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제목대로 프리메이슨 이야기는 오늘로서 끝이다. 더 길게 갈 수도 있지만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일단 지나치게 많은 디테일들을 소개함으로서 지면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특히 이런 디테일들 중에는 심하게 공상적인 것들도 많이 있는데, 이 역시 국장의 입장과는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열분들 중에는 국장이 쓴 글들이 황당하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겠지만, 메이슨이나 비밀 결사와 관련된 진짜 음모론들의 수준에 비하면 여기 소개한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틀란티스의 모태인 화성 문명, 고대에 파괴되어 버린 목성과 화성 사이에 존재했다는 제 10의 행성, 사실상 (지금도)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낮은 4차원에서 살아가는 초지능 파충류 종족, '인간이 아닌' 영국 왕실과 부시 가문의 정체 등에 관련된 최신 이론(?)들을 이 '유럽 이야기' 지면을 통해 등장시키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겠냐는 말씀이다.
둘째는, 개인적으로 이런 내용들에 좀 거리를 둬야겠다는 - 특히 글을 쓴다는 부분에서 - 생각 때문이다. 이경운군 사건 1편이 올라 왔을 때 일부 독자들이 이를 프리메이슨과 유사한 느낌의 음모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비록 음모론은 국장이 짬짬이 즐기는 취미 분야로서 좋아하는 테마지만, 그렇다고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국장의 주 테마나 관심사가 이로 인하여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말 나온 김에 이야기하자면 국장의 주 테마는 언제나 인간, 그리고 생명이다. 인간으로서, 지성으로서, 생명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모두를 이롭게 하는 삶을 구가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음모론보다 딱 천만배 더 중요하다. 물론 이런 추상적 선언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여기에 많은 디테일들이 필요하지만 이는 지면을 통해 조금씩 풀려나와 질 것으로 본다.
암튼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지금까지 연재한 프리메이슨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마무리를 지을련다. 좀 섭섭해도 이해하시라...
프리메이슨의 전통적인 복장. 다양한 상징으로 점철된 이 복장은 주요 예식에서 필수적이다.
지금까지의 연재를 통해서 중세 스코틀랜드를 기반으로 한 프리메이슨이 어떻게 유럽에 전파되었고 이어 미국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난 편에서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이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기도 했다. 또한 프리메이슨이 연결되어 있는 고대의 비의, 장미 십자단 등과도 관련되어 있는, 이집트나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전의 지식, 이를 재현시키려 했던 중세의 연금술 등 또한 짚어가 보았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바로 '비의' 로 한번 돌아가 보자. 결국 이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프리메이슨과 그 언저리의 모든 활동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하다. 이토록 중요하고도 비밀스러운 그 무엇이 정말 있다면 그것은 과연 뭘까?
국장은 전편들에서 돌의 키워드, 연금술, 힘과 명분 등의 이야기를 통해 이 비의의 정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접근해 보고자 했다.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형태의 문명과 다른 정신적 배경을 가진 시대에서 비롯
2. 돌과 관련. 그러나 '현자의 돌' 같은 구체적 물질이라기 보다는 돌에 직간접적으로 기록된 고대 문명의 정보일 가능성.
3. 연금술이 추구하던 영생불사, 혹은 재탄생과 관련.
4. 현실에서 막강한 권위와 힘을 가질 수 있는 그 무엇.
5. 분야를 막론한 인재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강력한 흡인력과 명분을 갖춤.
6. 기성 종교를 초월하는 영적 포용력(?)을 가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기초하면 프리메이슨이 소유하고 있을 지 모르는 그 무엇-아마도 물건이라기 보다는 정보일-은 위의 여섯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 정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추리해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국장은 위의 조건들을 바탕으로, 비록 모호하긴 하지만 상당히 치명적인 어떤 것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잘났건 못났건 부자건 가난하건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것,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적인 키워드로 작용하는 것,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대부분의 인간이 평생 모은 전재산과 자기 신념마저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것, 수백년, 혹은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가면서도 포기되거나 잊혀지지 않은 채 대를 이어 전승되고, 그럴 가치와 중요성을 가진 것...
그렇다. 국장이 떠올린 이런 '정보'는 단 하나. 바로 죽음의 비밀 이었다.
