지도 못하다가 소련군에게 간신히 해방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는 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전후 1956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신분확인서의 멩겔레 증명 사진

2.4. 전후

전후에 카를 브란트나 카를 게브하르트 등은 신나게 두들겨 맞고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지만 그는 달랐다.

비슷한 케이스에 속하는 일본군 731 부대의 이시이 시로와 달리 전범으로 낙인찍혀 공공의 표적이 되었으나 결국 남미로 도주하여 수십 년간 가짜 이름으로 숨어 살았다.

바이에른에서 4년간 농부 행세를 하면서 숨어지낸 뒤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망을 쳐서 남아메리카에서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았으며 놀랍게도 남동생의 미망인과 재혼까지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아우슈비츠를 SS가 버릴 때 함께 떠나서 이쪽 저쪽 캠프를 돌아다니다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자기 이름 대고 들어간 데다 강력 전범 체포 리스트에도 이름도 올라와 있었던 상황이라서 미군에서 주의를 기울여서 붙잡아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있었던 캠프 두 군데에는 그가 풀려나기 전까지 그의 이름이 올라온 리스트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며 다른 SS와 달리 문신을 하지 않았고 교활하게도 아우슈비츠를 나온 후 6주간 육군 병원으로 들어가 잠시 육군 군의관 행세를 했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미 법무부 OSI는 1950년에 그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가명을 바탕으로 독일에서 수색을 시도했으나 그와 같이 일했던 프릿츠 울만(Fritz Ulmann) 박사를 대신 찾아가는 삽질을 했다.
(해당 보고서를 받는 인물은 당시 법무부 차관보였던 로버트 뮬러다.)

이후 남미 국가인 아르헨티나로 도망을 갔고 거기서 도망쳐온 많은 나치당원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도망다니고 있을 때 아돌프 아이히만을 실제로 만난 적도 있었지만 아돌프 아이히만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며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였고 아이히만을 "목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고 평가했다.
(끝까지 친분으로 지냈다면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납치할 때 덤탱이로 멩겔레도 납치되었을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도망다니는 와중에 유럽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의 악행을 드러내는 잡지가 나오자 그 잡지를 팽개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한때 파라과이로 도피한 적도 있었는데 당시 파라과이의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에게 나병 치료법을 알려줬다는 소문도 있다.
(그 나병 치료법이라는 게 바로 어린이들의 피로 목욕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스트로에스네르는 10대 초중반밖에 안 된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 성노예로 삼은 페도필리아이자 희대의 아동 성폭행범이었다.)

가족들도 그의 행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가 유럽을 탈출하여 남미로 탈출하고 새로운 삶을 꾸리는 데 필요한 자금은 농기구 생산 기업을 운영하는 재력가였던 친가의 뒷받침을 통해 마련되었고 종종 가족이나 기업측 인사가 남미로 그를 방문하러 가기도 하였다.

대담하게도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만나기 위해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이른바 롤프 멩겔레를 남미로 불러서 같이 사진을 찍기까지 했고 자신의 옛날에 결혼했던 아내의 장인과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생존 사실을 철저히 숨기게 했다.

아들과 아내를 비롯한 사람들한테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1976년 2월 한 친구에 보낸 편지에서 "내일 오전 일찍 (정원사인) 루이스가 올 것이며, 우리는 곧바로 정원 손질에 나설 것" 이라고 쓰는 등 일상 생활만 늘어놓았을 뿐 과거 행위에 대한 반성은 없었으며 "1주일에 1-2번 나는 편지를 부치고 전기요금을 내고, 독일식 빵집에서 빵을 사먹기 위해 마을로 나간다. 이것이 내가 즐기는 작은 기쁨들" 이라는 편지도 있고 또 다른 편지에는 "이따금 그녀는 내가 아침을 준비한 뒤에야 나타나거나 아예 오지 않기도 한다" 고 쓰는 등 게으름을 피우는 브라질 출신 가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더불어 마지막 순간까지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믿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찬양하기도 했다고 브라질의 한 신문이 앞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80년대에 슬슬 신원이 밝혀져서 이스라엘과 서방의 추적이 시작되었는데 정확히는 그의 생존 사실을 알고 있던 아내와 그의 가족들이 이 사실을 증언하면서 알려졌으며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미 그는 브라질 상파울루 바닷가에서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상태였다.

