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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할매의 속삭임

[소설]하객 알바

작성자hardcore|작성시간26.02.12|조회수8,472 목록 댓글 34

 

출처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apolitan&no=47477&exception_mode=recommend&page=2

 

 

 

 

"이번 건은 페이가 좀 센데, 대신 조건이 까다로워."

 

매니저 형이 내민 봉투에는 현금 30만 원과 쪽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확실히 액수를 보니 보통 하객 알바 시급의 10배였다. 

 

하객 알바를 꽤 여러 번 해봤지만 이 정도 액수가 일당으로 나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입이 떡 벌어져서는 종이를 꺼내 읽었다.

 

[역할: 신랑의 고등학교 동창 '박민우'.] 

[성격: 활달하고 목소리가 큼. 분위기 메이커.] 

[미션: 신랑과 어깨동무하고 사진 찍기, 큰 소리로 축하 멘트 날리기, 뷔페에서 '신랑 진짜 괜찮은 놈이다'라고 주변에 떠들기.]

 

주어진 역할과 미션은 딱히 까다롭거나 어렵진 않았다. 

 

이래 봬도 나는 하객 알바 경력 3년 차의 이른바 '프로 하객'이었기에 결혼식, 돌잔치, 장례식 가리지 않고 입금과 동시에 웃음이건 눈물이건 바로바로 뽑아낼 수 있었다. 

 

나는 정장을 갖춰 입고 강남의 한 고급 호텔 웨딩홀로 향했다.

 

역시 고급 호텔 답게 홀은 웅장했고,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런데 로비에 들어선 순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접수대에 앉아 축의금을 받고 있는 중년 남성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아, 지난달 강동구 장례식장에서 상주 역할을 했던 김 씨 아저씨였다.

 

"어? 형님, 형님도 여기 받으셨어요?" 

 

"쉿. 목소리 낮춰. 나 오늘은 신랑 큰아버지야."

 

김 씨 아저씨가 나를 몰래 툭툭 치며 주의하듯 말했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신부 대기실 앞에 서 있는 여자들은 저번 주 돌잔치에서 아이 엄마 친구로 만났던 멤버들이었고, 저기 화장실로 들어가시는 어르신은 재작년 어느 결혼식에서 주례 선생님으로 뵈었던 분이다.

 

'뭐야, 이거?'

 

보통 하객 알바를 쓰더라도 실제 하객의 10%에서 20% 정도만 섞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곳은 내가 아는 얼굴만 대충 세어봐도 열댓 명이 넘었다. 심지어 나머지 모르는 사람들도 행동거지가 수상했다. 

 

끼리끼리 대화하는 척하지만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고, 웃음소리는 타이밍에 맞춰 기계적으로 터져 나왔다.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는 척하지만, 아무도 명함을 지갑에 넣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결혼식 하객의 대부분, 어쩌면 전체가 알바인 것 같아 보인다.

 

왜 그럴까? 신랑이나 신부 둘 중 하나가 혹은 둘 다 친구가 아예 없어서 전원을 고용했을까? 아니면 양가 부모님이 체면 때문에 무리하신 걸까? 

 

하지만 딱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냥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나는 내 역할에 집중하기로 했다.

 

"야! 철수야! 결혼 축하한다!"

 

나는 신랑 대기실로 들어가 과장되게 소리쳤다. 신랑은 턱시도가 아주 잘 어울리는, 키가 크고 훈훈한 외모의 남자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 민우야! 와줘서 고맙다. 야... 진짜 오랜만이다!"

 

신랑의 연기력은 훌륭했다. 눈가에 살짝 맺힌 물기와 떨리는 목소리가 진짜 십년지기 친구라도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속으로 신랑의 연기력에 감탄하며 그와 어깨동무를 했다.

 

"너 임마, 진짜 성공했구나. 이런 호텔에서 결혼도 하고. 제수씨는 어디서 만났냐?" 

 

"아, 그게... 스터디에서 만났지. 알잖아, 나 공부 열심히 했던 거."

 

신랑이 자연스럽게 대사를 받아쳤고, 우리는 사진사가 요구하는 대로 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자, 이제 식장으로 이동하실게요!"

 

진행 요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300석 규모의 홀이 꽉 차 있었다. 

 

모든 하객이 기립해서 박수를 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환호성, 꽃가루, 우아한 클래식 연주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완벽해서 비현실적이었다. 300명의 사람이 내는 소음 치고는 잡음이 하나도 없었다. 

