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홍콩할매의 속삭임

[소설]우리가 하게 될 일

작성자개에바|작성시간26.04.01|조회수4,016 목록 댓글 8

 

출처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apolitan&no=38194

 

 

 

 

 

 

어느 날, 처음 보는 빨간 버튼이 내 방 책상에 놓여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버튼을 들어 보니 설명서라고 하기엔 다소 짧은 내용이 조그만 메모지에 쓰여 있었다.

 

[이 물건은 버튼을 누르기 1초 전에 불이 들어오는 '예측기'입니다. 전 인류에 보급하기 전 간단한 테스트 중이니 가볍게 즐겨 주세요!]

 

예측기? 버튼을 누르기 1초 전에 불이 들어온다고?

 

무슨 말인지 궁금해 손을 갖다 대자, 정말로 내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기 1초 전에 빨간 불이 반짝였다.

 

정확히는, 버튼에 빨간 불이 들어오자, 내가 버튼을 눌렀다.

 

-라고 하는 것이 이 상황에 대한 보다 시간적으로 적확한 묘사일 것이다.

 

정말 이게 1초 후의 미래를 예측하는 기계인 건가?

 

게다가, '전 인류에 보급하기 전'이라니.

 

외계인 같은 존재가 날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단 말인가?

 

궁극적으로 이 예측기를 사람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그렇다면 그들은 내가 예측기로 무얼 하길 바라는 거지?

 

이걸 인류에게 주는 이유는?

 

예측기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생각을 하던 도중, 갑자기 버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나는, 붉은 빛을 본 순간 버튼을 누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예측기가 틀리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의 반응속도는 대략 0.3초 내외라고 했던가?

 

예측기가 제공하는 1초는 내가 그 빛을 보고 결정을 내리기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이러면 어쩔 건데.

 

그러자, 침대 밑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튀어나와 순식간에 버튼을 누르곤 흩어져 사라졌다.

 

이제야 깨달았다.

 

이 예측기는 절대적이란 것을.

 

-----

 

며칠간 조사해 본 결과, '예측기'라는 것은 테드 창이라는 유명 SF 작가의 단편소설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나오는 개념이라고 한다.

 

그 소설에서도 예측기는 절대적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예측기는 버튼이 눌리기 1초 전에만 빛을 내며,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도 이 진리를 거스를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든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의지의 부재를 인식함으로 인한 무기력함에 좌절해,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마치 시체처럼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다만 내가 처한 현실과 다른 점은, 그 소설 속 사람들은 시체가 되어 살아간다는 거지만, 난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 살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 예측기와는 달리, 내 예측기는 대단히 위험하다.

 

불이 들어오고 1초 뒤에 내가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정확히는, '무슨 일이 벌어져서 버튼이 눌리게 될지' 알 수 없다.

 

예측기는 절대적이다. 그것이 빛을 내면 무슨 일이 있어도 1초 뒤에 버튼은 눌리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직접 그 버튼을 누르는 게 가장 안전하다.

 

지난 며칠 동안 내가 제때 버튼을 누르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이해 범주 내의' 일들은 다음과 같다.

 

- 불빛을 못 보고 앉아서 작업하던 중 기절하여 이마로 버튼을 누름.

 

- 샤워 중, 방에 있던 예측기가 작동했는지 책장이 무너지며 버튼이 눌림. (이후 항상 예측기를 몸에 지니고 다님)

 

- 길을 걷다가 실수로 예측기를 떨어트림과 동시에 예측기가 작동함. 고층 빌딩에서 투신한 사람이 버튼 위로 떨어짐.

 

- 무거운 책을 올려 '예측기가 항상 눌려 있는 상태'로 만듦. 몇 시간 뒤 예측기의 불이 꺼지더니 1초 후 지진이 일어나 책이 바닥에 떨어짐.

 

이 외에도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혀 버튼이 눌리는 등,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위의 사례들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은, 내가 예측기에 반응하지 못해 겪게 된 '비합리적 위협'이다.

 

첫날 침대 밑에서 나온 그림자처럼 말이다.

 

- 잠에서 깨자 모르는 사람의 시체가 버튼을 누른 채 나를 응시하고 있음.

 

- 잠에서 깨자 모르는 사람이 버튼을 누른 채 날 보며 웃고 있음.

 

- 무거운 책으로 예측기를 누른 상태로 잠에 들기 직전, 불이 꺼졌는지 책이 순식간에 불타 사라짐.

 

- 핸드폰 화면에서 손이 튀어나와 버튼을 누름.

 

- 거울 속 내가 3초 후에 버튼을 누르라고 지시함. 2초 후에 불이 들어옴.

 

- 거울 속 내가 아닌 무언가가 5초 후에 버튼을 누르라고 지시함. 1초 후에 불이 들어옴. 그로부터 1초 후 버튼을 누르자 그 무언가는 아쉬워하며 사라짐.

 

- 거울이 6초 후에 버튼을 누르라고 지시함. 거울이 깨짐. 불은 들어오지 않음.

 

- 예측기를 한강에 던져버리자, 수면에 커다란 얼굴이 나타남과 동시에 강이 새빨갛게 빛나기 시작함.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뛰어들어 예측기를 찾아 나에게 전달함 왜 웃고 있었을까?​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특히나 눈을 깜빡이는 그 순간 예측기가 빛나기라도 할 때면 난 영문도 모르고 봉변을 당해야만 했다.