1976년부터 뇌졸중과 여러 병에 시달리던 그는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79년에 물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가 일어나 익사했다고 하지만 미 법무부, 독일과 이스라엘이 그를 연행하려는 시도는 1985년에야 시작되었다.

말년에는 자신이 붙잡혀서 아이히만처럼 교수형에 처해질 것을 무서워해서 집 주변에서 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 밖을 내다보았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의 불안 증세를 겪었다고 햐는데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 요원들에게 들켜 불법 납치를 당해 이스라엘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건이 그에게 공포를 일으켰다.

까딱 잘못했다가 자신도 쥐도새도 모르게 교수대로 올라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사망하기 2년 전 사진

사후에도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5년에 발견된 브라질의 어느 무덤의 주인이 멩겔레라는 게 알려졌고 한국의 소년잡지에까지 기사가 실릴 정도로 소문이 무성했다.

1985년 유골 발견 당시 사진

과학의 발달로 무덤 속에 남겨진 이빨을 통한 DNA 검사로 비로소 신원이 완전히 확인된 것은 1993년이었다.
(신원 확인 후 멩겔레의 유골은 상파울루 법의학 연구소에 보관되어 상파울루 대학교 의과대학의 법의학 과정에서 교육 보조 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마저도 아들 롤프 멩겔레와 전처 이레네 쇤바인 측에서 DNA를 제공하기를 거부하여 1년 가량 지연되었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어서 그의 죽음은 현재까지도 음모론의 소재가 되는 등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를 비롯하여 생체실험에 참가했던 나치의 모든 의사들이 심리 검사를 했을 때 정상으로 나왔는데 카를 게브하르트, 카를 브란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나치에서는 정말 엘리트이며 유능한 인재들이었고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었으며 자기 아이들에게는 더 없이 다정한 아버지들이었다.

반면 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모든 범죄 혐의에 강력히 부인하며 자신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거나 자신의 잔혹한 행각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3. 그에 대한 말들


긍정적인 증언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증언


4. 기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을 때 악명이 높은 간수인 이르마 그레제와의 염문도 있었다.

같은 시대 동양에서는 이시이 시로가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2차대전이라는 상황이 그들의 극악한 본성을 일깨워 마음껏 폭주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중역되어 한국에 출간된 르포에세이집 '노란 손수건' 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도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던 여성의 실화인데 이 일화의 주인공인 라도 역시 멩겔레 앞에서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라도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40대 초반의 건강한 몸이었던 덕에 가스실을 면한 뒤 고된 노동을 하며 하루에 작은 빵 한 조각과 부실한 수프 한 그릇만 먹는 나날 속에 놀라울 정도로 체중이 줄면서 건강을 잃어 갔다.
그러던 와중에 장학사업을 했던 아버지 알렉산더의 도움으로 의대를 졸업하고 멩겔레에게 끌려와 실험조수 일을 하는 케서린 빙클러 박사를 수용소에서 만나게 되었다.
빙클러 박사는 은인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연합군의 진격에 맞추어 라도를 탈출시킨 뒤 수용소에서 벌어진 생체실험을 은폐할 목적이었던 멩겔레의 명령으로 총살당한다.
이후 라도는 빙클러와의 약속대로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과 멩겔레의 가혹행위, 생체실험에 대해 서방세계에 증언하게 된다.

5. 대중매체에서

바이오쇼크의 등장인물인 테넨바움의 음성기록을 들어보면 수용소에서 벌어진 생체실험이 언급되는데 눈깔 운운했다는 말을 보아 테넨바움의 기록은 멩겔레에게서 모티브를 따 오지 않았을까 싶다.

