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TV가 빛나는 밤에 (연이말2)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이 곳은 무조건적으로 연예인을 비난하는 곳이 아닌 올바른 비판을 지향하는 카페입니다. |
지하철참사 그때 그 사람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산소마스크 씌우면서 왜 또 대구인가 답답…
현장 물청소 싹 치워 정말 기가 막히더라…
유족단체 분열도 유감
두달간 밥 짓고 퍼날라 “가져가라” 할 땐 섭섭
업소·기업 소방점검 “왜 난리냐” 귀찮아 해
최영상 교수가 지하철참사 당시 중앙로역에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
지하철사고 당시 계명대 동산의료원 소아과레지던트 2년차 전공의였던 변준철씨가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구조된 환자를 급히 이송하고 있다. |
한옥자씨가 사고 당시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식사를 하던 한 구조대원의 검게 그을린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다. |
성상희 변호사가 2003년 2월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지하철차량기지에 있던 사고 전동차를 조사하고 있다. |
◇…“그날 이후 담배를 끊었습니다. 또 가끔씩 하던 운동을 헬스장에서 매일 2시간씩 정기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황윤찬 소방경(53·대구동부소방서 공산119안전센터장)은 2003년 2·18대구지하철참사 이후부터 작심을 하고 체력을 연마하고 있다. 강한 체력만이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는 뼈저린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슈퍼맨이었다면 ‘좀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하는 자책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고 당시 대구북부소방서 구조대장으로 활약했다. 오전 9시55분경 출동지령을 받고 구조대원 4명과 함께 가장 먼저 사고현장인 경상감영공원 인근 지하철중앙로역 내부로 들어간 사람 중 하나다.
“자욱한 연기와 시커먼 유독가스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몸을 녹여버릴 듯 뜨거운 열기는 사고현장 접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었지요.”
그는 동료 대원과 함께 지하철 벽을 짚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갑자기 발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있어 랜턴을 비춰보니 사람이었다. 서둘러 대원과 함께 한 명을 구조한 뒤 다시 지하철역사 내부로 진입했다. “살려 달라”는 목소리가 화장실 쪽에서 미세하게 들렸다. 승객이 출구인 줄 알고 화장실로 간 것이었다. 그는 거기서 2명을 구조했다. 다시 개찰구로 가서 쓰러져 있는 사람 3명을 발견해 대원과 함께 부상자를 후송했다. 연기와 열기는 더 매캐해지고 뜨거워졌다. 역사 진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의 체력도 고갈돼갔다. 장비점검을 위해 지상으로 올라와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다급하게 무전이 울렸다. 지하철 역사 지하2층 기계실에 13명이 고립돼 있다는 제보였다. 다시 구조 장비를 챙겨 지하철대구역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선로를 따라 걸어 중앙로역으로 들어갔다. 전동차가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옥내소화전을 활용해 불을 끄고, 살아있는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서봉수 대원과 함께 화마를 뚫고 지하2층 기계실로 향했다. 추가 구조대가 도착했다. 그들과 함께 역무실·기계실·통신실·침실 등에서 10명을 구조했다.
오후 2시20분, 연기가 잦아들면서 열기도 식어갔다. 그 시간 이후부터는 생존자를 찾기보다 사체수습에 몰두했다. 그는 이튿날 새벽까지 현장에 남아 구조활동을 펼쳤다.
“인명을 먼저 구조할 것인가. 화재를 먼저 진압할 것인가에 대한 순간순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만 인명구조에 우선을 뒀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연돌 현상(수직 공간 내에서 내부온도가 외부온도보다 높으면 공기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흐르고, 그와 반대가 되면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현상, 일명 굴뚝효과로 부른다)을 알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승객들이 굴뚝효과를 알고 계단 위로 피하지 말고, 선로를 따라 지하철대구역이나 반월당역으로 대피를 했다면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있다. 황 소방경은 당시의 상황을 반추하며 섭섭했던 생각을 털어놓기도 했다.
“죽기살기로 인명을 구조했는데 돌아온 건 욕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출동이 늦었다고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일부 대원은 징계까지 받았습니다. 유족한테 멱살을 잡힌 대원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면 그러겠냐고 이해도 되지만…. 하기야 지금도 소방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허허.”
