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치르치르 미치르
죽은 세계에서 살아가기(2)
-편의점 알바-
다시 한번 말한다. 세계는 죽었다. 나는 죽은 세계에서 못 죽고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그리 퍽퍽한 일상은 아니다. 되는대로 들어가서 자고, 되는대로 먹고. 인프라가 죄다 멸망한 세계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건물도 꽤 있다. 한때 우리나라 건물 설계가 내진설계가 어쩌느니 저쩌느니 하는 말이 많았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지금도 건재하게 서 있는 건물이 얼마나 많은데.
....뭐, 고층 건물은 다 무너졌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하늘에서 뭐가 떨어지면 고층 건물이 맞을 확률이 더 높으니까.
오늘은 편의점 알바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세계가 죽어가는데 무슨 편의점 알바냐고? 그러게 말이다. 나도 딱히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다.
뭐 쓸만한 게 없나 돌아다니던 중, 비교적 멀쩡한 편의점을 발견했다. 간판도 제대로 달려있고, 문도 절반은 깨졌지만 잘 붙어있다. 내부도 비교적 멀쩡하길 바라며 들어갔다.
아. 여긴 오아시스다. 내가 걸었던 곳이 사막이라면 여긴 젖과 꿀이 줄줄줄 흐르는 오아시스다.
대부분의 식료품이 멀쩡하고 생필품도 꽉 차있다. 이런 곳이 남아있었다니. 오늘의 대발견에 감사하며 생라면을 부셔먹고 워크인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한참 행복하게 자고 있는데 방울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아, 잠 좀 자자...싶었던 것도 잠시. 누가 저렇게 방울을 울리는 거지? 설마 또 다른 사람?
헐레벌떡 워크인에서 나가자 기다랗고 초록색인 생명체가 다섯 개나 되는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어......왜요?
-ᜦᜤᜣᜡᜡ!!!
죄송한데 뭐라고 하는지 한 개도 모르겠거든요. 사실 별로 죄송하지도 않아요.
-ᜩᜩ!!!!
자세히 보니까 카운터에 건전지를 올려두고 있었다. 건전지를 쓸 물건이 요즘도 있나?
아니, 그 전에 저 생명체가 건전지를 어디다 쓰려고...?
아마도 계산해달라는 말인 것 같아서 쭈뼛쭈뼛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생명체 뒤쪽에서 푸른색 꼬리..? 꼬린가 저거? 꼬리 비슷한 게 나와서 바닥을 탁, 탁, 탁 쳤다. ...저도 그냥 편의점 털어먹는 선량한 인간일 뿐인데요.
그리고 포스기에 전기도 안들어오는데요.
“어.... 천원입니다.”
대충 건전지를 뒤집어보고는 말했다. 초록색이 갸웃한다. 천원이라고, 천원.
한참을 갸웃대던 초록생명체는 이내 몸 안에서 무언가를 울컥울컥 게워냈다. 저기요. 저기요..?
한참을 꿀렁거리던 녹색이 웨엑, 하고 보라색 돌을 토해냈다. 점액질에 쌓여 있어서 별로 만지고 싶진 않았는데,
-ᜮᜯ?
“....네....천원...받았습니다...”
이게 쟤네 기준 천원인지 뭔지는 알 바 아니고. 안받으면 받을 때까지 서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손으로 들어올렸다. 녹색 점액질이 손에 붙어 주욱 늘어났다. 으으. 찝찝해.
그 초록초록한 생명체는 건전지를 열심히 까...ㄲ....까려고 노력은 하는데 미끄러운지 도통 까질 못한다.
빨리빨리의 민족, K-한국인은 저런 답답한 거 못 참는다.
“제가 까드릴까요.”
초록생명체는 여섯 개의 눈으로-뭐야. 그새 눈이 늘어났어.-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건전지를 내밀었다. 건전지를 까서 손인지 뭔지 모를 것에 얹어주니까 그대로 텁, 하고 몸에 집어 넣는다. 와닥와닥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 보니 먹는건가보다.