 

어떠한 웅성거리는 소리도 없이, 오직 반복되는 박수 소리와 일정한 톤의 환호가 이어지는 공간 안에 있자니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이윽고 신랑과 신부가 함께 버진 로드를 걸어가며 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원형 테이블에 앉아 옆자리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직장 동료' 역할인 듯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저기요. 혹시 어느 업체에서 오셨어요?"

 

내가 작게 속삭이자 남자는 처음엔 흠칫하더니, 이내 같은 업계 사람인 걸 알았는지 조용히 대답했다.

 

'S기획이요. 그쪽은요?' 

 

'저는 H인력이요. 근데 규모가 엄청나네요. 이걸 다 부르려면 돈이 얼마야...' 

 

'그러니까요. 신랑 집안이 재벌인가 봐요.'

 

그때, 신랑신부의 혼인 서약이 끝나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하는 순서가 되었다. 신부가 눈물을 흘리며 친정 부모님을 안았다. 

 

친정 어머니도 오열 하며 신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문득 내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신랑이 큰절을 올리려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신랑의 귀에 꽂힌 콩알 만한 인이어 같은 장비가 보였다.

 

신랑만 낀 게 아니었다. 신부의 올린 머리 사이로도, 얼핏 인이어의 투명한 줄이 보였다. 

 

심지어 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친정 어머니의 귀에도 무언가 있었다.

 

'...뭐야? 설마 신랑 신부도 알바야?'

 

그 순간, 내 귀에 날카로운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렸다. 아니, 정확히는 기계음이 아니라 홀 전체에 울려 퍼지는 스피커 소리였다. 

 

하지만 음악 소리에 묻혀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자, 컷. 감정 좋았습니다. 다음 축가 순서, 큐."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한 고주파처럼 공간을 채웠다. 그러자 신랑과 신부가 동시에 눈물을 뚝 그치고 몸을 일으켰다. 

 

친정 어머니도 언제 울었냐는 듯 표정을 싹 지우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순간 소름이 끼쳐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날 뻔했다. 

 

신랑, 신부, 양가 부모님까지 알바라면, 도대체 이 결혼식은 왜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300명의 하객 모두가 알바다.

 

심지어 신랑 신부도 알바, 직원들도 알바.

 

그러다 문득 예식장 맨 뒤편, 조명실 유리창 너머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어린아이였다. 

 

일곱 살?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마치 인형 놀이를 감독하는 신처럼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어느새 축가가 시작되었고, 신랑이 마이크를 잡고 신부에게 노래를 불렀다. 

 

음정, 박자, 제스처 모든 것이 아이돌 가수처럼 완벽했다. 그는 신부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입모양은 가사와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독순술을 할 줄 몰랐지만, 신랑이 노래 중간 간주 부분에서 고개를 돌리며 아주 작게 뱉은 말은 읽을 수 있었다.

 

'힘들어.'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이윽고 식이 모두 끝나고 사진 촬영 시간이 되었다. 

 

"자, 신랑 신부님 친구분들 나오세요!" 

 

사진사의 외침에 나를 포함한 '친구 역할' 30명이 우르르 단상으로 올라갔다.

 

나는 일부러 신랑의 바로 뒤에 섰다. 그리고 플래시가 터지기 직전, 나는 참지 못하고 신랑의 등 뒤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저기요. 이거 대체 무슨 촬영이에요? 영화예요?"

 

신랑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입가에 고정된 미소를 유지한 채, 복화술로 대답했다.

 

"조용히 해요. 클라이언트가 보고 있잖아요." 

 

"클라이언트요? 저 꼬마 애요?" 

 

"꼬마가 아니라 회장님 손자 분이십니다. 이 호텔 오너 일가에요."

 

신랑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네?" 

 

"도련님이 '결혼식 놀이'가 보고 싶으시다잖아요. 리얼한 걸로. 그래서 우리 같은 A급들만 부른 거 아닙니까. 웃으세요. 일 계속 하고 싶으시면."

 

플래시가 터지자 나는 반사적으로 활짝 웃었다.

 

"자, 이것으로 예식을 마칩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모든 조명이 꺼졌다. 

 

그러자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던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각자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담배 있냐?" 

 

"아! 발이 너무 아픈데."

 

신부는 드레스를 걷어 올리며 슬리퍼로 갈아 신었고, 신랑은 턱시도 겉옷을 벗어 던지며 매니저에게 물을 달라고 소리쳤다. 

 

300명의 하객들도 순식간에 표정을 지우고 일제히 뷔페로 몰려갔다.

 

"민우야, 수고했어. 연기 좋더라."

