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5년 4월 25일,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발생한 철도사고로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충돌사고, JR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와 함께 '2005년 일본철도 3대 참사' 로 불리고 있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포함 107명이 숨졌고 562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망자 가운데 재일 한국인인 전칠영(당시 35세 여성)이 있었고 부상자 중에는 양창원(당시 50세 남성)이 있었으며 이 참변의 장본인인 20대 초반의 기관사 다카미 류지로도 이 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서구권에서는 아마가사키역 주변에서 일어났다 해서 '아마가사키 탈선 사고(Amagasaki derailment)' 라고 한다.
2. 전개
사고 열차는 JR 서일본에서 운행하는 7량 편성의 후쿠치야마선 쾌속 도시샤마에역행 5418M 열차로, 207계 전동차로 운행하고 있었다.
사고 당일 열차를 운전하던 기관사인 다카미 류지로(高見隆二郞, 23세)는 경력 11개월의 초보 기관사로, 경험 미달로 인한 운전 미숙으로 인해 제한 속도를 어겨가며 과속을 했다.
이 탓에 이타미역 접근 시 급제동을 걸었음에도 정차 위치를 약 70m 가량 오버런하고 말았다.
(당초에는 8m 오버런했다고 보고되었으나 실제로는 72m 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관사와 차장이 불이익을 두려워해 축소 보고한 것이다.
기관사가 열차 내 전화시스템으로 선배였던 차장에게 연락해서 이번 일을 눈감아 달라고 부탁했고 차장은 이 말을 알아듣고 축소보고했다.
보고를 열차 내 전화로 차장이 하기 전에 맨 뒷칸에서 열차가 제대로 안 서는 바람에 늦었다며 항의한 손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오버런으로 인해 열차를 제 위치로 다시 되돌리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정시로부터 약 1분 20초 가량의 지연이 발생했고, 오버런에 지연까지 겹치자 초조함에 쫓기게 된 기관사는 이타미역을 급히 발차하여 또다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과속을 해가며 이나데라역과 츠카구치역을 통과한 열차는 아마가사키역으로 향하는 도중에 위치한, 우회전 곡선 구간에 진입한다.
당시 이 곡선 구간의 속도 제한은 70km/h으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기관사는 조급한 마음에 무려 116km/h의 속도로 사고 구간에 진입하였다.
(다카미 기관사는 이미 이전에 100m 정도 오버런해서 재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타미역에서의 오버런과 지연으로 인해 더욱 조급해졌을 것이다.)
당연히 열차는 관성으로 인해 커브 바깥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위험을 감지한 기관사가 급히 비상제동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차량은 붕 떠 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선로를 벗어난 열차는 오전 9시 18분경, 선로에서 불과 약 6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퓨전 아마가사키(エフュージョン尼崎, 2002년 준공)" 라는 아파트를 들이받았다.
맨 앞 선두차인 1호차는 아예 건물 1층 주차장(필로티) 안으로 들어가서 주차된 오토바이 • 자전거 • 차들과 함께 뭉개졌고, 2호차는 건물(아파트 모퉁이)에 부딪히는 동시에 뒤따라온 3호차에 밀려나 함께 잭나이프 현상을 일으키며 처참히 구겨졌다.
4호차와 5호차는 아파트에 충돌하는 참사는 간신히 면했으나 역시 탈선하여 선로변에 널브러졌고, 오직 최후미의 6호차와 7호차만이 탈선의 마수를 피해갈 수 있었다.
해당 열차가 통근전철이다 보니 승차권을 사면 해당 구간의 아무 전철이나 탈 수 있어 정확한 탑승 인원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대략 700명 정도가 승차하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사고로 인해 그들 중 총 107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중 99명은 완전히 찌부러진 1호차와 2호차 탑승객이었다.
당시 반대편 선로에는 특급열차가 진입하고 있었는데 사고를 목격한 한 사람(47세)이 순간 기지를 발휘해 철도건널목의 비상버튼을 눌러 마주오던 특급열차를 정지시켰다.
자칫 발생할 뻔한 2차 참사를 방지한 공을 인정하여 일본 정부는 이 사람에게 홍수포장(紅綬褒章 こうじゅほうしょう, Medal with Red Ribbon)을 수여하였다.
