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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할매의 속삭임

[스크랩] [소설]나를 잃었을 때 열어봐

작성자에바에 타라, 빽가|작성시간24.07.29|조회수2,736 목록 댓글 6

 

출처 : https://arca.live/b/napolitan/76246178





잘들어. 나 아직 안 죽었어. 육체는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직 돌아올 수 있다고.

일단은 네가 살아야 해. 이 밑에 적힌 걸 한 문단 읽을 때마다 당장 내용을 실행에 옮겨. 다음 문단을 읽는 건 그 다음이야. 나를 구하는 방법은 맨 마지막에 적어놨어. 네가 살아남으면 날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그 전에 앞선 내용들을 모두 실행에 옮겨야 해.

시간이 생명이야. 나는 언제가 되었든 너를 통해 부활할 수 있지만, 네가 살아남는 건 신속함에 달렸어. 내가 항상 사랑하고 있다는 거 알지? 사랑해.

이제 읽어.

1. 나를 묶어.
목이 잘려있든, 200조각이 되었든 상관없어. 내가 어떻게 죽었든, 나를 무력화해야해. 형상이 비교적 온전하다면 손목과 발목을 둘 다 포박하는 걸로 충분할 거야. 짐승을 상대할 때 썼던 은 족쇄가 있다면 좋을텐데. 그게 아마 지하실 어딘가에 박혀있을 거야. 찾겠다고 시간낭비하지 말고 뭐든 찾아서 일단 날 포박해. 만약 내 육신이 어딘가에 묶어둘 수 없는 형태가 되었다면, 혼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밀폐용기에라도 담아놔. 반드시.

2. 내 목소리를 빼앗아야 해.
언어가 가장 강력한 무기인 건 알고 있겠지.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면 시체에서 혀를 잘라내거나 성대를 손상시키는 걸로 충분할 거야. 힘들어하지마. 네가 보고 있는 건 그냥 내가 쓰다 버린 육신에 불과해. 난 다시 돌아올 수 있어.
만약에 내가 너무 잘게 쪼개져서 드럼통 같은 것에 담아둬야만 한다면, 지하실 깊은 곳에 넣어두거나 땅에 파묻어. 적어도 네가 내 목소리를 듣는 건 피해야 하니까.

3. 내가 선물로 준 것들은 전부 버려.
옷, 시계, 구두, 헤어밴드도 지금 몸에 걸치고 있다면 당장 불에 태워. 나를 먹어치웠으니 놈은 내 기운이 묻은 것들을 전부 눈과 귀로 활용할 수 있을 거야. 단, 절대 우리 결혼반지는 버리지 마. 그거야말로 진짜 소중한 거니까. 널 지켜줄 거야. 지금부터 반지가 네 목숨인 것처럼 잘 간수해. 진짜로 네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4. 집으로 돌아가지마.
내가 굳이 집이 아닌 우리만의 비밀 장소에서 이 짓을 한데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네가 이 쪽지를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옳았다는 게 증명된 거지. 너와 나의 고향, 집, 친구들 전부 잊어. 이름도 잊어야 해. 어차피 그것들 전부 이제 세상에 없으니까. 너랑 나뿐이야. 네가 살아야 나를 다시 데려올 수 있어. 내 말 믿어.

5. 혼자있지 마.
놈은 네가 혼자 있을 때 유혹하거나 포획하려고 할 거야. 직접 가든, 나를 보내든, 전부 네 주변에 방해꾼이 없을 때만 할 수 있어. 잠을 잘 때 가장 좋은 곳은 기숙학원이나 노숙자 쉼터일 거야. 심신 건강한 성인들이 주변에 많이 있을수록 좋아. 놈이 다른 사람들을 먹어치우느라 너를 늦게 찾아낼테니까.
단, 어린아이들하고 같이 있는 건 피해. 불쌍한 애들까지 전부 제물로 바치고 싶은 게 아니면.

6. 고양이들을 찾아.
내가 캣맘짓을 했던 건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봐였어. 우리가 거리로 내몰려서 도움을 받아야할 때 말이야. 집 앞 골목 스티로폼 상자에 고양이들 먹이 그릇이 있을 거야. 사료통에 우리 결혼반지를 올려놔. 회색 고양이가 와서 반지를 물고 어딘가로 사라진다면 너를 도와주겠다는 뜻이야. 녀석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그 앞에서 기다렸다가 녀석을 따라가. 그때는 고양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거야.

7. 고양이가 너를 도와주길 거절한다면 죽여.
결혼반지를 보고도 녀석이 그걸 물고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어. 고양이들이 길길이 날뛰겠지만, 최소한 그 녀석들은 말이 통하거든. 나중에 상황 설명을 하면 충분히 알아듣고 넘어갈거야. 그러니 고양이를 죽여. 죽여서 결혼반지를 녀석의 입에 물린 다음 시체를 들고 그 자리에 계속 서있도록 해.