그는 당시 지하철의 ‘지’자도 꺼내면 안 될 정도로 소방관이 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실제 2003년 11월9일 소방의 날 지하철참사 구조활동과 관련 포상을 받은 소방관은 한 명도 없었다. 황 소방경은 지하철사고 후유증으로 기관지가 약해져 지금도 고생을 하고 있다.
◇…“당시 계명대동산의료원 소아과레지던트 2년차 전공의였습니다. 대구지하철참사가 일어났던 2월18일 오전, 응급실 앞에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동필 응급의학과 과장의 눈에 띄어 엉겁결에 앰뷸런스를 탔습니다. 도착한 곳은 바로 사고현장인 지하철중앙로역이었습니다.”
변준철 과장(37·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은 9년전 그날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고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매캐한 연기와 유독가스가 지하철 출구마다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고 시커멓게 그을린 사람도 비틀거리며 나오더군요.”
“제가 맡은 일은 지하철역에서 실려 나온 응급환자에게 재빨리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호흡이 멈춘 환자가 들것에 실려 나왔을 때는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왜 이 같이 처참한 사고가 또 대구에서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사고 당일 1995년 상인동 지하철폭발사고를 떠올리며 ‘목이 메었다’고 회상했다.
“지하철역사로 들어가 직접 승객을 구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계속해서 몰려오는 환자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변 과장은 그 와중에도 어린이 환자를 찾아 동산의료원에 입원시키고 진료를 했다. 그는 “사고 당시만 해도 대형사고가 났을 때 대구지역 대학병원간 환자이송을 위한 유기적인 협조체계가 없었는데 지금은 매뉴얼도 생기고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변 과장은 지하철참사 때 구조 활동을 하던 모습이 영남일보 1면에 사진으로 게재돼 꽤 유명세를 치렀다. 소식이 없던 친구로부터 안부전화가 오고, 교수들로부터 “병상에서 환자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하며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격려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신문사진을 스크랩해 앨범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가 결혼을 하기 전 지금의 아내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자 아내가 자랑스러워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그날 퇴근을 하기 위해 가운을 벗던 순간 자신의 가운이 새카맣게 변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만큼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다.
변 과장은 최근 가족과 함께 팔공산에 있는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를 찾아 지하철안전전시관을 관람했다. 그에게도 2월18일은 아픈 잔상이 각인된 날이다.
◇…성상희 변호사는 지하철참사 당시 대구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이었다. 그는 당시 대구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지하철참사대책위원회를 발족함에 따라 법률지원단 단장으로 활약했다.
“유족과 대구시 사이에 사고원인 조사 및 보상을 두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망자와 부상자의 손해에 대한 배상, 보상이 소송으로 진행되지 않고 합의로 종결된 게 다행입니다.” 그는 당시 양자 사이에 조정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당시 사고현장을 보존해야 할 대구지하철공사가 사고 며칠 후 물청소를 해 현장을 싹 치워버린 것입니다. 기가 막혔지요.”
성 변호사는 당시 자신의 업무는 거의 포기한 채 사고수습에 매달렸다. 희생자의 장례식 때는 직접 상여를 메기도 했다. 대구지하철참사 추모사업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해 추모공원 조성에 힘을 실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점은 지금도 아쉽다. 그는 2005년부터 2년간 독일에서 국제평화에 대해 연구를 했다. 귀국한 이후 대구지하철 참사를 평화와 생명의 문제로 인식하고 피해자와 대구시민들이 집단적 기억을 보존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현재 그는 미술품을 판매해 공익기금을 조성하는 등 시민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특히 반전과 국제평화·군축·저개발국 원조를 위한 국제연대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성 변호사는 “유족단체가 분열돼 지금까지 갈등이 지속되는 것은 유감”이라며 “고인에 대한 추모, 사고 원인과 부상자에 대한 인식과 변화의 방향, 성금을 낸 국민들의 마음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그에 어긋나지 않는 방향으로 추모사업이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하철사고가 나던 날 오전 남편과 함께 한약방에 약을 지으러 갔습니다. 우연히 TV뉴스속보를 보다 중앙로역에서 화재가 발생한 걸 알았어요. 약을 짓다 말고 남편과 함께 바로 지하철중앙로역으로 달려갔지요.”