* * *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이 가져오는 극단적인 아이러니는 참으로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다. 우리는 살아있고, 그로 인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보고 우주를 인식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후회하는 존재다. 다시 말해 인식의 주체인 각자에게 우주는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모든 것이 종결되어 정지되고 만다는 것은 우주의 난데없는 소멸 만큼이나 개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근세 이후 분석적 방법론을 중시하는 과학 및 의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몸, 생명은 이제 일종의 기계로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런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죽음 = 소멸이라는 등식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지금도 많은 종교가 여전히 존재하고 사후 세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가르침을 펴고 있지만, 지난 몇백년 동안 우리 인류 문명의 대세가 이런 생각과 믿음을 제거하는 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 영향력 또한 지구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의미를 알 수 없던 많은 신비들이 과학과 수학을 통해 단순한 법칙 하에서의 기계적인 자연 현상으로 밝혀졌고, 이어 이런 사고 방식은 인간과 생명 그 자체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뉴튼과 함께 근대 물리학과 수학의 기초를 정립한 라플라스.
그리고 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 시대 전반에 걸쳐 우리 스스로가 과학 아닌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의 진실, 결국은 삶과 생명의 진실이 될 수도 있는 그 비밀을 제대로 파악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물론 중세 유럽 문명을 지배했던 기독교를 위시해 이슬람교, 심지어 동양의 불교 등등 많은 종교에서 주장해온 내세관은 이를 신봉하는 종교인들에게는 '믿음' 이라는 방식으로 어필해 왔고 죽음의 공포와 존재의 덧없음을 위로하는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너의 삶은 기나긴 네 존재의 짧은 과정이자 한 장에 불과하며, 죽음은 끝이 아니다' 라는 대부분 종교들의 공통된 가르침을 정말로 눈꼽만큼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 죽음을 학교의 한 과정을 마치는 것처럼 맘 편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독실한 종교인 중에도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이유는 죽음이라는 것은 '말과 글에 대한 믿음' 만으로 초월하기에 그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종교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즉시 죽음과 삶의 진실을, 경전으로 읽거나 사제에게서 전해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직접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면 이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기존의 종교들은 이런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내가 직접 사후 세계를 방문하여 내 눈으로 이를 보고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생과 사의 프로세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그 모든 가르침들은 결국 모호한 신념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념은 중세처럼 사회 전체가 하나의 종교에 대한 철저한 옹호로 뭉쳐져 있지 않은 경우에는 단지 개인의 선택일 뿐인 것이고, 이런 선택에 나를 모두 맡겨 버리기에는 인간은 턱없이 약한 존재인 것이다.
한편 검증되지 않는 것/객관적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는 고대 미신적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근대 과학의 기본 정신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처럼 영혼을, 신을, 사후 세계를 내 눈앞에 보여달라는 근대인의 요구에 답을 줄 수 없었던, 그리하여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객관적인 답 또한 제공할 수 없었던 종교는 과학의 유물론적 관점에 그 자리를 빼앗겨 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종교적, 영적 성향이 일반 종교들에 못지 않게 강한 프리메이슨 만큼은 반대로 이런 근대와 함께 끝없이 뻗어나갔다는 사실이다.
* * *
사후 세계와 영혼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기독교적인 가치에 경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이에 대한 관점은 기독교나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종교들이 창시되기 훨씬 이전부터 매우 정교한 형태로, 어쩌면 더 정교한 형태로 존재했었다.
사실 대부분의 고대인들에게 사후 세계와 영혼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었다. 거대한 문명권에서부터 북아메리카나 중앙아프리카의 부족민들에게 이르기까지 죽음을 존재의 '끝'으로 보는 시각은 전혀 없다시피 했었고, 죽음은 현세에서의 이별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시각이 우리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던 대표적인 거대 문명권은, 바로 프리메이슨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한 고대 이집트다. 이집트인들의 저승에 대한 시각과 지식은 이승을 설명하는 것보다도 더 세밀하다. '사자의 서'(죽은 자의 책)를 통해 이들은 인간이 죽고 난 후 영혼이 겪게 되는 그 모든 과정들을 마치 여행 책자처럼 자세하고도 세부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여기에는 자기가 눈으로 보면서 직접 그 길을 밟고 간 것이 아니라면 쓰여지기 어려운 듯한 디테일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들은 수천 년에 걸친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이런 관점을 계속 흔들림 없이 견지했다.
물론 현대에 있어서 이는 단지 오랜 상상의 중첩이 빚어낸 일종의 신화로 해석될 뿐이다. 하긴 그 오래 전 아무것도 모르던 무지한 원시인들이 죽음이 무서워 자기들 맘대로 끄적거려 놓은 망상들이 현대에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나 싶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고대 이집트인에게서 죽음은 말 그대로 '진실의 순간' 이었다. 따라서 사자의 서는 죽은 사람의 삶과 지위에 맞춰 무덤에 길잡이용 책으로 부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은 BC 1200 년경의 사자의 서. 브리티쉬 뮤지엄 소장.