또 사고 현장인 아파트 근처에 있는 "일본 스핀들 제조(日本スピンドル製造株式会社)" 라는 회사 직원들이 소방관들의 구조활동에 도움을 줘서 이 회사 대표도 홍수포장을 받았다.
3. 원인
3.1. 직접적 원인
우선 사고 구간은 곡선반경 300R의 급곡선으로, 본래 후쿠치야마선에는 없었던 구간이지만 1997년 JR 도자이선의 개통과 함께 직결운행 및 JR 고베선 아마가사키역과의 연계를 위해 부득이하게 이설되어 만들어졌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나왔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사고 구간의 한계속도는 106km/h인 것으로 드러났고 사고 열차가 해당 구간을 116km/h로 주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직접적인 원인은 과속으로 확정되었다.
처음에는 133km/h가 넘어가야 차량이 전복된다고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승객이 아예 탑승하지 않은 빈 차일 때 기준이고 실제로 승객이 탑승한 경우는 이보다 훨씬 낮은 속도에서도 전도될 위험이 다분하다.
결국 찰나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감행한 과속이 부른 참사였던 것.
해당 구간의 ATS 장비가 구형이라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JR그룹 각 사는 제한속도 초과를 막을 수 있는 ATS-P나 ATC 같은 유형의 신호시스템을 차근차근 적용 중이었으나 당시 후쿠치야마선은 ATS-P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열차의 경량화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열차는 통상적으로 일정한 충돌강도를 갖추도록 되어 있고 물론 해당 207계 전동차는 그 조건을 만족했지만 전면 충돌강도에 비해 측면 충돌강도가 미흡하여 사고를 키웠다는 이야기다.
3.2. 간접적 원인
직접적인 원인은 기관사 다카미의 과실과 열차방호장치의 문제였지만, 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과도한 경쟁과 JR 서일본의 후진적인 사내 문화가 있다.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고베(神戸)에서 각 한 글자씩 따 온 이른바 케이한신(京阪神) 지역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철도회사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주요한 도시 구간마다 어김없이 두세 개의 철도회사가 역 짓고 선로 깔아서 열차 돌리는 트랜스포트 타이쿤이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동네다.
이러한 경쟁은 물론 철도 서비스의 향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JR 서일본은 고속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속달형 전철인 '신쾌속' 은 통근용 전철인데도 최고속도가 130km/h며 표정속도도 85.2km/h에 달한다.
한국의 특급열차 등급인 경춘선 ITX-청춘 표정속도에 맞먹는다.
이러한 JR 서일본의 고속화에 맞서 사철은 JR에 비해 더 저렴한 운임을 내세워 경쟁하고 있다.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치킨 게임이 벌어져 각 회사들의 출혈이 크긴 하지만 서비스의 향상과 더불어 철도 운행의 정시성도 칼같이 지켜져서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JR 서일본이 받던 찬사의 이면에는 열차 운행시간을 초 단위로 점검하며 진행된 기관사들에 대한 압박이 있었고 이것이 사고의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도 드러나면서 크게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사고 당시 기관사인 다카미 류지로는 상술핬듯이 경력이 11개월밖에 되지 않는 초보였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충분히 숙련되지 않은 초보 기관사를 현업에 배치하였고 그는 열차 조작에 미숙한 나머지 오버런을 범하고 열차를 지연시키고 말았다.
JR 서일본은 이러한 경우 '일근교육(日勤教育)' 을 부과하곤 했는데 그게 교육이라기보다는 군기훈련에 가까운 형태여서 기관사들은 대단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일근교육을 받을 때는 근무조에서 제외되어 업무시간 내내 교육만 받는데 그 교육이라는 게 남들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리포트 쓰기, 사규 옮겨쓰기, 제초·청소, 상사 면담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실상 징벌적 조치다.
이미 2000년에 일근교육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지연된 열차를 회복하고자 무리한 운전을 하다가 참변을 불렀다.
뿐만 아니라 JR 서일본은 제대로 숙달되지 않은 사람을 통근시간대 기관사로 배치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받았다.
