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arca.live/b/spooky/79678017
뭐 거창한 병은 아니고
일명 지랄병이라고 한번씩 의식을 잃고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병이었다
이게 병이 좆같은게 현대과학으로도 상당수의 환자들이 뇌전증을 겪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거
나도 뇌파검사에 mri에 다 찍어봤는데도 나오는게 없었고
중학교때부터 매달 병원에서 트리렙탈이라는 약을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근데 그거 먹는다고 딱히 낫는건 아니고, 갈수록 심해졌다.
몇 달에 한번 생기던 발작이 한달에 한 번으로 늘고
한달에 한 번씩 있던 발작이 두 번, 세 번. 나중엔 일주일에 한두번씩 쓰러지고 그랬다
뇌전증으로 쓰러지고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에서 일어나면 언제나 뇌진탕으로 인한 격한 두통과 어지럼증
그리고 경련으로 인해 탈구된 어깨에서 오는 통증 뿐이었다
의사가 고등학생한테 장애등급을 받거나 전두엽을 헤집어놓는 수술을 권할 정도였으니 진짜 어지간히 심했다
근데 내가 워낙 병신이라 그런 위험한 병을 달고서도 몸을 함부로 굴리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죽을뻔한 일들이 참 많았는데
내가 그 때 쓰러져 있는동안 꿨던 꿈에 대해서 말해볼까 한다
잡설이 길었다.
-----
이런 꿈을 처음 꿨던 때는 사실 특발성 뇌전증이 생기기 이전인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심한 우울증 환자였고 내가 일곱살 때 어머니와 이혼한 이후부터 쭉 일을 하지 않으셨다.
매일같이 걸려오는 빚 독촉전화에 우리집 전화기에는 항상 전화선이 뽑혀 있었고 그땐 몰랐지만 아버지는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고 계셨다.
듣기만 해도 좆같은 얘기 해서 미안한데, 그래야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피를 한 바가지씩 토할 만큼 심하게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은것을 납득시킬 수 있어서 그랬다.
전기장판을 틀어두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끊임없이 몰아치는 오한에 떨며 잠들었던 그날 오후
나는 꿈속에서 콜로세움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키가 5m는 될 것 같은 커다란 괴물이 나를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관중석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모두 하나같이 광대분장을 한 채로 환호하고 있더라
그들이 10....9.... 천천히 카운트 다운을 세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서 날 공격하던 괴물은 날 더 거세게 공격하기 시작하더라
나는 반면 그렇게 던져지고 두들겨 맞으면서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었다.
아직도 생생한 그 꿈에서 가장 생생한 기억은 내가 그 카운트 다운이 끝날때까지 반드시 무언가를 견뎌내야 했다는 것.
아쉬운 듯 천천히 느려지는 카운트다운도 곧 2가 되고 1이 되더라
도저히 견딜 수 없을것 같은 생각이 들어 포기하려고 할 때
"영" 하는 소리와 함께 관중들의 안타깝다는 탄식 소리
나는 그때 식은땀에 젖은 채로 잠에서 깨어났고 열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이 꿈을 두 번 꿨다. 방금 얘기한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번, 고등학교때 아르바이트 도중 무거운것을 나르다 발작이 일어났을 때 한 번.
그리고 다른 꿈도 있다. 이것도 두 번 꿨는데
한 번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가게에 들렀다가 간질발작으로 쓰러지며 매대에 깔렸을 때.
그리고 2학년 때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봇대에 현수막을 설치하는 일을 하면서 사다리 위에서 발작이 일어나 추락했을 때.
이건 조금 더 현실성이 있다. 오히려 그럴듯 해서 더 허구같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4차선 도로 정도로 큰 도로가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줄지어 선 채로 있었다.
이윽고 커다란 검은색 승합차가 줄의 가장 앞에 서고
거기에선 덩치가 큰 남자가 한 명 내리더니 승합차의 뒷문을 열고 사람들을 하나씩 태우더라.
그 차에 수십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간건지.
곧 내 차례가 되고 나도 당연히 앞의 사람들을 따라 승합차에 타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다른 사람들은 군말 없이 태워주던 그 남자가 나를 슥 쳐다보더니 차에 못 타게 하더라?
나는 꿈속에서 저 차를 반드시 타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기에 온갖 떼를 쓰며 남자에게 태워달라 했고 남자는 완강했다
그래서 싸가지없이 남자를 강제로 밀쳐내고 차에 타려고 했는데
그 남자가 힘이 어찌나 센지 나를 한 번 미니 몇 미터는 나가떨어지더라?
그 순간 다시 꿈에서 깼다. 구급차 안이었다.
지금 와서는 지인들끼리 모여서 한 번씩 무서운 얘기를 할 때
'임사체험입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사실 그런건 없다는건 알고 있다.
그냥 몸이 위험한 상황에서 내 자의식이 그럴듯한 꿈을 보여준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직도 한 번씩 관중들의 아쉬움에 찬 탄식소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승합차에 타고 싶었던 내 감정이 떠오를때면 한 번씩 소름이 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