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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할매의 속삭임

[사람]명성황후 살해사건!!(스압주의 / 빡침주의) ->2. 조선측 가담자 및 내용

작성자예천화|작성시간14.04.05|조회수1,730 목록 댓글 7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http://cafe.daum.net/boeun0673/LRED/913?q=%B8%ED%BC%BA%BF%D5%C8%C4%20%BD%C3%C7%D8&re=1

 

 

명성황후 살해 사건 조선측 가담자.

 

살인자 . 

 

우범선[禹範善] , 1857~1903

 

'씨없는 수박'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을미사변' 후 일본 망명시절 우범선 일가의 모습.

가운데 어린이는 나중에 육종학자로 이름을 날린 우장춘 박사이며,

오른쪽은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 사카이 나카

 

치욕스런 사건에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의 한 명

한말의 개화파 무인으로서 일찍부터 친일 근대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1895년에 우범선은 휘하의 장병을 이끌고 명성왕후의 살해(을미사변)에 참여했다.

훈련대 제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이고 명성황후의 시신 ‘처리’도 그가 맡았다.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者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명성황후의 시신은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3년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고영근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고영근은 대한제국으로부터 포상되었다.

 

댓글에 올라온 주소인데 가보니까 우범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되어있고,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내용이 좀 많길래 추가 포스트 해놨어~

더 자세히 보고싶은 여시들은 클릭해서 보기를!!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merta22&logNo=10161716264

 

 

살인자 .

 

조중응[趙重應, 법부대신]

 

명성황후 시해 가담. 고종 퇴위 강요.

1909 친일지 <법정신문> 발간. 자작.

1910-19 중추원고문,

1916 대정친목회 및 한성부민회 회장 일훈 1등 대욱장

 

 

살인자 .

 

이주회 [李周會]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후에 체포된 뒤 대역죄인으로 1985년 12월 19일 처형당하였다.

 

 

살인자 .

 

이두황 [李斗璜] , 1858 서울 ~ 1916.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등 반일적 정책을 취하는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패와 군을 동원하여 학살한 을미사변에 훈련대를 이끌고 광화문의 경비를 맡았다.

 

그 후 아관파천이 일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으로 피신해 일본 정부의 비호하에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

친일파를 심으려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가 되고

전라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국권피탈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서위와 거액의 상여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살인자 .

 

이진호[李軫鎬] 창씨개명 : 李家軫鎬 , 1867~1943

 

이들 중에는 미국 하버드대 출신도 있었고,

훗날 일본 정부의 각료나 중의원 등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을미사변이 ‘무지한 폭력배’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 침략’이라는 커다란 밑그림 위에서 치밀하게 계획됐고,

극우 지식인들에 의해 실행된 작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을미사변으로 재판에 회부됐던 일본인들은 모두 56명이었고,

 이중에서 ‘민간 낭인’으로 분류된 자는 모두 32명.

특히 규슈 지방의 사족(士族) 출신이 많았다.

 

메이지유신 이래 정치적으로 소외돼 불평불만을 지닌 사람들이

 조선과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정치활동을 하려 했던

이른바 ‘대륙 낭인’의 전형적인 사례인 것으로 분석된다.

 

 

 

건청궁 터의 동편에는 을미사변의 기록화를 전시하고 있는 작은 건물과

그 옆에는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가 서 있다.

 


 

 

 

명성황후탄강구리 비

 

이곳이 바로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일본 공사직원,

 일본군, 일본 거류민 등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잔인하게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현장인 것이다.

당시 경복궁에 들이닥친 일본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을 찾아내어 살해하고 고종과 세자(순종)을 총칼로 위협하며 폭행을 가했다.

살해된 명성황후의 시신은 다시 일본인들에 의해 녹산으로 옮겨져 불태워졌으며,

불타고 남은 시신의 잔해는 향원정 일대에 뿌려졌다고 한다.

 

이는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세력의 확장에 제동을 걸던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한 일본의 계획된 범죄행위였다.

더구나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당일 흥선대원군을 강압적으로 앞세워

경복궁에 머물게 함으로써 명성황후 살해사건을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갈등관계로

은폐, 왜곡하려 했으나 당시 을미사변을 목격한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등에 의해

이 사건의 전말이 폭로되어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한문을 나서는 운구




장례식 사진

 

 

- 이글을 솔직히 포스팅 할까 말까 엄청 망설였어...

우리나라 국모가 일본의 침략자에 의해 폭행, 강간 살인당한건 굉장히 화나는 일이니까!!

근데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을미사변에 대해 모르고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안배우는 사람 없잖아~

그래서 이왕이면 교과서에서 배우는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라 더 자세히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 계속 일제강점기에 대해 포스팅을 해 봤어!!

나도 이 글을 안읽고 포스팅 하는게 아니라 다 읽어보고 심하다 싶거나 내용이 문맥에 안어울린다 싶으면

걍 그대로 퍼왔다가 싹 지우고 다시 내가 적당한 수위의 글로 조정해서 올리는거라 글이 지워졌다 올라왔다를

반복해서 여시들도 좀 힘들었을꺼라 생각하고 그점은 미안해..사과할게...

 

진짜 이 글 읽으면서 화도 나고 같은 조선인이 그랬다는거에 와서는 진짜 분통도 터졌는데

여시들도 그럴꺼 같아서 일단 위에 주의문구 써놨어....

 

진짜 열받고 보기 힘든 여시들은 뒤로가기를 살포시 눌러주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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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춤추고 토끼는 약을올린 여우는 | 작성시간 14.04.05 저런쓰레기와 내가 같은나라 사람이라는게
    이렇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울줄이야.......
    저 후손들까지 얼굴들지못하게 해야해
  • 작성자껄껄아저씨 | 작성시간 14.04.05 여시야 잘읽었어 이렇게 깊게까진 몰랐었는데 많이 배웠어!! 같은 국민이었다는 게 너무 열받고 화난다진짜..
  • 작성자쏭효 | 작성시간 14.04.06 여시야잘읽었어 와..열받아....
  • 작성자Thomas William Hiddleston | 작성시간 14.04.06 씌벌 욕해도 분이안풀린다 지옥에갔길 ㅡ.ㅡ 친일파놈들
  • 작성자그륨 | 작성시간 15.03.03 에라이 ㅡㅡ 몹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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