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제목을 저따구로 지어놓은 것.
그래. 시아버지가 고기덕후에 당뇨 합병증이면 좀 어때. 같이 삼겹살 구워서 먹으면 되는거지 뭐.
현실은 달랐다.
Zㅏ.... 우리가 아는 문종오퐈는 이래여.
"아이고 아우야... 내가 죽고나면 내새끼(단종) 좀 부탁한다. 콜록콜록."
수양대군이 왜 문종이 죽고나서 단종한테 들고 일어났게.
문종이 저렇게 허약했다면 세조가 왜 처음부터 들고 일어나질 못 했을까.
자기도 형 못지않은 능력자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실제로 문종은 책만 파고들던 서생이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었음.
검술은 물론이요 궁술(활, → 피용! 이거)에도 유능했지.
부왕인 세종도 "네 증조부인 태조께서 환생하신 것 같다."라고 칭찬 할 정도였다고 함.
지속 될 수도 있었음. 문종이 일찍 죽은 이유도 아버지인 세종의 당뇨합병증이 보였다고 함.
아무래도 아버지랑 식성이 좀 비슷했다고 하기 땜시롱.
근데 말이야... 뭐 못 느꼈어?
미.. 미안... 죽이지만 말아줘.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세종-소헌왕후 콤비의 시월드를 살펴봅시다.
우리는 문종의 부인이라고 하면 흔히 '현덕왕후 권씨'를 떠올리게 된다.
단종과 경혜공주의 모후(母后).
세조에게 퉤! 하고 침뱉어서 세조에게 종기를 돋아나게 만든 장본인.
덕분에 무덤이 제대로 파헤쳐진 비운의 왕후.
하지만 현덕왕후 이전에도 문종에게는 세자빈이 두명이나 있었지.
그녀들은 바로 '휘빈 김씨' 와 '순빈 봉씨' 였어.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중록' 의 저자인 혜경궁은 뭐라고 불렀게? 바로 '혜빈 홍씨' 였음.
세자빈은 내명부 가운데 세자궁의 수장이었지만 품계를 초월한 '무품' 이라고 보기가 힘듦.
세자빈 또한 'ㅇ빈' 의 칭호를 받는 정1품의 빈으로 보는게 맞기 때문에 휘빈이나 순빈의 칭호가 떨어지는 거임.
여하튼 우선 휘빈의 이야기를 보고 갑시다.
휘빈 김씨의 본관은 안동. 1427년 네살 어린 왕세자 향(=문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어. 지금으로 따지자면 한예슬이라고 해야하나, 뭐 그렇게 보면 빠를듯.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문종은 휘빈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 휘빈으로써는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입궁을 했는데 정작
지아비인 세자가 자신에게 뜨뜨미지근 하게 굴자 속이 타기 시작했어. 게다가 그 당시 세자가 궁녀 하나를 숨겨두고 총애한다는
소문이 돌자 아랫것들을 시켜 세자가 총애한다는 궁녀의 신을 훔쳐오게 하지. 당시 주술에는 남자가 총애하는 여자의 신을 훔쳐
휘빈은 그걸 실행한거야. 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자 휘빈은 또 다른 주술을 믿게 돼. 그건 바로 교미하는 뱀의 정기(정액)을
닦은 수건을 차고다니라는 거였는데 휘빈은 그것마저 실행하고 말지. 하지만 이 주술을 사용했다는 것이 시어머니 소헌왕후의 귀
에 들어가게 됐어. 소헌왕후는 세종과 상의 한 끝에 교지를 내려.
그리고 이건 바로 폐출하는 이유에 대해 적힌 부분인데 엄청 길어.
심심할때 읽으면 대강 이해가 갈 듯. 윗 부분을 길게 풀어놓은 것이라고 보면 돼.