...건전지를 먹는다고? 나 돌 손으로 만져도 되는 거 맞는지 모르겠다.
-ᜱ!
만족스러웠나보다. 대충 내 감이 그렇다. 그렇게 건전지를 와닥와닥 씹어먹은 그 초록 생명체는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갔다. 도대체 뭐가 뭔지. 덜 잔 잠을 마저 자려고 워크인으로 들어가려는데,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또 방울이 울린다. 뭐야 또.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또 무슨 현상이람. 도대체가 익숙해지지 않는 매일에 고개를 떨구고 마른세수를 하는데, 바닥에 발자국이 하나씩 찍히기 시작했다. 그 발자국은 편의점을 세 바퀴, 네 바퀴 돌더니 이내 카운터 앞에 멈췄다. 카운터 위에는 어느샌가 잡다한 물건이 올려져 있었다.
...계산하라고?
한숨을 삼키며 일단 다시 카운터로 들어갔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인 나는 이 세계에서 쪼렙중의 쪼렙이다. 사실 있는 대로 센 척은 다 했지만, 보통 새롭게 나타난 생명체가 손가락 까딱 하면 몸이 터지는 게 인간이다.
...하긴. 원래도 인간은 내구력으론 별로긴 했다.
“....만 사천원입니다.”
초록이는 뭐라도 뱉어주긴 했는데, 이 안 보이는 얘는 어떻게 계산을 하려고 그러는걸까.
걱정이 무색하게도 허공에서 쫘르르륵, 은화가 쏟아졌다.
그래. 쪼렙이 다른 세계 고인물들 걱정하는 거 아니다.
물건들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내 발자국이 밖으로 향하는 것까지 보고 워크인으로 다시 들어갔다.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에, 물류가 왔다.
나는 처음에 내가 드디어 정신줄을 놔버린 줄 알았다. 누가 워크인 문을 계속 텅, 텅, 텅 두드리길래 있는대로 짜증을 내며 문을 열었는데, 초록색 모자를 쓰고 파란색 조끼를 입은, 눈이 한 개인 생명체가 네 팔로 팔짱을 낀 채 남아있는 한 팔로 나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ㅁ, 뭐-?”
-ଥଦଣଣୋ
“네?”
그 생명체는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툭툭툭, 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 인하시, 라고요.
“...제 사인을 왜요?”
-하.........
폐급직원 보는듯한 시선으로 날 훑어보지 말아줄래요. 진짜 억울하네.
-물류왔, 으니까사, 인하세요
“...뭐가 와요?”
그러자 그 생명체는 하나 있는 눈알을 위로 데룩, 굴리더니 내 팔을 덥썩 잡고는 편의점 밖으로 나를 질질 끌고 갔다.
트럭이 서 있었다. 편의점 물류 트럭이.
-정리는알아, 서하시고사, 인하세요빨리
“....”
-아진짜바, 빠죽겠는데.
그 생명체의 팔에서 뾰족한 가시가 튀어나와 내 손가락을 쿡, 찔렀다. 찔끔 나오는 피를 주욱 뽑아낸 생명체는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에 냅다 내 지장을 찍고는 트럭에서 박스를 턱턱 꺼내 내려놓고 차를 타고 가버렸다.
일단 눈앞에 있는 박스를 하나하나 까보자 편의점에 진열할 법한 물건들과,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저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지장까지 찍힌 마당에 그냥 튀면 안될 것 같아서 일단 낑낑대며 박스들을 다 안으로 들였다. 건전지랑, 건전지랑, 건전지랑.....건전지랑.... 오, 냉동식품.
...냉동식품?
편의점 냉장고를 확인해보자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포스기를 보니 포스기도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너무 인간 차별 아닌가요. 저는 생라면 부셔먹고 잤는데.
