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살 터울의 규빈이와 영훈이는 아빠의 병이 심각한지 몰랐다.
모여앉으면 우린 종종 암 병동인것도 잊었다.
암의 위력은 대단했다.
내장을 온통 쥐어짜는 고통이 하루에도 수차례
진통제로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 안고 그 고통을 견뎠다.
준호씨가 처음 암 진단을 받은것은, 영훈이 돌도 되기전,
나는 임신중이였다.
가족들은 만류했지만 나는 규빈이를 낳았다.
다시는 남편의 아이를 갖지 못 할 것만 같았다.
의료팀은 통증을 줄여주는 시술을 권유했다.
그것은 죽음이 예정된 환자에게만 쓰는 최후의 치료였다.
우리는 퇴원을 했다.
남편의 선택이였다.
휴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난밤 잠자리에 들자마자 남편은 통증을 호소했고, 구토와 탈진을 반복했다.
통증은 그의 몸 어디가 암에 함락됬다는 통보였다.
어떻게 해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지난 94년 성당에서 만났다.
수녀가 되기위해 준비하던 내게 남편은 삭발까지 하며 구애를 했다.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따뜻하고 기쁜지 내게 그 기쁨을 알려준 사람
그러나 내가 이제 그와 함께 보낼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더 남아있는 것일까...
남편이 다시 병원에 돌아가고 아이들은 부쩍 아빠의 안부를 묻는일이 잦아졌다.
11월말,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그무렵 준호씨는 통증때문에 하루1000mg의 모르핀이 투여되었고,
일체 음식공급이 금지되었다.
무엇을 메모 하려는 것인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도 이상한 모양이였다.
남편은 내 이름조차 쓰지 못했다.
암세포가 간에 전이되어 뇌에도 손상을 입히고 있었다.
통증은 다양한 형태로 준호씨를 공격했다.
점점 희미해 지는 기억
그는 더 늦기전 아이들과 행복했던 시간을 간직하고 싶어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영상편지를 남기기를 원했다.
그는 듣고 있을까? 아이들의 애끓는 작별을
준호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렸다.
그는 아직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생일마다 아이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익을 선물하는건 남편의 기쁨이였다.
며칠전 나는 그 역할을 시동생 종호씨에게 부탁하였다.
나와 아이들은 아직 그가 그립다. 앞으로도 내내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보고싶은 그가 있어서, 그 추억들이 있어서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준호씨를 떠올리면 그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있다.
"안녕 여보, 안녕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