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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는 늘 조금 부끄러웠다.
돌아가신 지 오래되기도 했고, 내가 너무 어릴 때 일이기도 했다. 집안 어른들은 명절마다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손이 참 고왔다느니, 말수가 적었다느니, 젊을 때는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느니. 그런데 그런 말들은 얼굴이 되지 않았다. 기억 속의 할머니는 늘 부엌 쪽 어딘가에서 들리던 기침 소리, 오래된 화장품 냄새, 손등에 닿았던 차가운 살결 같은 것들뿐이었다.
얼굴은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 사진을 거의 꺼내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면 항상 같은 말을 했다.
“네 할머니는 사진 찍는 걸 싫어했어.”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실제로 집 안에는 할머니 사진이 많지 않았다. 제사상 위 영정사진도 이상할 정도로 흐릿했다. 검은 한복 차림의 노인이 정면을 보고 있는 사진이었지만, 눈과 코와 입이 모두 오래된 유리 너머에 잠긴 것처럼 흐렸다. 누구나 그런 사진을 보면 돌아가신 분이라 생각할 수는 있어도, 살아 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진을 정리하게 된 건 어머니가 이사를 준비하면서였다.
오래된 장롱을 비우다가, 맨 아래 서랍 뒤쪽에서 낡은 종이상자 하나가 나왔다. 겉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테이프는 누렇게 삭아 있었고, 상자 안에서는 오래된 종이와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는 별생각 없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은 친척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었다. 결혼식, 돌잔치, 소풍, 누군가의 환갑. 전부 흑백이거나 색이 바랜 사진들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나는 그중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상자 바닥에 가까워졌을 때, 찢어진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처음엔 사진이 아니라 조각난 종이를 대충 붙인 것처럼 보였다. 흑백 인물사진이었다. 젊은 여자의 얼굴이 크게 찍혀 있었고, 사진은 여러 갈래로 찢어진 뒤 다시 맞춰 붙여져 있었다. 어떤 조각은 없었다. 특히 오른쪽 눈 부근은 검게 비어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그 부분을 뜯어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아 있는 왼쪽 눈은 너무 선명했다.
사진 속 여자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말려 있었고, 입술은 짙게 칠해져 있었다. 오래된 사진인데도 눈동자만은 마치 방금 찍은 것처럼 깊고 젖어 보였다.
나는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거 어디서 났어?”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놀란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닌데, 아주 오래전에 이미 질려버린 것을 다시 본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서랍 뒤에 있던 상자에서.”
어머니는 사진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그거 버려.”
“이 사람 할머니야?”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에서 사진을 빼앗으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맞아?”
어머니는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
“젊을 때는 저랬대.”
“할머니 맞네.”
“저 사진은 두지 마.”
“왜?”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상자째로 치우더니, 사진만 따로 집어 신문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런 건 오래 두는 거 아니야.”
그날 밤, 나는 몰래 사진을 다시 꺼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궁금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얼굴. 가족들이 말로만 남긴 사람의 젊은 시절. 그걸 봤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붙잡았다.
나는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한참 바라봤다.
사진 속 여자는 예뻤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입술은 닫혀 있었지만, 꼭 무언가 말하려다 멈춘 것 같았다. 왼쪽 눈은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오른쪽의 검은 빈자리는 나를 보지 않는 대신 어딘가 더 안쪽을 보는 것 같았다.
사진이 왜 찢어졌는지도 이상했다.
찢긴 선들이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서 눈, 코, 입을 지나 목까지 이어진 선들이 마치 얼굴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기 위해 일부러 그어진 것 같았다. 누군가 이 얼굴을 없애고 싶었지만,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것처럼.
나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화면에 뜬 사진은 실제보다 더 이상했다. 카메라가 초점을 잡지 못했다. 분명 책상 위 사진을 찍었는데, 화면 속 여자의 얼굴은 조금씩 흔들렸다. 특히 검게 비어 있는 오른쪽 눈 자리에서만 노이즈가 번졌다.
다시 찍었다.
이번에는 사진 속 여자의 입이 조금 벌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무서워서라기보다, 어이가 없어서. 오래된 사진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종이가 울었거나, 빛이 반사됐거나, 내 눈이 피곤했거나.
그런데 세 번째로 찍었을 때, 휴대폰 화면 속 사진 뒤에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
얇고 흰 손가락이었다. 사진 속 여자의 어깨 위에 올려진 손. 실제 사진에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책상 위 사진을 확인했다. 손은 없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있었다.
나는 사진을 덮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먼저 물었다.
“너 어제 그 사진 봤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보고 이미 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 사진, 네 외할머니가 태우려고 했던 거야.”
“외할머니가?”
“네 할머니가 아니고. 네 외할머니.”
나는 잠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사진 속 사람이 누구야?”
어머니는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네 친할머니.”
“근데 왜 외할머니가 태워?”
“그때는 다 같이 살았으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입을 닫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을 고르는 동안 부엌 벽시계 초침 소리만 크게 들렸다.
“네 할머니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사진도 없어서?”
“아니.”
어머니가 천천히 말했다.
“기억하려고 하면 얼굴이 조금씩 달라졌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어머니는 내 표정을 보고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이야기를 아주 조심스럽게 꺼냈다.
