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모카할리치노
1. 설회의와 심남구(혹은 심남료)
설회의는 무측천하고 만난 경위가 두가지 존재하는데 하나는 무측천이 당태종 사후에 감업사로 끌려가 비구니 생활을 할때 그때
부터 알았다는 소문도 있고 또 하나는 당고조(당태종의 아버지, 무측천에게는 시아버지도 되고 시할아버지도 됨)의 딸인 천금공
주의 시녀와 내통하는 사이였는데 천금공주가 설회의의 용모를 보고 무측천의 환심을 사기위해 소개했다는 일화도 있어.
설회의의 원래 이름은 풍소옥이라고 하는데 무측천이 사람들의 소문을 없애기 위해 딸내미인 태평공주의 사위 설소의 집안 사람
으로 둔갑시키느라 설회의라는 이름을 쓰게 했는데 뭐 어쨌든 감업사에서 만났든 천금공주가 소개시켰든 무측천은 이 설회의를
불러들여서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관계를 가진 후 아주 만족해 했다고 해.
685년 무측천은 명을 내려 백마사라는 절을 짓고 설회의를 주지승으로 앉혔는데 그 후 후궁을 새로 건축한다는 이유를 들어 설회
의를 총책임자로 명해 설회의랑 마음껏 정을 통했(... 뭔진 알지)다고 해.
그러다 설회의는 무측천의 총애를 믿고 엄청나게 방자하게 굴었던데다 무측천에게 다른 젊고 어린 남자들이 생겨 총애가 줄어들
자 설회의는 무측천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해서 설움이 복받쳤는지 자기가 총책임자였던 궁의 건물에 불을 질렀데. 무측천은
설회의가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불을 질렀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이 시키가 자기하고의 관계를 소문내고 다닐까봐 불안했던거야.
결국 설회의는 딸 태평공주를 시켜 설회의를 궁으로 납치해서 죽여버렸지.
요거는 짧게 나오는건데 무측천의 마음을 사로잡은 두번째 남자의 이름은 심남구라고도 나오고 심남료라고도 나와. 무측천의 어
의 였는데 무측천에게 성욕을 돋구는 춘약을 만들어 바쳐가지고 총애를 받았다고도 하고. 여하튼 이 심남구인지 심남료 인지는
무측천의 총애를 받은지 얼마 안되서 병으로 죽음.
2. 장창종과 장역지
둘은 형제야. 뭐 장씨형제라고도 부르고 장역지 형제라고도 부르는데 무측천이 심남료가 죽은 후 우울해 하자 딸인 태평공주가 이
런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잘생기고 밤일도 잘 한다고 소문난 장창종을 추천하고 장창종은 무측천에게 자기 형인 장역지까지
소개하게 됨. 그런데 이번에는 이 형제하고 3섬을 한다 어쩐다 하는 소문들이 퍼진거라. 그런데도 무측천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 장역지 형제들이랑 음란한 행동을 벌이면서 이 형제에게 정사를 맡기기도 했음.
무려 다른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서 장씨형제를 죽이라고 하니까 무측천이 열받아 가지고 '니놈따위가 내 첩들에게 감히!!!' 이래서
그 이후로는 조정에서 장씨형제를 탄핵하지 못했다고 함. 게다가 심지어 무측천의 손자인 팽덕태자까지 할머니랑 장씨형제의 추
문을 거론했다가 죽임을 당함. 결국 장씨형제는 무측천 집권기에는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무측천이 병상에 누운 틈을 탄 신하들의
손에 목이 베어져서 죽었지. 그리고 그해 겨울 무측천 또한 82세로 죽음.
3. 기타
<구당서 : 당나라 역사서>에 이런 부분이 있는데,
77세의 고령이었는데도 이 같은 음란한 생활을 그만두지 못한 무측처는 여전히 젊고 외모가 출중한 남자들을 골라 입궁시켜 자신
의 시중을 들도록 하였다. '미소년들을 골라 좌우에서 시중들게 했는데, 일부는 지위와 재산을 노리는 무리들로 기회를 얻으면 헌
신적으로 무측천을 시중들었다.'
어리고 잘생긴 애들을 무쟈게 좋아했다고 하더라. 항간에는 무측천이 그룹잤잤을 좋아했다는 썰도 있었어.
재...... 재밌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