통근시간대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많이 몰리고 연착이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각하는 사고가 터지므로 베테랑 기관사들이 주로 맡는 시간대이며 신참 기관사는 고참 기관사 옆에서 보고 배우는 정도로 하고, 그나마 진짜 피크에는 고참 기관사의 집중에 방해될까봐 신참을 아예 빼버리기도 할 정도로 회사 차원에서 크게 신경을 쓰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비슷했던 JR 동일본을 예로 들면 이미 1990년대부터 안전관리와 기관사 및 차장 교육을 철저히 진행하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엔 보조기관사로 일하면서 주기관사 옆에서 보고 배우는 식으로 연수를 진행하고 운전실습은 승객이 많지 않은 낮 시간대에, 그나마 옆에 관리하는 고참 기관사가 1~2명씩 꼭 동승한 상태로 이루어지며, 운전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정기관사 자격을 주지 않고 계속 실습기관사로 교육을 거듭하는 등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가하였다.
(이건 한국철도공사도 마찬가지다.
가끔 기관사 승무를 교대하는 역에서 고참 기관사가 앉을 접이식 의자를 가지고 교대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JR 서일본은 고작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안전관리를 소홀히 하고 승차인원이 많아 가장 신경써야 하는 출퇴근 시간대에도 경력이 안 되는 신참 기관사가 혼자 운전대를 잡도록 투입하는 등 교육도 제대로 안 했다.
이 점이 밝혀지면서 JR 서일본은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또한 당시 JR 서일본은 속달성만을 고려해 여유시간이 없는 열차 시각표를 짰는데, 부족한 여유 시간이 기관사들에게는 작은 실수조차도 무조건 만회를 해내야 지연을 면할 수 있다는 압박감으로 이어져 결국 과속같은 위험운전을 시도하려는 유혹이 훨씬 커졌다는 지적이 있다.
4. 영향
대형 참사로 불리던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충돌사고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사고가 터져서 일본 사회에 몰고 온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사고 노선은 55일간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JR 서일본은 경쟁 노선인 한큐 타카라즈카 본선을 통한 대체 운송을 실시했으며, 이 때 타카라즈카 본선은 극심한 혼잡과 지연에 시달렸다.
또한 사고 여파로 JR 후쿠치야마선 이용객 일부가 한큐 타카라즈카 본선으로 이전하는 효과가 있었다.
사고 당시 일부 JR 서일본의 직원들이 사고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음에도 볼링대회를 즐기고 낮술을 곁들인 점심을 먹었던 사실이 보도되어 큰 비난을 받았다.
사고 이후 JR 서일본 2대 회장이자 초대 사장인 츠노다 다츠오(角田達郎) JR 서일본 고문이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지병인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고 차량인 207계 전동차는 JR 서일본의 코퍼레이트 컬러인 파란색 띠가 둘러져 있었으나 사고의 악몽을 연상시킨다는 여론으로 남색과 오렌지색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제작된 후속 모델인 321계도 남색과 오렌지색 띠를 둘렀다.
(이후 207계는 체질개선공사로 321계에 더 가까워지도록 개조되었다.)
일본의 철도모형 제작업체인 TOMIX와 KATO는 207계 모형의 생산을 중단하였다.
JR 서일본 홈페이지에서 PDF로 제공하던 종이 철도모형에도 207계는 삭제되었다.
현재는 TOMIX와 KATO 모두 207계를 생산 중이지만 변경된 도색 모델로만 발매한다.
지나치게 빡빡한 열차시각표가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받자 이를 개정하여 후쿠치야마선 전 열차가 종전에 비해 운행소요시간이 늘어났다.
사고 구간의 제한속도는 70km/h에서 60km/h로 낮아졌다.
그 외 어반 네트워크 구간에서도 시각표가 개정되어 소요시간이 약간 증가하는 변화가 있었다.
2006년 3월 시각표 개정 때 산요 신칸센 500계 노조미의 신오사카 - 하카타 구간 소요시간이 2분 늘어나 최단 2시간 21분에서 2시간 23분으로 늘어났다.
이전에는 최고속도를 304km/h로 내야 여유있게 정시운전을 할 수 있었다.
충돌한 아파트는 JR 서일본에서 매입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주민들은 모두 이주하였다.
2018년에야 추모 시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사고보다 앞선 2003년에 일어난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유족 17명이 JR 서일본 노동조합 측의 초청으로 이 사고 추모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사고 이후 JR 서일본 홈페이지에는 이 사고에 대한 사과문이 메인에 올라가 있다.