할머니는 젊을 때 사진관에서 일했다고 했다. 사진을 찍는 일은 아니고, 손님을 앉히고 머리를 정돈해주고, 현상된 사진을 봉투에 넣어주는 일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머니가 만진 사진은 자주 망가졌다고 했다. 인화된 얼굴이 흐려지거나, 눈이 한쪽만 새까맣게 나오거나, 다른 사람 얼굴이 겹쳐 보이는 일이 있었다고.
처음엔 기술 문제라고 했다. 사진관 주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할머니를 꺼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진관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 속 아이 하나가 사라졌다.
사진 속에서만.
실제 아이는 멀쩡히 집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족들은 며칠 뒤부터 그 아이 얼굴을 잘 떠올리지 못했다고 했다. 이름은 기억하는데 얼굴만 흐려졌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는데도, 뒤돌아서면 방금 본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고.
그 뒤로 사진관은 문을 닫았다.
할머니는 결혼하고 나서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 게 아니라 못 찍게 했다고 한다. 가족사진도, 돌사진도, 졸업사진도. 누군가 몰래 찍으면 사진 속 할머니 얼굴만 찢어지거나 검게 번졌다.
“그럼 이 사진은?”
“결혼 전에 찍은 거겠지.”
“왜 찢었어?”
어머니는 나를 똑바로 보지 않았다.
“찢어야 덜 남는다고 했대.”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사진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붙잡혔다. 이상한 이야기일수록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사진을 꺼내 방에 숨겼다. 어머니 몰래 가져온 건 아니었다. 신문지 사이에 끼워둔 것을 그냥 내 책 사이에 넣었을 뿐이다.
며칠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내 기억 쪽이었다.
나는 점점 어머니 얼굴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려 하면, 눈매가 생각나지 않았다. 코는 기억나는데 입술이 흐려졌다. 목소리는 또렷한데 표정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보면 안심이 됐지만, 방에 들어와 문을 닫는 순간 다시 얼굴이 사라졌다.
대신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은 점점 선명해졌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젊은 할머니의 왼쪽 눈, 입술, 턱선, 머리카락의 굴곡까지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심지어 눈을 감으면 사진 속 찢어진 선까지 기억났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요즘 나를 이상하게 보네.”
나는 아니라고 했다.
“내 얼굴 기억나?”
농담처럼 묻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 짧은 침묵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날 밤, 사진이 사라졌다.
내가 숨겨둔 책 사이에도 없었고, 서랍에도 없었다. 책상 밑, 침대 아래, 옷장 속까지 뒤졌지만 없었다. 이상하게도 안도감보다 불안감이 컸다. 사진이 없어졌는데도, 사진 속 얼굴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새벽에 물을 마시러 나가다가 거실에서 어머니를 봤다.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불도 켜지 않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빛만 받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사진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사진을 보고 있지 않았다. 손에 가위를 들고 있었다.
“엄마.”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식탁 가까이 다가갔다. 사진은 다시 여러 조각으로 찢겨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보다 조각이 더 많았다. 어머니는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고 있었다. 찢는 것이 아니라 붙이고 있었다.
“왜 붙여?”
어머니가 말했다.
“얼굴을 봐야 기억하지.”
그 말투가 어머니 같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점이 맞지 않았다. 분명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얼굴 가운데가 조금씩 흐려졌다. 눈이 어디 있는지, 입이 어떤 모양인지, 방금 전까지 알던 사람이 낯선 종이처럼 보였다.
식탁 위 사진 속 여자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찢어진 오른쪽 눈 자리도, 예전처럼 검게 비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다른 조각이 들어가 있었다. 처음 보는 눈이었다. 젊은 여자의 눈도 아니고, 늙은 여자의 눈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눈 같았다.
나는 뒷걸음질쳤다.
그때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어머니라고 생각한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아직 어머니의 것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사진 속 여자와 같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멈춘 듯한 입술. 나를 보지만 나를 지나쳐보는 눈.
“너는 기억하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얼굴.”
그 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이 됐을 때 식탁 위에는 사진 조각도, 가위도 없었다. 어머니는 평소처럼 부엌에서 밥을 차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가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런데 나는 그 얼굴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낯선 여자가 내 앞에서 어머니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먹어.”
나는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며칠 뒤, 이사 상자 하나가 다시 발견됐다. 이번에는 내 방 옷장 위였다. 분명 전에 없던 상자였다. 안에는 낡은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친척들, 가족들, 내가 어릴 때 찍은 사진들.
그리고 맨 아래에 흑백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젊은 여자의 얼굴은 이제 거의 온전했다. 찢어진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빈칸은 모두 채워져 있었다.
왼쪽 눈은 사진 속 할머니의 것이었다.
오른쪽 눈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입술은 나와 닮아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얼굴이 조금씩 낯설다. 어제는 오른쪽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깊어 보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휴대폰 앨범에서 이상한 사진을 발견했다.
내가 찍은 기억이 없는 사진이었다. 어두운 방 안, 책상 위에 흑백 사진이 놓여 있고, 그 사진 옆에 누군가 손글씨로 적어둔 메모가 보였다.
이제 기억해줘.
사진 속 여자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이상하게도, 그 얼굴만은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