8. 흥정을 해야 돼.
고양이 시체를 '얼마에 팔 거냐'고 묻는 사람이 나타날 거야. 그때는 '이걸 받으면 뱀하고 싸워야 하는데 괜찮냐'고 물어봐. 괜찮다는 분께는 바로 고양이 시체와 반지를 넘겨. 나머지는 그 분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넌 그 분을 따라가면 돼. 그리고 이 쪽지는 그만 읽어. 뒷내용은 필요 없으니까 그대로 태워버리면 돼.
하지만 괜찮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최대한 정중하게 잘 가라고 인사해줘. 그쪽에서 추근덕거리더라도 네 개인 신상에 대한 건 절대 입에 담지도 말고. 언어가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위협이야. 함부로 인간이 아닌 것들과 잡담에 휘말렸다가는 내일이 없을 거야.

9. 뱀의 친구라는 것들을 만나도 놀라지는 마.
위의 질문을 했을 때, 혹시라도 '뱀하고 친하니 괜찮다'고 대답하는 놈이 있다면, '뱀이 자기 아가리보다 작은 것들하고 친구하는 것 봤냐'고 물어봐. 그럼 알아듣고 너한테서 떨어질 거야. 말귀 못 알아듣고 계속 추근대는 놈이 있다면 '너도 입에 여의주 물고 싶냐'고 물어봐. 그럼 조용히 입 닫고 사라질 거야.
노파심에 얘기하는데, 내가 하라고 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은 제발 하지마. 네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상대는 너를 이용하려고 할 거야.

10. 남색 저고리에 흰색 치마를 입은 아줌마가 나타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자리에서 도망가.
척 봐도 무당처럼 생긴 데다가 피가 묻은 고깔을 쓰고 있을 테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놈이 자기 대신에 그 여자를 보내서 반지를 빼앗으려는 거니까 절대 뺏기지 마. 내 반지는 그냥 고철이지만, 네 반지는 엄청나게 값진 물건이야. 고양이들한테 보호를 요청하는 대가로 내줄 수 있을만큼 엄청난 거니까 절대 뺏기면 안돼.

11. 그 여자가 나에 대해 뭐라 지껄인다면 무시해.
아마 자기가 내 엄마라는 말을 하겠지. 거짓말이야. 우리 둘 다 고아잖아. 나에 대해 잡다한 것들을 털어놓으면서 네 환심을 사려고 할 텐데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그냥 도망가. 아무리 진짜 같아도 다 거짓말이니까.
특히,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이 내용이 거짓이라거나 하는 말들. 절대 믿지마. 이거 내가 직접 쓰는 거 너도 봤잖아. 나를 믿어. 항상 사랑해.

12. 뱀들이 너를 잡으러 온다면 휘파람을 불어.
휘파람을 싫어하는 뱀은 딱 한 놈 빼고 없어. 설령 명령을 받고 널 죽이러 온 녀석들이라고 해도 선율 한 번으로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서 흥얼거리던 걸 불러줘. 그게 제일 듣기 좋더라. 뱀들이 휘파람을 듣고 돌아가면 넌 얼른 그 자리에서 벗어나.

13. 되도록 으슥한 골목의 하수구는 피해다녀.
하수도는 놈이 보낸 졸개들이 다니기 좋은 길이거니와, 쥐들의 나라가 있는 곳이거든. 쥐들은 겁이 많지만, 네가 가진 시체가 누구 건지 알게 된다면 눈이 뒤집힐 거야. 괜히 쥐들이 '회색 용암'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산 채로 뼈가 발라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쥐들이 고양이 시체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가는 건 피해.

14. 만약 내가 온다면, 나를 다시 죽여.
잘 생각해. 나는 죽었고, 내 시체는 네가 잘 포박해뒀어. 네 앞에 내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그건 내가 아니란 말이지. 얼마나 나랑 똑같이 생겼든, 얼마나 나랑 똑같이 말하든, 우리 사이의 추억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든, 그건 내가 아니야. 심지어 이 쪽지의 내용을 알고 있더라도 믿으면 안 돼.
내 육신은 죽었고, 네가 날 구해주기 전까지 난 절대 돌아올 수 없어. 그러니까 제발 속지 마. 날 사랑한다면 반드시 나를 죽여야 해.

15. 밤에는 빛이 있는 곳에 머물러.
해가 질 때까지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찾지 못하면, 카페든 찜질방이든 아무데나 24시간 영업하는 곳으로 가.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 많은 곳이 안전해. 어린아이만 잔뜩 모여있는 곳이 아니라면.
하지만 절대 병원이나 양로원 근처에는 가지마. 그런 곳에는 '아프면 죽어야지', '늙으면 죽어야지' 같은 여유로운 마인드 가진 사람이 없어. 놈이 단 1년을 더 살게 해준다면 자식도 먹이로 바칠 인간들뿐이야.

16. 이 모든 걸 고양이 시체를 살 사람을 찾을 때까지 계속 해야 해.
왜냐면 너는 절대 놈한테 맞설 수 없으니까. 난 오로지 놈을 상대하기 위해 길러진 존재야. 그런 나도 어쩌지 못하고 패했으니 그 망할 놈의 지렁이를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면서 계속 아군을 찾는 것뿐이야.