“대개 듣건대, 배필(配匹)이 서로 만나는 것은 생민(生民)의 시초로서, 운수(運數)와 복조(福祚)의 길고 짧음과 국가의 흥성함과 쇠잔함이 이에 달렸다고 한다. 옛날
주(周) 나라의
문왕(文王)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착한 여인(女人)
사씨(姒氏)를 얻어 배필을 삼으니, 저구(雎鳩)가 서로 화답해 우는 것처럼 화순(和順)하고, 얌전한 덕행(德行)이 가지가 굽어 드리우듯 아랫사람들에게 미치는 어짐[仁]을 미루어 인지(麟趾)의 응보를 가져 왔으며, 자손을 위한 좋은 계책[燕翼之謀]를 남겼다고 한다. 아아, 아름답구나. 후세(後世)로 내려오면서 순후(淳厚)한 풍습(風習)은 점점 엷어지고 여자가 지켜야 할 훈계는 전하지 아니하게 되니, 후비(后妃)와 빈어(嬪御) 중에는 간혹 남의 아내로서 마땅한 덕행은 생각지 아니하고 남편의 달콤한 사사로운 총애(寵愛)만을 다투어 바라는 이가 있게 되었다. 심(甚)한 자는 아양을 부리는 방법을 쓰며, 압승(壓勝)의 술법으로써 독점하려고 하다가 폐출(廢黜)되는 일을 재촉하게 된다. 여러 사적(史籍)을 상고하여 보면 비록 침방(寢房) 안의 말이라는 것은 대개가 애매한 것이 많으나 만약 정상(情狀)과 증적(證迹)이 드러나서 덮어 숨길 수 없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다 제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또 누구를 허물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조종(祖宗)은 가법(家法)이 매우 엄정(嚴正)하여 매양 내조(內助)의 공(功)을 얻었다. 내가 전년에 세자(世子)를 책봉하고,
김씨를 누대(累代) 명가(名家)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揀擇)하여서 세자빈(世子嬪)을 삼았더니, 뜻밖에도
김씨가 미혹(媚惑)시키는 방법으로써 압승술(壓勝術)을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 과인(寡人)이 듣고 매우 놀라 즉시 궁인(宮人)을 보내어 심문하게 하였더니,
김씨가 대답하기를, ‘시녀(侍女)
호초(胡椒)가 나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므로 곧
호초를 불러 들여 친히 그 사유를 물으니,
호초가 말하기를, ‘거년 겨울에 주빈(主賓)께서 부인(婦人)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術法)을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나, 주빈께서 강요하므로 비(婢)가 드디어 가르쳐 말하기를,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하오니,
효동(孝童)·
덕금(德金)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했는데, 〈
효동·
덕금〉 두 여인은
김씨가 시기하는 자이다.
김씨는 즉시 그 두 여인의 신을 가져다가 자기 손으로 베내어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여 그 술법을 써 보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호초가 또 말하기를, ‘그 뒤에 주빈(主嬪)께서 다시 묻기를,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하기에 비(婢)가 또 가르쳐 말하기를, 「두 뱀[兩蛇]이 교접(交接)할 때 흘린 정기(精氣)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가르친 두 가지 술법의 전자(前者)는
박신(朴信)의 버린 첩
중가이(重加伊)에게서 전해 들었고, 후자(後者)는
정효문(鄭孝文)의 기생첩
하봉래(下蓬萊)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세자궁(世子宮)에
순덕(順德)이라는 시녀가 있는데, 본래
김씨의 집종[家婢]이었다. 일찍이
김씨의 약낭(藥囊) 속에 베어 넣은 가죽신의 껍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괴이하게 여겨,
호초(胡椒)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우리 빈(嬪)께 이런 짓을 하라고 가르친 자는 누구냐.’ 하고 즉시 그것을 꺼내어 감춰버렸다 한다. 과인은 이 말을 다 듣고 즉시
