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그 어디든 천국일테니
한센병, 속된 말로 ‘문둥병’이라 불리는 병에 걸린 환자들은 그동안 한센인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 되는’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 이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은 전염력에 대한 잘못된 정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일제시대 때 등장한 ‘한센인 격리정책’이 부정적 인식 형성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일본정부는 ‘전염성’을 빌미로 환자들을 소록도 갱생원에 모아 놓고 노역에 동원시킨 것은 물론 강제로 불임시술을 자행하고 이도 모자라 임산부를 낙태시키는 등의 파렴치한 일들을 벌였다. 불행히도 이 같은 관행은 해방이후에도 지속됐고, 한국정부 역시 한센인을 질병관리의 대상이자 언제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집단으로 분류해왔다.
그렇게해서 설립된 소록도자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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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자혜의원(小鹿島慈惠醫院)의 설립(1916. 2. 24)
일본에 의한 식민지 초기, 조선에는 광주, 부산, 대구 등 세 곳에 각각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 한센병 요양원이 있었으나 규모가 작아 수용인원이 아주 적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다리 밑이나 움막에서 살거나 유랑, 걸식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결정에 따라 원주민들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여만 평에 대해 집과 땅을 강제로 매수하여 이주시킨 후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관제를 공포하여 [소록도자혜의원]을 설립하였다.
원래 자혜의원이란 일반 병원으로 전국에 18개가 있었는데, 19번째로 개설된 소록도 자혜의원은 한센병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병원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원생들의 생활은 굶주림과 강제 노동으로 점차 피폐해지고 있었으나 수호는 다시 3차 확장공사를 시작하였다. 원생들은 이러한 요양소 확장에 동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일 수만장의 벽돌을 구워내야 하는 등 이중 삼중의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원생들의 시련과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노동력도 없는 원생들까지 동원하여 연간 6천㎏의 송진을 채취하고, 1941년도에는 500대의 가마니틀을 구입하여 연간 30만장의 가마니를 생산하였으며, 연간 1,500장의 토끼 가죽과 3만포의 숯을 제조하는 등 전쟁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되었다.
수호원장 동상 건립과 살해(1942. 6. 20)
소록도를 세계 최고의 나요양시설로 만들겠다는 제4대 수호(周防正季) 원장은 원생들을 노예처럼 부리다, 마침내 자신의 동상을 세워 원생들에게 참배까지 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원생들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제 노역으로 인해 병세는 악화되고, 손발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가혹한 매질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거나, 바다로 뛰어 들어 도주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등 병이 낫는다는 희망이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1942년 6월 20일, 원생 이춘상(李春相)은 수호 원장의 동상을 참배하는 정례 보은감사일(報恩感謝日)에 식도를 가슴에 품고 직원, 원생 약 3천여 명과 함께 동상 앞 광장(현 구라탑 자리) 도로에 서 있다가 동상을 향해 올라가는 원장의 앞을 가로막고 "너는 환자에 대하여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라고 소리친 후 원장의 오른쪽 앞가슴을 칼로 찔렀다. 이춘상은 즉시 포박되어 끌려갔으며, 수호 원장은 그 날 오후 대량출혈로 인해 관사에서 죽고 말았다.
(원생 이춘상 사형확정)
월례 정기면회
1950∼60년대, 소록도에서는 섬을 직원지대와 병사지대(病舍地帶)로 나누고 약 2㎞ 정도의 철조망을 쳐 이를 경계선이라 불렀다.
병사지대의 원생에게서 자녀가 태어날 경우에는 전염을 우려하여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보육소]에 격리시키고, 부모와 자녀들에게는 이 경계선 도로 양편에 각각 서서 한 달에 단 한 번만 면회를 허용하였다.
이런 면회 장소를 원생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렀다.
(자신의 아이를 한 달에 한 번 이렇게 바라만 봐야 했음)
원생들의 참사(1945. 8. 21.)
소록도에 조국의 해방 소식이 전해지자 원생들은 병사지대에 있는 신사를 불태우고 교도소의 죄수들과 감금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또한 일본인들이 떠나자 병원 운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의사와 행정 직원간에 세력다툼이 벌어져 섬 전체의 분위기가 아주 어수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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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직원들은 고흥 치안유지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다음 날 원생들과 협상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무장한 직원들과 치안유지대는 협상을 하기 위해 나온 원생 대표들을 결박하여 모두 사살해 버렸다. 또한 각 마을에 있는 원생 간부들을 찾아내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총으로 사살하여 치료본관 앞, 장작을 쌓은 모래사장 구덩이에 송탄유(松炭油)를 붓고 시신 전부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배로 식량을 실러 나갔다 돌아오는 원생 간부들도 바다에까지 나가 사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90명의 각 마을 대표 원생 중 84명이 희생되고 6명만이 간신히 살아 남았다.
[소록도병원 홈페이지]
병원에서는 젊은 여성 한센인을 매달 검진했어. 임신 사실을 들키면 외지로 도망가든지, 낙태를 해야 했어. 병원 측의 서슬이 퍼렜지만 몰래 아이를 가지기로 했어. 나를 버린 가족을 잊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었어. 남편이 단종수술을 받기 사흘 전 동침을 했고 기적처럼 임신이 됐어. 아이와 함께할 미래를 꿈꾸며 행복했어. 검진시기가 오면 숨었고 외출할 땐 배를 꽁꽁 동여매고 다녔지. 그런데 넉 달 뒤 병원에서 눈치를 챈 것 같았어. 육지로 나가 아이를 낳기로 했어.
(한센인 낙태피해 여성 남모씨의 증언)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193661
↓↓ 소록도 한센병 환우들 사진
한센병 환우들은 소록도를 '죽어서라도 나가고 싶은 섬'이라고 표현하셨음.
한센병의 편견을 깬건 1980년대 교황의 소록도 방문.
이후 자원봉사자도 늘고, 정부도 지원을 늘리게 됨.
1940년대 소록도 한센인 환우의 수는 6천명이 넘었다고 함.
현재는 539명만 남아계심.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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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팥덕후 작성시간 16.07.30 헐......나 처음알았어 .. 세상에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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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학교종이땡땡땡ㅇ 작성시간 16.07.30 ㅜㅜㅜ마음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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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인제신남 작성시간 16.07.31 눈물나 ㅠㅠㅠㅠㅠㅠ 와 미쳤다 진짜 인간이 아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인권이 뭐야 퓨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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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헤헤헤헤헤헤헤헤해 작성시간 16.07.31 당신들의 천국 읽고 알게됐는데.. 진짜 잔인하다 오늘 그알에 나왔구나 한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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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HIbiscus 작성시간 16.07.31 한센병 찾아봤었는데 진짜 너무 충격적이더라
나쁜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