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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할매의 속삭임

[소설]"수고하십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야간 순찰 2팀입니다."

작성자파두|작성시간26.08.21|조회수1,075 목록 댓글 8

 

출처 : https://m.dcinside.com/board/napolitan/49091

"수고하십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야간 순찰 2팀 박현태 주임입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다소 상기된 듯한 목소리로 따지듯 말했다.

"예, 구로구청 야간 민원팀 김 과장인데요. 방금 신도림역 2번 출구 쪽 공원에서 탈주 건 처리했거든요. 흰색이라 자발적 귀속으로 넘겼는데, 사육장 쪽으로 회수 요청 넣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요새 부쩍 자주 나오는 거 같은데 신경 좀 써줘요."

박 주임은 그 전화를 받자마자 한숨을 푹 쉬며 현황판을 올려다봤다.

오늘 하루 재수 옴이라도 붙었는지, 오늘만 벌써 세 번째였다.

"네, 접수하겠습니다. 일련번호 확인 부탁드립니다."

"SDR-2번출구-공원, 14번 기둥이고요."

박 주임은 수화기로 들려오는 내용들을 키보드로 그대로 받아 적었다.

[SDR-공원-14] 상태: 탈주 / 포만 / 귀소 요망

포만 상태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림동 때처럼 굶주린 채로 탈주했다가 사고라도 치면 뒷수습이 배로 늘어난다.

"......알겠습니다. 오늘 새벽 안으로 회수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박 주임은 옆자리 최태현 대리를 돌아봤다.

"최 대리님, 신도림 공원 쪽에 14번 나왔어요."

"아, 네."

최 대리는 박 주임의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조용히 방호복을 주워 입고 지퍼를 올렸다.

올해로 공단 근무 11년 차인 최 대리는 박 주임이 본 사람 중에 가장 무표정한 사람이었다.

"14번이면 그 맨날 탈주하는 애 맞죠? 사육장 A구역 12번 슬롯일텐데, 제가 볼 땐 거기 지반 약해서 자꾸 빠져나오는 거예요.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토목팀이 고치려나."

"......회수 장비 챙겨야죠?"

"포만 상태라고 하니깐요. 그냥 손전등이랑 유인 키트만 챙기면 될 것 같아요. 배부른 애들은 또 순순히 따라오잖아요."

박 주임은 공단에서 근무 한 지 6개월 차였다.

처음 그가 공단에 배치받았을 때, 담당 업무로 배정받은 업무는 '가로 및 도로 시설물 유지관리' 였다.

박 주임은 처음엔 그저 순찰차 타고 끊어진 가로등이나 갈아 끼우러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입사 첫날, 최 대리에게 처음 사육장을 안내받았을 때 그야말로 멘탈이 나갈 뻔했다.

사육장이라는 곳의 깊이 12미터 지하에 가로등들이 슬롯에 꽂혀 줄지어 서 있었다.

낮에는 얌전히 잠들어 있다가, 격일로 지상에 올라와 배치된 구역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다 공복 상태가 길어지거나 슬롯의 지반이 흔들리면 가끔씩 제멋대로 탈주하곤 한다.

"이게 다 뭐예요?"

당시 박 주임이 아연실색을 하면서 물었을 때, 최 대리는 짧게 답했다.

"가로등이요."

"가, 가로등이 왜 움직여요?"

"......원래 움직여요."

그게 설명의 전부였다.

그들이 신도림 공원에 도착했을 때, 14번은 이미 원래 자리 근처에서 느릿느릿 배회하고 있었다.

포만 상태의 가로등은 확실히 달랐다.
불빛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이동 속도도 느릿느릿했다.

아까 누군가를 빛으로 감싸준 모양인지, 기둥 표면이 약간 따뜻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SDR-14번, 귀사 조치합니다."

최 대리가 유인 키트에서 전력 유도봉을 꺼냈다.

유도봉에서 주황빛 신호가 일정한 박자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종의 귀소 신호였다.

그러자 14번이 불빛을 한 번 깜빡이더니 천천히 유도봉 쪽으로 다가왔다.

박 주임은 처음 몇 달 동안 이 장면이 제일 무서웠다.

4미터짜리 쇠 기둥이 땅을 박차고 뛰어오는 게,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14번, 얌전하네요."

"배부르니까요. 배고플 때 만나면 발이 꽤 빨라요."

최 대리는 그렇게 말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기록지를 꺼내 하나씩 체크하기 시작했다.

[SDR-14 / 탈주 3회 / 포만 귀소 / 민간 접촉 1건 / 자발적 귀속 처리]

"민간 접촉 1건이면, 구청 야간팀에 공문 넣어야 하나요?"

"아뇨, 자발적 귀속은 그냥 내부 기록으로만 남겨요. 다친 사람도 없고, 민원인도 기억 못 할 테니까."

"기억을... 못 해요?"

"흰색 빛은 정면으로 받으면 몽롱해집니다. 따뜻하고, 밝고, 기분 좋다는 느낌만 남고, 나머지는 흐릿해지거든요. 그래서 흰색인 애들은 배부를 때만 사람한테 접근하는 거고요. 뭐...얘들 나름대로의 예의라는 거겠죠."

박 주임은 한동안 지그시 14번을 바라봤다.

14번은 유도봉을 순순히 따라 걸어오면서, 가끔 불빛을 부드럽게 깜빡였다.

그 모습이 얼핏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최 대리님."

"네."

"이 친구들, 원래 어디서 온 거예요? 어떻게 가로등 모양이 된 거예요?"

최 대리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유도봉을 흔들며 14번을 차로 유도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매뉴얼에 없는 거 물어보지 마요."

그 말을 들은 박 주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며 다물었다.

순찰차 트레일러에 14번이 탑승하자 불빛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집에 돌아가는 게 반가운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박 주임은 창밖을 바라봤다.
새벽 서울의 가로등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차가 지나치자 불빛을 한 번씩 깜빡였다.

그것이 인사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 고장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박 주임은 이제 그런 걸 굳이 구분하려 들지 않기로 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난 그는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입사 첫날 적어 놓은 메모가 아직 남아 있었다.

'가로 및 도로 시설물 유지관리'

박 주임은 그 밑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가로등의 유래 및 습성 파악.'

라디오에서 새벽 4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렸다.

최 대리는 억지로 하품을 참으며 핸들을 잡았다.

사육장까지는 아직 20분이 남았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야간순찰 일지 / 2024.XX.XX

탈주 회수: 3건 / 민간 접촉: 1건 / 부상자: 0명

특이사항: SDR-14 지반 보강 재요청 (3차).
토목팀 회신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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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으아아아아악벌써 | 작성시간 26.08.21 재밌다!! 도시괴담류 넘 좋아
  • 작성자모델 | 작성시간 26.08.22 연재해라!!!!
  • 작성자김봉칠 | 작성시간 26.08.22 존잼이다
  • 작성자뾰족순이 | 작성시간 26.08.23 가로등 귀여운 것 같은데...
  • 작성자다시만난세개 | 작성시간 26.08.24 귀여운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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