한옥자씨(58)는 2003년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 서구지구 부회장이었다. 그녀는 지하철참사가 발생하던 날부터 사고수습이 이루어질 때까지 두 달여간 하루도 빠짐없이 사고 현장과 대구시민회관광장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거의 매일 오전 5시 칼바람을 맞으며 출근해 밤늦게까지 밥을 짓고, 퍼 나르고, 배식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고 미쳤다고 했어요. 저도 당시 제 자신이 봉사에 중독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식재료를 현장 인근 마트에서 구입했는데, 마트 직원이 제가 봉사하는 걸 보고 감동해 적십자회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적십자사 대구지사 봉사원 전원은 당시 사고대책본부가 철거할 때까지 줄곧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펼쳤다. 삼성과 대구은행 같은 기업봉사단도 끝까지 함께 했다. 한씨는 매일 1천인 분이나 되는 밥을 지었다. 어떨 땐 1천500인 분까지 짓기도 했다. 그래도 전혀 피곤한 줄 몰랐다.
“유가족이 까닭도 없이 화를 내면서 밥을 도로 가져가라고 할 땐 섭섭한 마음도 들었습니다만, 오죽 힘들었으면 그럴까 생각하며 이해했지요. 그래도 어떤 유가족은 추운데 고생한다면서 손을 꼭 잡아주기도 했습니다.”
한씨는 특히 “119구조대원이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구조대원이 구조에 열중하다 자신의 얼굴이 시커멓게 된지도 모른 채 밥을 먹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한씨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유가족이 기구한 운명을 이야기하며 슬퍼할 땐 같이 울어주고 위로해줬다.
그녀는 “봉사는 사실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금방 달려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서 참봉사자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방화였지만, 1080호 전동차가 중앙로역으로 진입을 하지만 않았어도 대형 사고는 막을 수 있었겠지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최영상 교수(대구보건대 소방안전과)는 당시 소방안전과 관련해 사고차량 및 지하철 내 안전시설을 점검하고 사고 이후 이를 개선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동차 내장재가 대구지하철참사를 계기로 대부분 불에 타지 않는 불연재로 바뀌었습니다. 또 지하철중앙로역을 비롯한 대구지하철 1·2호선 모든 역사에 빛을 집적하는 축광식 유도타일을 설치해 어둠 속에도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최 교수는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지하철승강장 계단에 수막시설을 설치한 것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 교수는 이밖에도 지하철안전과 관련해 많은 시설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우리의 안전문화의식이 선진국에 비해 낮다고 역설했다.
그는 “업소나 기업에 소방안전점검을 가면 선진국 같은 경우엔 ‘더 개선할 점이 없나’ ‘점검을 해 줘 고맙다’는 식으로 환대를 하는데 우리의 경우 ‘장사도 안 되는데 왜 와서 난리냐’ ‘내가 다 알아서 하니 걱정마라’는 식으로 귀찮아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소방방재시설 설비와 같은 하드웨어적 요소와 관리자들의 숙련도·안전의식·책임감 같은 소프트웨어적 요소가 균형을 이뤄야 각종 참사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며 “지하철참사 9년이 지나 느슨해진 면이 없는지 각자가 안전의식에 대해 성찰할 것”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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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발림 작성시간 12.04.20 다문화 할돈으로 낙후된 소방관 시설이나 고쳐주고 월급이나 올려주지 왜내세금으로 이상한짓만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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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흔들어 드세요 작성시간 12.04.20 하 여기서 찡함 터졌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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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하선 작성시간 12.04.20 ㅠㅠ....대우좀 잘 해달라구 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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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소님 작성시간 12.04.21 대우쫌해달라고....대우쫌.....!!!!소방은...소중한소방관들이 죽어야만...하나씩 고쳐주는짓..그만하고...좀....미국의 반만이라도...해도...반만...아니..반에반...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