그리고 또 키에에엑 거리면서 이빨로 날 물려고 하는 빨간 꽃 세 개랑 뭔 알 수 없는 검정 다면체들을 대충 구석에 처박아두니 시간이 훌쩍 갔다. 그래도 뭐라도 할 게 있어서 건설적인 하루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 좋게 잠이 들려고 했는데, 편의점 문이 미친 듯이 딸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정말, 정말이지 너무나 성실한 밤을 보냈다.
일단 초록이가 들어와서 건전지를 쓸어갔다. 또 한참을 꿀렁대더니 붉은색 돌 세 개와 보라색 돌 두 개를 뱉어냈는데(웩) 도통 단위를 모르겠어서 그냥 다 쓸어 담아서 돈통에 쑤셔 박았다. 계산하고도 안가길래 까줘...? 하고 물어봤더니 건전지를 와르르르 쏟길래 진짜........어쩌겠어. 열심히 깠다.
한창 건전지를 까고 있는데 검은색 물을 뚝뚝 흘리는 생명체가 들어왔다. 물이라기에는 약간 찐득한, 만지면 병사할 것 같은 액체를 질질질 흘리면서 물건을 만지작대는데, 쟤는 저거 분명 원래 자기 고향에서도 진상이었을 거다. 한참 둘러보더니 구석에 박아둔 다면체 하나를 들고 와서 카운터에 내려놨다. 털퍽, 하고 액체도 같이 떨어졌다. 이거 포스기에 찍히나.
...찍히네.
“어...이백 오십만원...이요?”
그러자 그 검정액체생물체는 손으로 추정되는 뭔가를 자기 몸속에 푹 집어넣더니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철퍽, 철푸덕, 찔꺽, 하는 소리가 거슬렸다. 한참 몸을 뒤적거리다 흰색으로 빛나는 작은 결정 두 개를 내려놨다. 그리고는 계속, 빤히, 움직이지 않고 앞에 서 있었다.
“...거스름돈이요?”
그러자 고개인지 뭔지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 움직이지 말아요. 자꾸 액체 떨어지잖아.
“제가 이 화폐단위를 모르는데...”
뭐 방법이 없어서 돈통을 들어서 앞에 내놨다.
“챙겨가세요.”
그러자 또 그 손 비스무리한걸로 돈통을 휘적대더니 은화 몇 개랑 돌 하나를 자기 몸속에 쑤셔 박고 나갔다. 그 사이 초록이는 또 꼬리를 빼고 바닥을 탁탁탁탁탁탁탁탁탁 치고 있었다. 아니, 내 손이 멈추긴 했는데.
마저 건전지를 까주고 좀 앉아볼까 했더니 편의점 문으로 얼굴 하나가 쑥 들어왔다.
그리고는 모오오오오오오옥이 들어온 다음에 몸이 들어왔다.
편의점 층고가 높지 않아서 목 네 바퀴를 둘둘 만 그 생명체는 천장에서 편의점을 둘러본 이후에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기분상 그랬다는 거다. 일단 얼굴과 목의 윤곽에 큰 차이가 없어서 어디까지가 얼굴인지를 모르겠다) 몸을 뒤로 빼고, 다시 모오오오오옥을 빼고 나갔다.
그러고 나서는, 날개 달린 인간(얼굴이 달렸다고 인간 취급을 해줘야 하느냐는 일단 의문이긴 하다)이 왜 모이는 안 파냐고 화를 내고-그야 여긴 편의점이니까요 씨발-또 뭔가가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다가, 해가 밝았다. 거짓말처럼 딸랑거리는 게 멈춰서 이제 진짜 자야지 싶었는데.
-물, 류요.
졸린 눈을 부비며 밖에 나가자 컴플레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매장이 더러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발. 안해.
냉동 하나 돌려먹고 폐업 문 앞에 걸어놓고 통조림 쟁여서 도망쳤다.
이게, 내 장대한 2.5일간의 편의점 알바 썰이다.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