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http://blog.daum.net/soongmac/6896911
매
너
엔
터
요즘 청해진 해운의 전신인 세모그룹의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한다..
솔직히 나도 오대양 사건에 대해 깊게 알지는 못하고 티비에 나오기에
어른들께 여쭤봐서 들은 정도만 아는데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랑 내가 스크랩하기 전
읽어본 내용이랑 달라서 난 멘붕상태임..ㅠㅠ
참고로 사진을 주의하고 보라고 이야기 하겠음!!!
(내가 너무 내용이 길어서 간략하게 서술하거나 더보기로 첨부한 내용도 있음!!)
▲ 오대양사건.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북2리 오대양 용인공장 내
구내식당 천장 위에서 오대양주식회사 대표 박○○ 외 31명이 집단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숨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오대양 공장종업원과 회사직원들이었고,
사장인 박○○와 그녀의 자녀(2남 1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체들은 잠옷이나 티셔츠에 팬티 차림과 같은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이불을 찢은 천이나 옷가지 등으로 손발이 묶여 있었으며,
사체의 일부는 천이나 옷가지로 발목이 서로 묶여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집단사체에 대해 동반자살이냐
아니면 누군가에 의한 조직적인 타살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경찰과 검찰은 3차례의 수사결과로 ‘자의에 의한 집단자/타살’로 결론을 내렸다.
오대양 대표 박○○는 자신을 추종하는 신자들을 동원하여
대전 시내 일원에서 거액의 사채를 끌어 모았다.
박씨는 사채를 모집하기 위한 방편으로
1984년 주식회사 오대양과 공영정밀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학사/육아원/양로원 등의 시설을 마련하여 자신을 재력 있는 사회사업가로 가장하였다.
오대양을 설립한 이래 직원들을 통하여 무제한으로 사채를 끌어들인 결과
1987년 8월경에 이르러서는 총 108억 원 상당의 채무가 누적되었다.
박씨는 원금은 갚지 않고 이자만 지불하고 있다가 돈을 받으러 온
이 모씨 등을 김○○ 등으로 하여금 무차별 집단구타하게 하여
중상을 입히고 행방을 감춘 상태였다.
구타당한 이모씨 등의 진정에 따라 경찰은 폭행에 가담한
문○○ 등 11명의 오대양 간부들을 전격 구속하였다.
28일 행방불명된 박○○와 오대양 사원들이 용인작업장에 숨어있다는 제보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부녀자 사원과 어린아이 49명을 발견하고
이들을 가족에게 인계하거나 대전시립아동보호소로 보냈다.
그러나 박○○의 행방을 찾지 못하던 중 오대양공장 여공원이
숙소 천장이 내려앉아 있음을 이상히 여겨 박○○의 남편에게 알려
그 일행이 올라가 본 즉 32명의 사체가 상기한 바와 같은 형태로 엉키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교주 박○○가 무리하게 교세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집단자살극으로 추정․인정하였다.
그러나 타살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이 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 현장검증모습.
시기
1987년 8월 29일 집단변사체 발견, 1991년 7월 10일 김○○ 외 5명 자수로 검찰이 재수사.
관련인물과 사건전개
1) 관련인물
박○○(주식회사 오대양 사장 겸 교주), 노○○(오대양 총무과장),
김○○(오대양 사원, 노○○ 외 2명 피살 주범) 등.
2) 사건전개
위와 같은 경찰의 수사결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로 알려진 오대양 총무과장 노○○의 행방이 묘연하여 억측이 난무했다.
그런데 사건 발생 3년 10개월만인 1991년 7월 10일 김○○ 외 5명의 사람들이
노○○ 총무과장 외 2명을 살해/암매장했다며 ‘양심의 가책’을 동기로 내세우면서
경찰에 자수를 해와 오대양집단변사사건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의혹이 제기되었다.