순덕(順德)을 불러다가 거듭 물으니 다시 다른 말이 없었으며, 또 말하기를, ‘비(婢)가 일찍이 주빈(主嬪)의 어머니 집에 가서 가죽신의 껍데기를 내보이고 이어 그 까닭을 말하였습니다. 그 가죽이 아직도 비(婢)에게 있습니다.’ 하고, 꺼내어 바치는 것이었다. 이에 과인은 중궁(中宮)과 같이
김씨를 불러다가 친히 정상과 사유를 물으니 일일이 자복(自服)하였고, 베어낸 신의 가죽이 갖추어 있고 증언(證言)이 명백하여 전세(前世)의 애매하고 의사(疑似)한 일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슬프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아아, 세자를 정하고 그 배필을 간택한 것은 진실로 장차 종묘(宗廟)의 제사를 받들며, 남의 어머니로서의 궤범(軌範)이 되어 만세(萬世)의 큰 복조를 연장하려고 한 것이었다. 지금
김씨가 세자빈이 되어 아직 두어 해도 못 되었는데, 그 꾀하는 것이 감히 요망하고 사특함이 이미 이와 같기에 이르렀으니, 오히려 어찌 그가 투기(妬忌)하는 마음이 없고 삼가고 화합(和合)하는 덕(德)을 드러내며, 내조(內助)를 이룩하고, 의 상서를 불러 들일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부덕(不德)한 자가 받드는 제사는〉 조종(祖宗)의 신령이 흠향하지 않을 것이며 왕궁(王宮) 안에 용납할 수 없는 바이니, 도리대로 마땅히 폐출(廢黜)시켜야 할 것이다. 내 어찌 그대로 두어 둘 수 있겠는가. 이미
선덕(宣德) 4년 7월 20일에 종묘에 고하고
김씨를 폐빈(廢嬪)하여 서인(庶人)을 삼았으며, 책인(冊印)을 회수(回收)하고 사삿 집으로 쫓아 돌려보내어서 마침내 박행(薄行)한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가법(家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비위를 맞추어 아첨하여 그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한 시녀
호초는 유사(有司)에 넘겨서 법과 형벌을 바르게 밝히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이것은 상례(常例)에 벗어난 일로서 실로 국민들의 귀와 눈에 놀라움을 줄 것과 더욱 모든 관료(官僚)들도 아직 그 일의 시말(始末)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에 교서를 내려 알리노라.”
하였다.
뭐 요약하자면 이래.
궁중에 사는 아녀자가 감히 세자를 상대로 투기를 하고 난잡한 주술을 실행하니 궁 밖으로 나가 살렴 ^-^
사실 원인은 자기 아들에게 있었는데 애꿎은 며느리만 내 쫓은 꼴이라고 보면 됩니다.
결국 소박맞고 폐출 된 휘빈 김씨는, 아버지인 김오문의 손에 죽게 돼.
이 일이 한번이겠냐고? 그럼 순빈 봉씨는 왜 나올까요. 헤헿.
그럼 순빈의 이야기도 보고 갑시다.
순빈 봉씨의 본관은 하음, 아버지는 봉여였어.
휘빈이 폐출 되자 세종과 소헌왕후는 세자빈을 안 들일 수 없으니 고심 끝에 순빈을 간택했지. 간택 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어.
'휘빈이 세자보다 연치(나이)가 많아 그 정열을 이기지 못하였으니 세자와 동년배이되 순후한(얌전한) 얼굴을 띈 규수를 간택하
자.' ← 이 기준으로 뽑힌 세자빈이 바로 순빈 봉씨였지.
하. 지. 만
순빈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예상을 아주 제대로 박살내줬어. 생김새는 엄청 얌전하게 생겼는데 성격은 아니었다고 해.
순빈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다음과 같아.
'승휘 권씨(현덕왕후)가 회임을 하자 권 승휘를 못살게 굴었다.' (이때 회임한 공주는 일찍 죽은 경혜공주의 언니)
'소생이 없는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을 것이 두려워 거짓으로 회임을 고하였다.'
사실 이것도 순빈의 탓으로만 몰아가기 힘든게, 정실부인을 또다시 외면한 문종의 탓도 커.
문종이 죽은 휘빈을 생각해서라도 순빈에게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줬다면 순빈마저 비극의 희생양으로 몰지는 않았겠건만,
문종은 또 다시 휘빈에 이어 순빈까지 외면해버리고 말지.