홈페이지를 리뉴얼하면서도 사과문을 유지하고 사고 개요와 사고 후 반응, 사고에 대한 대응에 대한 페이지를 전부 메인페이지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해 놨다.
심지어 한국어판 홈페이지에도 이 사고를 언급하는 안전 헌장을 띄워 놓고 있다.
(JR 동일본도 2005년부터 우에츠 본선 탈선 사고에 관한 공지가 계속 올라와 있다.
다만 이 사고는 강풍의 의한 사고로 JR 동일본의 잘못이 아니다.)
JR 서일본은 사고 이후에도 사고 당시에서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직원 대접과 소홀한 차량관리 때문에 언제 비슷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블랙 기업으로 악명 높다.
2017년 1월 3일에는 일본공산당의 기관지 아카하타 단독보도로 청취 조사에 응한 JR 서일본의 운전사의 증언을 기록한 필기 내용이 정보 공개를 통해 밝혀졌다.
이듬해 사고 1주기 추모행사에는 기관사를 제외한 106명만 명단에 올랐다.
본 사건이 일본 국내에서 기관사에 의한 업무상 과실치사 사건으로 취급되어 재판에 회부된 터라 죽은 20대 기관사는 제외되었다.
다만, 이후 진행된 1심, 2심 및 2017년의 최고법원에서는 JR 서일본이라는 조직 전체의 문제라고 판단해 죽은 20대 기관사 개인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린 상태이다.
5. 영상
https://youtu.be/z_2_cli_r_c?si=yrqua1TKqaXrxtTS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량 내에 수백명에 달하는 승객들이 있었다.
6. 기타
1995년에도 같은 노선의 아이모토역에서 탈선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다.
이때는 저속으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었으며 인명 피해는 10명이 경상을 입은 것이 전부였다.
2014학년도 EBS의 영어 과목 수능 연계 교재인 인터넷수능에 이 사고를 설명한 지문이 수록되었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만 언급되었지만 내용이 이 사고와 상당히 일치한다.
사고 차량인 207계 전동차는 국철 시절 만들어져 JR 동일본에서 운영하던 207계와는 전혀 관계없는 JR 서일본의 신조 차량이다.
2018년에 사고 당시 열차가 충돌했던 지점(옛 이퓨전 아마가사키 아파트)에 기념관인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 "추모의 집" (祈りの杜 (もり) 福知山線脱線事故現場)이 조성되었는데 열차가 직접 충돌했던 아파트에 저층부 일부를 남겨 두어 보존했다.
(탈선 사고의 여파로 인해 붕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저층부를 남기고 허물었다.)
기념관인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 "추모의 집" (祈りの杜 (もり) 福知山線脱線事故現場)의 1층은 1호차가 충돌하면서 돌입했던 내부(필로티)와 그 앞 지하 부분까지 보존되어 있다.
조성 중에 유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파트 벽에 기대 잠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아사히 신문에 실렸다.
탈선사고가 난 이후 5418M은 결번 처리 되었다.
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테네리페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과 매우 비슷하다.
(JR서일본과 KLM이 연착 등으로 스케줄이 늦어지면 어떤 사정이든 무조건 조종사에게 패널티를 먹이는 점과 두 조종사가 시간에 쫓기다가 결국 사고를 낸 점에서 말이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요 정 작성시간 24.07.23 에구....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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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인아웃 작성시간 24.07.23 와 근데 무슨 아파트랑 선로 사이 거리가 6m밖에 안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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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동구라미라미 작성시간 24.07.24 나도 첨볼때는 과속을 왜 저렇게 심하게 한거임? 이래생각했는데 다 읽으니까 잘못은 했지만 왜 그랬는지 이해는 된다 진짜 저런 식으로 압박해서 사람이 얼마나 죽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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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꾸르륵웩 작성시간 24.07.28 이거 영어로 하는 어느 다큐에서 댓글인가..본건데 희생자 공동으로 추모식같은거 할때 회사측에서 운전사는 뺏다던데.. 진짜면 음침하기 짝이없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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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make it count 작성시간 24.08.01 철도민영화가 눈에 들어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