 

혹시나 이 예측기에 무언가 영적인 작용이 있을까 싶어 온갖 종교 시설, 심지어 무당집에도 찾아가 봤지만 헛수고였다.

 

벽에 걸린 성모상이 이유 없이 떨어져 옆에 있던 신부가 넘어지며 버튼을 누른 것 말고는 별다른 사건도 없었다 ​성모상이 원래 웃고 있었던가?

 

예측기를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매번 실패했다.

 

망치로 내리치거나, 불구덩이에 던지거나, 건물 옥상에서 던지려고 몇 번은 애썼지만, 결론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예측기를 파괴하거나 분해할 수 없단 사실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일종의 미래 예지가 가능한 물건을 마치 장난감처럼 나에게 쥐여준 고등한 존재를 상정한다면, 예측기의 불멸성은 크게 놀랍지도 않은 것이었다.

 

문제는, 왜 실패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망치를 휘두르려고 손을 높이 들면, 어느샌가 난 공구함을 정리하고 있었고,

 

자동차 바퀴 앞에 예측기를 두고 시동을 걸면, 어느샌가 난 조수석에 예측기를 두고 주차를 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의 영상을 찍는 것 역시 생각에만 그칠 뿐, 실행은 하지 못했다.

 

그 순간을 영상으로 담아 확인하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래적인 두려움일까.

 

어쩌면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역시, 반드시 잊어야만 하는 것을 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2개월이 지났다.

 

난 오로지 이 예측기를 누르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회사는 동료 몇 명이 죽은 뒤 그만뒀고, 모든 관계를 정리했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직장을 찾으면서, 온라인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모든 행동을 집에서 하게 되었다.

 

언제든 빛을 발하는 예측기를 재빨리 누를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내가 자는 동안에는 고맙게도 동생이 버튼 누르는 일을 대신 해주고 있다.

 

동생이 집에 놀러 와서 버튼에 관심을 가지고 눌러앉기 전까진 매일 아침 일어나기가 너무 무서웠는데, 참 다행이다.

 

딱 하나 거슬리는 게 있는데, 저거 내 동생 아니다.

 

동생은 우리 집에 놀러 온 다음 날에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죽어 있었다.

 

장례식도 했다.

 

입관 도중 눈을 번쩍 뜨곤 내게 달려와 기이하게 점멸하던 예측기를 미친 듯이 눌러대길래 난 그 자리에서 혼절한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죽었던 동생이 살아났다는 충격도 물론 컸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부모님, 친척들, 목사, 장례지도사 등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내게 차마 묘사하기도 끔찍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방이었고, 동생은 쭈그려 앉아 목을 쭉 빼고 버튼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동생(의 시체여야만 하는 것)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내가 기절한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모님은 무사하신지 등 궁금한 건 많았지만, 부패하며 악취를 풍기는 저것과 대화하기는 싫었다.

 

내게 말을 걸지는 않아서 다행인가.

 

부모님께 연락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정말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미루고 있다 ​아니면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듣기 두려워서일지도.

 

사실 난 이 모든 게 꿈일 것이라 간절히 믿고 있다.

 

믿고 싶다가 아니라, 믿고 있다.

 

그래야만 하니까. 어차피 내게 선택권은 없다.

 

-----

 

1년이 지났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난 지난 10개월 동안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

 

다만, 세상이 좀 변했다.

 

내가 예측기를 받고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전 세계인의 눈앞에 예측기가 생성됐다.

 

정말로 예측기가 전 인류에 보급된 것이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이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아프리카 대륙은 미생물조차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한때는 돈을 받고 주로 밤 시간대에 남의 예측기를 눌러 주는 서비스업이 크게 성행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기간에 쇠퇴했다.

 

최근엔 최소 2명이 한 집에 모여 서로의 수면 시간 동안 예측기를 담당해 줘야 한다는 법이 입법되었다.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이런 인간답지도 않은 삶은 직접 끝내버리고 싶을 만도 한데.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예정되었을 것이다. 최대한 죽지 않고 고통받게끔.

 

모두 어떻게든 이 예측이란 형태의 종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과연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는다 한들, 모든 생업을 멈추고 예측기만을 주시하며 행여나 잠깐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우릴 비웃으며 왔다 간 교활한 붉은 빛을 놓칠까 봐 두려움에 떠는 삶에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

 

빛을 발한 붉은 버튼은 1초 뒤에 눌린다는, 이제는 보편적인 진리처럼, 나의 삶과 죽음 역시 쉽게 예측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잠에 들기 전 나는, 그리고 인류는, 간절히 기도한다.

 

정말 우연히도 전 세계의 사람들이 동시에 눈을 깜빡이지는 않기를.

 

그리고 그때 전 세계의 모든 예측기가 새빨간 빛을 발하지는 않기를.

 

그렇게 정해져 있지는 않기를.

 

우리는 그렇게 기도한다.

 

아마도, 예정대로.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레스타드 | 작성시간 26.04.03 그래서 예측기 ? 저게 멀 예측하는겨 .. 무슨 의미인겨 !!
  • 작성자chocol | 작성시간 26.04.03 재미있다
  • 작성자굴보쌈냠냠 | 작성시간 26.04.03 재밌다 ㄷㄷ
  • 작성자진짜공부한다햇다 | 작성시간 26.04.04 헐 넘 무서워
  • 작성자호뵹뵹 | 작성시간 26.04.19 재밋어 ㅠㅠ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