결국 이런 지아비의 냉대에 못 이겨 순빈은 '대식' 을 감행해.
대식이라는 것은 마주보며 밥을 먹는 다는 뜻인데 조선시대에는 보통 남녀 구분이 확연해서 같은 상에서 밥을 먹지 않잖아?
그런데 혼인때 보면 주안상 같은거 올려놓고 같이 술도 하고 그러지? 그러니까 부부는 같이 밥을 먹는다고 하는 뜻으로 해서
'살을 섞은 사람' 이라는 뜻도 돼. 곧 궁에서의 대식은 동성애를 뜻했어.
사실 이 대식이 궁녀-궁녀끼리 자행되던게 아니라 원래는 고자였던 환관-궁녀를 뜻하면서 고려시대때부터 내려오던건데
점차 조선시대로 오면서 대식=동성애 라는 뜻이 되었다고 해.
여하튼 순빈은 세자빈궁의 궁녀였던 소쌍과 대식을 즐겨했어.
물론 소쌍이 남자역이었고 순빈이 여자역이었지.
그러면서 순빈은 종종 소쌍에게 '저하(세자,문종)께서 드시지 아니했으면 좋겠구나, 너와 함께하는 것이 더 즐거우니 말이다.'
라는 말도 했다고 하지.
이 일은 결국 시어머니인 소헌왕후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소헌왕후는 순빈에게 종아리를 치면서 부덕을 닦으라며 열녀전을
내려주었다고 하는데 순빈은 시어머니의 면전에서 열녀전을 집어 던지며 난동을 부렸다고 해. (패기甲)
사실 뭐... 원인은 자기 아들한테 있는데....
결국 참다못한 소헌왕후는 세종에게 이 일을 고했고 세종은 바로 이런 교지를 내리게 돼지.
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0월 26일(무자) 2번째기사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도승지 신인손(辛引孫)과
동부승지(同副承旨) 권채(權採)를 불러 어탑(御榻) 앞에 나아오게 하여 측근의 신하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근년 이후로 일이 성취되지 않음이 많아서 마음이 실로 편치 않았다. 요사이 또 한 가지 괴이한 일이 있는데 이를 말하는 것조차도 수치스럽다. 우리 조종 이래로 가법(家法)이 지극히 바로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셨었다. 이런 까닭으로 가도(家道)가 지금에까지 이르도록 화목하였다. 정미년(세종 9년)에 세자가 나이 14세인데 유사가 ‘후사를 잇는 일이 중대하므로 빨리 배필을 세워야 될 것이라.’ 한 까닭으로, 세족인
김씨(金氏)를 간택하여 빈으로 삼았으나
김씨는 정말 어리석고 못나고 총명하지 못하여, 기유년(세종 11년)의 사건을 초래하였으므로 이를 폐하고 다시
봉씨(奉氏)를 간택했는데, 뜻밖에도 세자가 친영(親迎)한 이후로 금슬(琴瑟)이 서로 좋지 못한 지가 몇 해나 되었다. 내가 중궁과 함께 상시 가르치고 타일러서, 그 후에는 조금 대하는 모양이 다르게 되었지마는, 침실(寢室)의 일까지야 비록 부모일지라도 어찌 자식에게 다 가르칠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세자는 나라의 저부(儲副)이므로 선대를 계승하는 도리로서는 후사를 두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는데, 부부 관계가 이와 같았다. 또 어린 나이인데 또한 잉첩(媵妾)을 많이 둘 수가 없으므로 근심한 지가 오래 되었다. 시험 삼아 이러한 뜻을 가지고
허조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가 아뢰기를,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어찌 조그만 혐의로 대체에 어두워서야 되겠습니까. 마땅히 명문집의 덕 있는 규수를 잘 골라 뽑아서, 궁액(宮掖)에 자리를 차지하게 하여, 후사 잇는 길을 넓히도록 꾀하는 일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세 사람의
승휘(承徽)를 뽑아 들였는데,
봉씨는 성질이 시기하고 질투함이 심하여서, 처음에는 사랑을 독차지 못한 일로 오랫동안 원망과 앙심을 품고 있다가,
권 승휘(權承徽)가 임신을 하게 되자,
봉씨가 더욱 분개하고 원망하여 항상 궁인에게 말하기를, ‘
권 승휘가 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들은 쫓겨나야 할 거야.’ 하였고, 때로는 소리내어 울기도 하니, 그 소리가 궁중에까지 들리었다. 내가 중궁과 같이
봉씨를 불러서 타이르기를, ‘네가 매우 어리석다. 네가 세자의 빈이 되었는데도 아들이 없는데,