17. 다시 말하지만, 그 아군 중에 인간은 없어.
자칭 무당이라는 자들을 조심해. 진짜 무당이라면, 네가 알아보기도 전에 먼저 네가 싸우는 상대가 누군지 눈치채고 멀찍이 거리를 둘 거야. 자기들이 놈을 상대로 싸울 깜냥이 안된다는 걸 아니까. 그런데도 너한테 흥정을 거는 대신 도와주겠다고 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야. 교만으로 똘똘 뭉친 멍청이거나, 너를 당첨복권으로 여기는 못 믿을 놈.

18. 더 이상 혼자 버틸 수 없다면 그냥 고양이들을 찾아가.
고양이들이 다니는 통로를 이용하면 녀석들의 마을에 쉽게 갈 수 있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통로가 있다면, 그게 고양이 통로야. 너무 좁아서 들어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너한테는 고양이 시신이 있잖아. 일단 발을 내딛기 시작하면 통로가 넓어지는 것처럼 보일 거야.

19. 통로 안에는 고양이 마을과 말무덤이 있어.
고양이 마을은 말 그대로 고양이들이 모여서 사는 마을이야. 민들레들이 가르쳐주는 방향 정반대로만 가면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거야. 혹시나 싶어 말하는데, 민들레들하고는 말싸움 하지 마. 네가 질 거야.
하지만 말무덤을 조심해야해. 말무덤은 일종의 살아있는 장소야. 인간들을 함부로 잡아먹지 못하도록 고양이들이 자기네 통로 안에 가둬뒀지. 정신 차리지 않고 서성거린다면 어느새 너도 말무덤을 걷고 있을 거야. 주변 잘 살피면서 이동하고, 장승이 보인다면 멈춘 다음 왔던 길로 되돌아가. 네 앞에 말무덤이 있다는 걸 경고해주는 거니까.

20. 고양이 마을에 도착했으면 정중하게 인사해.
처음 만나는 고양이에게 산군을 만나러 왔다고 말해. 네가 시체를 감추더라도 어차피 냄새를 맡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 챌 테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은 녀석의 얼굴을 보여줘. 시체가 밖에서보다 무거워졌거나 다른 모양으로 변했더라도 놀라지 말고.
걱정하지마. 고양이들이 너한테 사납게 굴기는 하겠지만, 넌 손님이니 해하거나 내쫓지는 못해. 만약 유족이라는 고양이들이 나타나서 너한테 왜 죽였냐고 물으면, '말한 바를 지키지 않았다'고 대답해. 이거면 충분해.

21. 고양이들이 너를 어딘가로 안내해줄 거야.
늙은 고양이를 만났다면 먼저 '산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하고 최대한 예의바르게 인사해. 그 노인네가 시체를 보고 화를 내거나 왜 왔냐고 물어보면 그 때 네 결혼반지를 내밀어.
'범이 괴의 탈을 쓰고 있다 하여 괴처럼 옹졸하면 괴가 범탈을 쓴 것과 다름이 없소. 지난날 서로 말한 바를 지키시오'
이 말을 기억해.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그대로 말해. 노인네가 뭘 원하냐고 물으면 '나를 쫒는 뱀을 죽여달라'고 해. 너를 쫓는 뱀이라고 정확히 말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고양이 새끼가 어떻게든 수작을 부릴 거야. 늙은 고양이가 반지를 받으면 일이 다 끝난 거야. 이제 너는 안전해. 다 끝난 거야.

22. 사실 내가 거짓말을 했어.

사과할게. 미안해. 나를 구할 방법은 없어. 애초에 네가 이 쪽지를 읽기 시작한 시점에서 난 그냥 죽은 거야. 내가 돌아올 방법 같은 건 없어. 뱀이 죽어도 나는 돌아오지 않아.
날 제발 용서해줘. 내 가문은 오랜 싸움에서 패배했고, 마지막 자손인 나도 놈에게 죽었으니, 내게 남은 선택지는 어떻게든 너를 살리는 것밖에 없었어.

네가 가야할 길은 하나야.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사랑을 해.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건 기억 저편에 묻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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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닉 명) | 작성시간 24.07.29 여샤 나도 다읽고 그거 생각나서 위에 올라가서 다시 읽었는데 쪽지 그만읽어도돼 이 말이 없어,,, 아닌가 내가 못찾나 다시 몇번인지 찾아볼게..
  • 답댓글 작성자(닉 명) | 작성시간 24.07.29 아 8번에 있네 크크 쏘리 ><


    8번에서 만나는 분이 산군님 아녀? 그럼 나중에 글쓴이 죽은거 남이 알려주지 않을까?!
  • 작성자곤약김밥 | 작성시간 24.07.31 재밌는데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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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윤덕영매국노 | 작성시간 24.07.31 씨핥 어차피 저리 될거면 첨부터 고양이한테 반지주면서 뱀 죽여달라고 했으면 안되냐고~!~!
  • 작성자띿스타를사랑하지마세요 | 작성시간 24.08.07 넘재밋고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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