더스틴 호프먼 주연 영화 《마라톤 맨》(1976) 에 나오는 악역 크리스티안 스젤 박사도 멩겔레와 비슷한 인물이다.
명색이 의사라는 놈이 수용소에서 고문 담당을 맡았다고 나오는데 나치 전범으로 쫓기면서도 잔혹한 짓을 다 한다.
명배우 로런스 올리비에 경이 피눈물 없는 이 악역을 잘 연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런스 올리비에는 2년 후 영화 브라질에서 온 소년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 출신의 유대인이자 나치 사냥꾼인 리버맨 역을 맡아 요제프 맹겔레의 음모를 저지하려는 역할로 나온다.)

메탈 밴드 슬레이어의 유명한 곡인 Angel of Death의 가사는 멩겔레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꽤나 악랄한 가사이니 심약한 분들은 청심환 한 알 삼키고 보시길...

남미로 도망간 나치나 라스트 바탈리온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에서는 멩겔레가 악역으로 나온다.
영화판의 배우는 그레고리 펙.
94명의 히틀러를 복제한 뒤 똑같이 길러 나치를 부활시키려고 한다.
그레고리 펙이 미남배우이다 보니 멩겔레도 실물과 다르게 훤칠한 미중년으로 나온다.
심지어 어떤 팬은 "내가 사랑하는 영화배우한테 저런 찐따같이 생긴 놈 역할을 맡기다니 당신 제정신이냐?" 라고 항의편지까지 보냈다.

2008년 7월 27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 익스트림 서프라이즈 326화에서 <죽음의 천사>라는 제목으로 그의 이야기를 방송했다.

미국 드라마 X파일 시즌 3 2화 페이퍼클립에서 잘 차려입은 남자가 멀더 앞에서 "맹겔레가 외계인과 지구인 혼종 실험을 한 번 했다" 고 말한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에서 나오는 악역 중 하나로 나온다.
멀쩡한 사람(조니 뎁)의 눈을 마취도 없이 뽑아 버리는 등 악행을 벌이다가 찌질하게 최후를 맞았다.

영화 <죽음의 천사>는 아르헨티나에서 도피하던 1960년대의 멩겔레를 다루고 있다.

영화 <Unborn(한국 제목: 언데드, 2009)>의 주인공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한 쌍둥이 남매의 후손인데 할머니의 회상 속에서 유난히 쌍둥이를 좋아하여 좋은 대접을 해 주고 눈 색소 실험을 하는 잘생긴 의사가 나온다.
멩겔레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쌍둥이를 좋아하는 점, 생체실험을 했다는 점에서 멩겔레로 보인다.

츠쿠시 마사히토의 코믹스 <메이드 인 어비스> 에 등장하는 본도르드가 요제프 멩겔레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것 아니냐는 의견들이 나온다.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 언급된다.
쥐의 주인공인 블라덱 슈피겔만이 다른 죄수들처럼 이 사람 앞에 2번이나 끌려가서 노동능력이 있는지 심사받았기 때문이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한 컷 등장한다.
다니엘 델 폰테가 분했다.
서류작업 실수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여자들이 그에게 자기들은 쉰들러의 유대인이라고 하소연하자 "쉰들러가 누군데?" 라고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등장 끝.

실화를 기반으로 한 소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의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유대인 랄레 소콜로프는 작중 요제프 멩겔레의 인체실험 협박을 여러차례 받으며 그의 조수는 끝내 멩겔레에게 끌려가 인체실험을 받고 성불구자가 된다.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2에 나오는 아서 아든 박사도 멩겔레의 영향을 받은 것이 역력한 캐릭터다.
생체실험도 불사하는 나치 매드 사이언티스트, 신분 세탁 후 도주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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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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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밀크클래식쌀과자 | 작성시간 24.07.15 죽기전에 엄청난 공포를 느꼈길 바란다 시뱅놈아
  • 작성자인아웃 | 작성시간 24.07.16 지 기분에 따라 사람을 죽였노 ㅅㅂ
  • 작성자라면먹고싶은디 | 작성시간 24.07.21 못돼쳐먹은새끼
  • 작성자ROCKET RACCOON | 작성시간 24.08.05 와......
  • 작성자리를스타 | 작성시간 24.10.20 지옥에서 똑같이 경험하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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