권 승휘가 다행히 아들을 두게 되었으니, 인지상정으로서는 기뻐할 일인데도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니, 또한 괴이하지 않는가.’ 했으나,
봉씨는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이보다 먼저 세자의 유모가 항상 궁내의 일을 맡아 보았는데, 유모가 죽자 중궁이 또 늙은 여종을 뽑아 보내어 이 일을 대신 맡게 하였다. 그 여종은 평소부터 순실하고 근신하며 말이 적은 사람인데, 빈에게 말하여 세자의 의복·신·띠 등의 물건을 몰래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고, 또 속옷·적삼·말군[裙] 등을 여자 의복으로 고쳐 만들어 그 어머니에게 보냈었다. 나는 그가 어버이를 위한 것이라 하여 책망하지 아니하고, 다만 세자의 속옷 따위로 어버이의 의복을 할 수 없다는 것만 꾸짖었을 뿐이었다. 그 후에 또 세자에게 항상 가르치기를, ‘비록 여러
승휘가 있지마는, 어찌 정적(正嫡)에서 아들을 두는 것만큼 귀할 수가 있겠느냐. 정적(正嫡)을 물리쳐 멀리 할 수는 없느니라.’ 하였다. 이때부터 세자가 조금 우대하는 예절을 보였는데, 그 후에
봉씨가 스스로 말하기를, ‘태기(胎氣)가 있다.’ 하여,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다. 그가 혹시 놀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중궁으로 옮겨 들어와서 조용히 거처한 지가 한 달 남짓했는데, 어느 날
봉씨가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낙태(落胎)를 하였다. ’고 하면서,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 ’고 하므로, 늙은 궁궐 여종으로 하여금 가서 이를 보게 했으나, 이불 속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으니, 그가 말한 ‘임신(妊娠)했다. ’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또 지난해 세자가 종학(宗學)에 옮겨 거처할 때에,
봉씨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부터 외간 사람을 엿보았었다. 또 항상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었다. 또 일찍이 환자들의 호슬(護膝)·주머니·자루 등의 물건을 손수 만들었는데, 이로 인하여 세자의 생신에 으레 바쳐야 할 물건들을 미리 만들 여가가 없어서, 지난해 생신에는 이미 전에 바쳤던 오래 된 물건들을 새로 마련한 것처럼 속이고 바쳤었다. 또 궁중에 쓰는 물건과 음식물은 그 나머지를 덜어서 그 어머니의 집에 보내자고 청하였다가, 세자가 옳지 않다고 하자 자기가 먹다가 남은 음식물을 그 어버이에게 보내므로 이를 금지시켰더니, 그 후에는 환자들을 몰래 경계하여 세자에게 절대로 아뢰지 말고 보내게 하였다. 그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사로이 당고부(堂姑父)
송기(宋頎)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노제(路祭)를 맡게 했는데, 후에
송기가 제사를 지낸 족친의 성명을 기록하여 사사로이
봉씨를 뵈오니,
봉씨가 즉시 호슬을 주어 사례했으나 모두 세자에게 아뢰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온당치 못한 일이 상당히 많았다.
나는 모두 부인이 사리의 대체를 알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이를 내버려 두었는데, 요사이 듣건대,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召雙)이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 ’고 하였다. 어느날
소쌍이 궁궐 안에서 소제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 ’고 하니,
소쌍이 깜짝 놀라서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듣건대,
봉씨가
소쌍을 몹시 사랑하여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였고,
소쌍도 다른 사람에게 늘 말하기를,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 하였다.