생각해보자. 우리는 인간이 과거에 비해 '머리가 좋아졌다' 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당연하다. 돌도끼를 사용하던 인간이 컴퓨터를 쓰고, 말을 타던 우리가 이제 달에 간다. 이 모든 현대의 성과가 두뇌 활동에 절대적으로 영향 받은 것이 분명할진대, 우리 자신들도 그만큼 똑똑해졌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똑똑해 진 것은 우리들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인간 집단, 즉 문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컴퓨터를 쓰고 달에 가는 것은 그런 과학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계기와 함께, 그런 노력들이 중첩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더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때문이다. 전임자가 해놓은 일을 조금씩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과학은 진보해 온 것이지, 과거에 비해 빨리 돌아가게 된 개개인의 머리로서 그 성과를 이뤄 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흔히 IQ 같은 방식으로 측정하는 개별 인간의 지능은 지금이나 수만년 전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식을 1만년 전에 갖다 놓으면 나머지 애들과 아무 차이도 없는 원시 소년으로 크고, 1만년 전의 어린애를 여기에 갖다 놓으면 역시나 부족함 없는 21세기 소년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래 전의 인간들이 일구었던 문명들을 단지 지금 우리 것과 다르다는 이유, 옛날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쉽사리 무시할 수는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자랑하는 찬란한 과학 문명의 역사가 겨우 삼백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과거의 어느 시점에, 나름의 계기로 인해 또 다른 방향으로 중첩된 지식을 통해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경지를 이루었던 문명이 있었을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천재지변이나 기타 이유들로 그 문명이나 그들이 쌓은 지식들이 계속 중첩, 유지해 나갈 수 없었을 가능성도 언제나 존재한다.
이런 예는 굳이 너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의 역사 시대에 포함되는 고대 그리스와 중세만을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2200년 전 사람인 그리스의 에라토스테네스는 그림자와 방위각의 측정을 통해 지구의 둘레를 실제에 상당히 가까운 4만6250 킬로미터로 측정해 냈다. 그러나 1700년 후인 15세기에 콜롬부스가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는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기는커녕,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만도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다. 이처럼 자연과학에 관한 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중세인들 보다 훨씬 '진보된' 존재였다. 2천 년에 가까운 시간의 흐름이 과학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퇴보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지식과 기술은 실제로 잊혀지고, 그것이 재발견 될 때까지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조차 없다. 만약 이집트인들이, 혹은 이집트의 모체가 된 더 오래된 어떤 문명이 있었다면 그들이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들은 아마 달에 가지는 못했겠지만, 그와는 다른 방향의 학문들을 발전시켰을 지도 모른다. 소위 영적인 탐구에 보다 전념했을 수도 있고, 그런 세월이 수천 년 이상 쌓이면서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부족 등에게 남아 있는 수법들, 이승과 저승,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들은 우리가 달의 신비를 벗겨 냈듯이 죽음의 신비를 벗겨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비의의 정체가 아닐까.
* * *
앞서 말했듯이 프리메이슨은 기성 종교들이 그 권위를 급속도로 상실해 가는 근대와 현대를 통해 커 갔다. 그들이 고대 이집트와 그보다 오래된 세계에 남아 비밀스럽게 전수되어 오던 지식, 일반인들이 공유하기에는 너무 크고도 오묘한 이 죽음과 삶의 비밀, 혹은 그렇다고 스스로 믿는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고 생각해 보자.
오래된 종교들의 모호함과 전근대성에 진력 내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이는 아주 큰 지적인 유혹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삶의 가장 심각하고도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이기조차 하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는 경전이나 교리 등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프리메이슨 특유의 의식(ritual)을 통해 대상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주술적인 것이든, 일종의 최면이나 심지어는 마약을 사용한 것이든 간에 메이슨에 입문하여 일정한 위계에 도달한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직접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 아닐까.