대전지검은 김○○ 등의 자수동기를 비롯한 오대양집단변사사건의
진상 및 그와 관련된 모든 사실의 진상을 명백히 하고자 이 사건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제기된 것은 김○○ 등의 상해치사, 사체 암매장 자수사건, 오대양 집단변사사건,
오대양 사채의 규모와 행방 및 그 외 각종 의혹 사항이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원점에서 재수사한다는 자세로 150여명을 불러 수사에 임하였다.
검찰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그동안 의혹으로 제기되었던 사항에 대해
추정은 하지만 수사상 명확한 증거가 포착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의 핵심인 집단 변사부분에 대해서는 경찰의 수사결과와 거의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며,
권력실세나 5공유착 의혹과 관련해서도 특별한 범법사실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본 사건의 특이성
검찰의 종합수사결과에 따르면 이 사건의 특이성
① 광범위한 범행지역과 장기간에 걸쳐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
② 주요관련자들의 사망, 종교적 광신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진상이 명확하게 안드러남
③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관련증거를 사전 인멸, 장기간의 범행으로 증거가 멸시됨
오대양 사장 박신자.그녀는 누구인가?
① 그녀는 당시 48세로 많은 사채를 끌어들여 공장을 설립하고 종말론으로 신도들을 현혹했다.
② '세상이 말세가 되었는데 오대양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전 세계 오대양은 내가 주관 한다'
'오대양을 떠나면 죽음의 재앙을 받는다.'라고 설파함
③ 신도들이 자신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게 만들었음
④ 집단 합숙을 하게하고, 배신자에게 가혹한 린치를 가하는 등 강력한 카리스마로 신도들 위에 군림함
⑤ 많은 사채를 끌어들이고 채권자들에게 빛을 갚지 않아 물의를 일으키고,
채권자에게 채권포기각서를 받기위해 폭력 감금까지 함
-> 더보기로 추가함!!
이상열의 단순 폭행사건에서 거액 사기사건으로 발전한 것이다.
경찰은 박신자의 행방을 집중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8월28일 한 채권자가 오대양 용인공장에 잠적되었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제보를 했다.
충남 경찰은 오대양 공장을 기습하여 어린이 19명 등 49명을 발견하여
대전으로 데리고 왔으나 천장에 숨어 있던 박신자 등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여기에 있다.
오대양 공장을 기습한 경찰이 천장에 있었던 것으로경찰이 추정한 박신자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박신자를 비롯한 31구의 시체가 외부에서 옮겨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오대양사건을 집단자살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실상 명백한 살인사건이었다.
경찰의 추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 교주인 박신자는 집단 도피가 한계에 이르렀고 자살을 하자고 충동을 한 뒤,
먼저 자살을 하고 나머지 신도들이 뒤따라 자살을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 그 증거로 31구의 시신이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었다는 점!!
But!!이러한 결론도 맞지 않는다.천장에서 발견된 31구의 시신은
대부분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자의로 죽음에 동의했다고 볼 수도 없었다.
참고로 양손이 묶여 있는 시신이 5구, 양손과 양다리가 묶여 있던 시신이 3구,
양다리만 묶여 있던 시신이 여러 구였다.
② 치안본부 감식반은 박신자가 죽은 뒤에 박신자의 두 아들(24세, 22세)이
차례로이들을 살해하고 자신들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보았다.
→ 그들의 목을 맨 상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대들보에 목을 매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대양의 공장장 이강수는 이들의 시체를 천장으로 옮긴 뒤에
자신은 대들보에 목을 맨 것으로 추정
물론 이강수도 31명의 사람들 중 상당한 숫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오대양 사건은 미스터리다.
어쩌면 건국아래 가장 큰 미스터리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31명의 추종자들이 사장, 또는 교주의 지시로 자살, 또는 자살에 동의했다는 것은
한국판 '인민사원'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막대한 자금의 행방,
권력층과의 연계설이 나돌았고두 아들이 박신자를 따라다니고 있었으나
충남도청에서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남편이 무관하다는 경찰의 발표를 국민들은 믿지 않았다.
채권자들의 빛 독촉과 경찰의 추적이 동기라고 볼 수도 있으나 석연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대양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