소쌍이 또
권 승휘의 사비(私婢)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하여 혹시 함께 자기도 하였는데,
봉씨가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였다. 이 앞서는
봉씨가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이불과 베개를 거두게 했는데, 자기가
소쌍과 함께 동침하고 자리를 같이 한 이후로는, 다시는 시중드는 여종을 시키지 아니하고 자기가 이불과 베개를 거두었으며, 또 몰래 그 여종에게 그 이불을 세탁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궁중에서 자못 떠들썩한 까닭으로, 내가 중궁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항상 듣건대, 시녀와 종비(從婢) 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하여 동침하고 자리를 같이 한다고 하므로, 이를 매우 미워하여 궁중에 금령을 엄하게 세워서,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살피는 여관이 아뢰어 곤장 70대를 집행하게 하였고, 그래도 능히 금지하지 못하면 혹시 곤장 1백 대를 더 집행하기도 하였다. 그런 후에야 그 풍습이 조금 그쳐지게 되었다. 내가 이러한 풍습이 있음을 미워하는 것은 아마 하늘에서 내 마음을 인도하여 그리 된 것이리라. 어찌 세자빈이 또한 이러한 풍습을 본받아 이와 같이 음탕할 줄 생각했겠는가. 이에 빈을 불러서 이 사실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
소쌍이
단지와 더불어 항상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에만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이것은 곧 저희들의 하는 짓이오며 저는 처음부터 동숙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마는, 여러 가지 증거가 매우 명백하니 어찌 끝까지 숨길 수 있겠는가. 또 저들의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던 일을 또한 어찌 빈이 알 수 있었겠는가. 항상 그 일을 보고 부러워하게 되면 그 형세가 반드시 본받아 이를 하게 되는 것은 더욱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나머지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한 것과 벽 틈으로 엿본 따위의 일은 모두 다 자복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일은 모두 경하므로 만약
소쌍의 사건만 아니면 비록 내버려 두어도 좋겠지마는, 뒤에
소쌍의 사건을 듣고난 후로는 내 뜻은 단연코 폐하고자 한다. 대개 의 직책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은데, 이러한 실덕(失德)이 있고서야 어찌 종사를 받들고, 한 나라에 국모의 의표(儀表)가 되겠는가. 그러나 빈을 폐하고 새로 다른 빈을 세우는 일은 역대에서 중하게 여기는 바이다. 옛날에
한나라 광무제와
당나라 현종이 모두 그 아내를 내쫓아서 뒷세상의 비평을 면하지 못했는데, 더군다나 지금 두 번이나 폐출(廢黜)을 행한다면 더욱 나라 사람들의 시청(視聽)을 놀라게 할 것이므로, 나는 이를 매우 염려하여 처리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어제
안평(安平)·
임영(臨瀛) 두 대군으로 하여금
영의정 황희(黃喜)·
우의정 노한(盧閈)·
찬성 신개(申槪)를 불러서 이를 의논하게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폐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나도 거듭거듭 이를 생각해 보니,
공자와
자사(子思)도 모두 그 아내를 내쫓았으며, 옛날 사람이 또한 어버이 앞에서 개를 꾸짖었다 하여 그 아내를 내쫓은 이도 있으니, 진실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의로써 결단하여 그렇게 아니 할 수가 없는데, 경 등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알고 있으니, 교지를 만들어 초해서 바치도록 하라. 옛날에
김씨를 폐할 적에는 내가 한창 나이가 젊고 의기(意氣)가 날카로와서, 빈을 폐하고 새로 다른 빈을 세우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애매하게 할 수 없다고 여긴 까닭으로, 그 일을 교서에 상세히 기재하였으나, 지금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봉씨가 궁궐의 여종과 동숙한 일은 매우 추잡하므로 교지에 기재할 수는 없으니, 우선 성질이 질투하며 아들이 없고, 또 노래를 부른 네댓 가지 일을 범죄 행위로 헤아려서, 세 대신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속히 교지를 지어 바치게 하라.”