예를 들면, 이들은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을 육체와 분리시켜 소위 저승이라는 세계를 직접 체험하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정말로 영혼이 육신을 떠나 일시적인 여행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매우 정교하게 유도된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는 국장이 말할 수 있는 차원은 아니다. 그러나 설사 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직접 오감을 통해 체험한 것은 책으로 읽은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객관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 스스로가 죽음의 세계를 직접 방문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것이 주는 신념과 확신의 무게는 경전이나 사제의 말을 통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현실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수단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소위 접신이나 종교적 은사, 혹은 유체이탈 따위의 심령적 능력에 의해 메이슨 외부에서도 실현되고 있을 수 있다. 다만 메이슨은 이를 조직적이고 집단적이면서도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서포트하며,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진 것으로 알려진 능력을 어떤 기술적인 방법에 의해 메이슨 내에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암튼 그 결과 이를 통해 메이슨은 다른 종교들이 갖지 못한 무기를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근대와 현대를 통틀어 내노라 할 유력자들을 끊임없이 조직에 가입시킬 수 있었고, 또한 일반 종교들을 아예 포괄해 버릴 정도의 배포를 가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떤 종교를 믿던 간에 '초월자'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가입할 수 있는 메이슨의 수칙은 그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은 더욱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메이슨이 비의의 모든 것을 100퍼센트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이들 역시 성당기사단을 필두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비의의 내용에 파편적으로 접근한 것일 뿐, 그 진정한 핵심에는 여지껏 도달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중세의 연금술은 아마도 메이슨과 그 언저리에서 고대의 비의에 더욱 가깝게 근접하기 위한 실험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연금술을 통해 그들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살아가는 통합체로서의 인간을 추구함으로써, 보다 '고차원적' 인 생물로 진화하고자 하는 메이슨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었을까. 이집트는 물론 거의 모든 문명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신적인 존재들의 모습은, 사실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죽음과 삶의 비밀을 알고 이를 다루며 살았던 초월적 존재로서 고대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비의란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 한계, 다시 말해 삶의 덧없음과 죽음의 공포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이 그 진정한 권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말고 과연 무엇이 비의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을 것인가. 돈, 권력, 명예, 지위 같은 세속의 덧없는 가치들이 감히 수천 년 이상을 간직해 온 인류 역사상 최대 비밀이자 최고 지혜의 자리를 넘볼 수 있을 것인가.
...자. 추측은 여기까지고 국장이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여기까지다.
이게 모두 사실일까? 아무도 모른다.
물론 프리메이슨의 역사 및 활동의 상당 부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비의를 갖고 있는지, 그 비의가 무엇인지, 목적하는 바가 뭔지 등등은 오직 추리만이 가능할 뿐, 의심의 여지 없는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 혹은 33도 고위 프리메이슨 본인들 외에는- 없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도 답을 모른다. 따라서 그 가능성은 사방으로 열려 있고 우리는 각종 정황과 간접적인 증거들을 통해 상상과 추리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논리적으로 상당히 그럴듯한 경우에는 진지한 무게를 갖게 되고, 결국 우리는 우리가 은연중에 보고 싶어하던 세상의 모양을 이를 통해 한껏 그려낼 수 있게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세상이 단지 매일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모습 그대로만이지는 않기를 바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생존과 생활을 위해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 따분하기 그지 없는 주변의 모든 것들, 무미건조한 게임의 법칙들에 의해 지배받는 차가운 세계... 신비한 것들은 이제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여전히 반지의 제왕에 심취하고 해리 포터에 울고 웃는다. 미들 어쓰(한국 책에서는 '중간계' 로 번역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어색한 듯)에 살았다는 엘프와 호비트, 무시시무시한 사우론과 절대 반지, 영국 어딘가에 있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 킹스 크로스 역의 9와 3/4 승강장... 이 모든 것을 실제로 보고 싶어한다.
프리메이슨과 이와 유사한 집단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것을 책이나 스크린이 아닌 현실에 보다 진지한 어조로 대입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의라는 것도 결국 절대반지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이를 손에 넣기 위한 수백, 수천 년에 걸친 투쟁과 끝없는 암투, 소수가 거머쥐고 있는 지식과 비밀, 세상을 뒤흔들지 모를 결과... 모든 면에서 그렇다. 다만 이 경우는 소설과 달리 그 절대반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된다. 그리고 미들 어쓰에 살던 대부분의 일반 주민들이 절대반지의 힘은커녕 그 존재 자체를 아예 알지조차 못했듯이, 우리 역시 진실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래서 이런 주제에 대한 우리의 모든 논의들은 결국 어떤 경우에든 '음모론' 이 되고 만다. 그리고 엄청난 비의와 우주적 음모는 고사하고 어설픈 작당이라도 과연 존재하는지, 그것이 나쁜 방향인지 아니면 건설적인 방향인지 조차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따라서 국장이 이 글들을 통해 이야기한 것이 어디까지 진실에 가까운지는 오직 시간만이 밝혀 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어쩌면 우리가 죽고 난 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