 

어디선가 매니저 형이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형. 저 신랑 신부, 진짜 부부는 아닌 거죠?" 

 

"당연하지. 모델 에이전시 애들이잖아. 쟤넨 주인공 역할이라 오늘 페이 꽤 셀걸?" 

 

"그럼 저 뒤에 있던 꼬마 애가 진짜 돈을 낸 거예요?"

 

매니저 형은 피식 웃으며 내 손에 식권 한 장을 쥐여주었다.

 

"꼬마? 아, 2층에 있던 애? 걔는 그냥 구경꾼이고." 

 

"네? 아까 신랑이 오너 일가 손자라고..." 

 

"아니야. 진짜 클라이언트는 따로 있어."

 

매니저 형이 턱짓으로 예식장 단상 위를 가리켰다. 화려한 꽃장식 사이에, 아주 작고 검은 렌즈가 박혀 있었다.

 

매니저 형은 먼저 식당으로 내려가고 나는 텅 빈 예식장에 홀로 남았다. 

 

새삼 꽃향기가 역하게 느껴지며 바닥에 떨어진 꽃가루들이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싫어져서 아래층 뷔페를 지나쳐 아예 그냥 식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뷔페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고장수리중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식전까지만 해도 잘 됐던 게 갑자기 고장이 났다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대로 비상 계단으로 내려가려는데 계단실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 있었다.

 

식장에는 오직 뷔페로 향하는 층까지만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까 식장에서 느낀 소름이 또다시 돋는 것을 느끼며 나는 조심스럽게 뷔페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순간이었지만 볼 수 있었다.

 

뷔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위치에서 대기한 채 서 있다가 내가 들어섬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뷔페 안에서 하객 역할을 하던 사람들은 태연하게 뷔페에서 음식을 받고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시늉을 했다.

 

그 때, 뷔페 한 구석에 매니저 형이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급하게 형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혀, 형. 여기 뭔가 이상한 거 알아요?"

 

"어, 왔어? 뭐가? 온 김에 여기 앉아서 먹어라. 혼자 먹으려니까 너무 뻘쭘하다 야."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사람들 계속 연기 중인 거 같은데..."

 

"뭔 소리야? 아까 식장 시퀀스는 사진 찍고 끝난 거야. 밥은 클라이언트가 수고했다고 먹고 가라고 한 거고. 너무 몰입한 거 아니냐?"

 

매니저 형이 킥킥거리며 하는 말을 들으니 정말 내가 과몰입을 해서 예민해진건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그러자 내심 안심이 되고 긴장이 풀리면서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민우야, 형 또 가지러 갈건데 잠깐 자리 좀 앉아 있을래?"

 

"네? 아, 네 다녀오세요."

 

매니저 형이 접시를 한쪽으로 치워두고 다시 음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잠깐, 

 

근데 아까부터 매니저 형이 내 이름을 뭐라고 불렀더라?

 

문득 매니저 형이 앉았던 자리를 보자 형이 두고 간 물건들과 휴대폰이 보였다.

 

그리고 휴대폰 옆에 여러 번 접혀 있는 쪽지 하나가 보였다.

 

직감적으로 저걸 봐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 나는 뒤를 한번 돌아보곤 몰래 그걸 집어 들었다.

 

쪽지를 펼치자 어딘가 낯익은 양식의 글이 보였다.

 

 

[역할: H인력 매니저 '이호창'.] 

[성격: 능글 맞고 노련함. 바람잡이.] 

[미션: 대상자에게 미션 부여. 대상자가 미션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감시. 미션 종료 후 후속 작업 준비.]

 

 

쪽지를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처음 쪽지를 봤을 때는 상황이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가 뒤늦게 모든 것이 끼워 맞춰졌다.

 

내가 모든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을 땐, 뷔페 안에 있던 모든 인원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저쪽 한 켠에서, 매니저 형, 아니 이젠 누군지도 모르겠는 한 남자 역시 접시를 든 채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구나.

 

 

 

 

 

 

 

 

 

 

 

내가 주인공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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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깨끗한방 | 작성시간 26.03.09 30만원으로 ㅡㅡ?!?!!
  • 작성자치무치무 | 작성시간 26.03.10 돈 더줘;;;
  • 작성자안배고프다 | 작성시간 26.03.13 뷔페에서 미션하는 것만 기다렸는데
  • 작성자말랑말랑하다말랑말랑한 | 작성시간 26.03.30 돈 더 줘요
  • 작성자이상해 | 작성시간 26.06.21 저를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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