하였다.
신인손(辛引孫)이
권채(權採)와 더불어 임금의 뜻을
황희·
노한·
신개에게 전달하고, 함께 교지를 기초하여 바치고, 즉시 입직한
동지중추(同知中樞) 김맹성(金孟誠)으로 하여금 행향사(行香使)로 삼아 빈을 폐하는 일로써 종묘에 고하고,
봉씨를 폐출하여 서인으로 삼아 사제(私第)로 돌려 보내었다. 그 교지에,
“저부(儲副)는 한 나라의 근본이요, 배필은 삼강의 중대함이니, 처음을 바로잡는 도리는 삼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기유년에
봉씨를 명가의 후손이라 해서 세자빈으로 삼았는데, 나중에 규곤(閨壼)의 의칙(儀則)을 어길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우선 그 대개만 들어 말한다면, 성질이 투기가 많고 대를 이을 자식이 없으며, 또 궁궐 여종들로 하여금 항상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또 세자가 종학으로 옮겨 가 거처할 때에 몰래 시녀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 엿보아 외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환자의 주머니·자루·호슬을 손수 만들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세자의 생신에 으레 바쳐야 할 물건들을 미리 만들 여가가 없어서, 지난해 생신에 쓴 오래 된 물건을 몰래 가져다가 새로 마련한 것처럼 속이고 바쳤으며, 또 궁중에 쓰는 물건과 음식물을 세자의 명령을 받지 않고서 몰래 환자를 경계하여 그 어머니 집으로 보내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이 모두 애매한 것이 아니므로, 내가 친히 사유를 물으니 모두 다 자복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부부의 도리는 풍화의 근원이요, 빈을 폐하고 다른 빈을 다시 세우는 것은 역대에서 소중히 여기는데, 더군다나 지금 세자빈은 두 번이나 폐출을 행하니, 더욱 사람들의 시청을 놀라게 할 것이다. 다만 총부의 직책이 관계한 바가 경하지 않는데, 이러한 실덕이 있으니 어찌 세자의 배필이 되어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한 나라에 국모의 의표가 되겠는가. 이에 마지못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여 종묘에 고하고, 그 책인(冊印)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 다만 그대들 정부는 나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중앙과 지방에 효유(曉諭)할지어다.”
하였다.
위에 쓴 내용이랑 똑같은거야. 대식에 대한 내용이 좀 더 자세하게 나와있는 거 입니당 :D
사실 다른 기록에는 순빈이 폐출당한 이후에 아버지 봉여에게 죽임을 당했다, 라고 나오는데 이건 사실과 달라.
순빈의 아버지 봉여가 죽은건 당해 음력 7월이고, 순빈은 음력 10월에 폐출되거든.
그 이후로 기록이 없는거로 봐서는 폐빈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거나 스스로 자진했을 가능성도 커.
사실 따지고 보면 휘빈, 순빈 모두 안타깝지.
이상적인 시부모로 세종과 소헌왕후일 것 같고 이상적인 남편으로 문종일 것 같지만 역사는 전혀 달랐어.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입장을 이해하기 보다는 꾸짖을줄만 알았지.
정작 원인은 자신의 아들에게 있었는데 말이야.
문종 또한 마찬가지라고 봐.
후궁들은 그렇게 아꼈다고 하던데 정작 돌봐줘야 할 정부인은 외면했으니까.
그 업인지 몰라도 자식을 낳은 현덕왕후도, 아들인 단종도 모두 일찍 죽어.
(현덕왕후는 왕후로 정식 책봉받고 죽은게 아니라 세자빈 시절 단종을 낳고 산욕열로 죽음.)
왜 이런 사실들을 보면 매번 씁쓸해 지는지 원.
부부사이는 어느 한쪽을 몰아세울게 아니라 양쪽 모두 고루 맞춰가야 하는건데, 너무 며느리만 몰아세웠어.
문제시 오기륭이랑 사귐
문제없을시 오기륭이랑 결혼함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