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계속 바라보고 있었어
유튜브 돌아다니다가 존나 힙한 이박사 공연영상을 보고 이 글을 쓰게 됨
“나는 나예요, 그냥. 음악은 모방이 없다. 창작이다. 개발이다. 노력이다. 예술은 멀다. 질리지 않는다. 재밌다. 재밌는 삶이다!”
예명 이박사(李博士 / Epaksa), 본명 이용석
1954년 10월 5일생
초등학교 때부터 가요를 시작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고
15살 때는 락에 심취하더니, 부모님으로부터 경기민요까지 접하다가
결국 19세부터는 뽕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함
트로트와 다른 장르와의 접합 등으로 '테크뽕'을 만들어낸 선구자이기도 하다
여기서 트로트란?
구한말, 일제시대부터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엔카음악'에서 유래한 음악 장르
트로트는 1960년대 이후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고, 뽕짝이라는 명칭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함
1960년대 중반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트로트와 뽕짝이라는 단어를 혼용하여 사용하긴 했지만
'뽕짝'은 트로트를 낮추어 부르는 의미가 더 강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박사는 1989년에 가수로 데뷔하며 '신바람 이박사 Vol.1'을 출시하게 됨
기존 고속도로 뽕짝과는 사뭇 다른 노래들로 테이프 판매량 1백만 장 이상을 기록하는 놀라운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이후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 19개의 앨범을 내면서 앨범마다 큰 인기를 얻는 등 고속도로에서 말 그대로 신바람나게 팔려나갔다고 함
하지만 한국에서의 성공은 제한된 영역에서의 히트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1995년에는 일본 진출을 기획하게 됨
때마침 굴지의 레이블인 일본 소니 관계자가 한국 남대문시장을 관광하다 우연히 이박사의 음악을 듣고
그의 노래에서 대박을 예감했다고 함
소니는 처음에는 이박사에게 일본어 음반을 내자고 요청했지만, 이박사는 한국에서 하던 스타일 그대로를 고집했다고 함
계약이 파기될 뻔했지만 히트 가능성을 강하게 예감한 일본 관계자가 결국 이박사의 손을 들어줬다고 함
당시 일본에선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창 테크노 붐이 일고 있었는데
소니뮤직은 이박사가 부르는 뽕짝 메들리가 일본 젊은이들 입맛에 아주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네
바로 그렇게 내게 된 앨범이 바로 이것
소니사가 저작권을 갖고 있는 일본 노래들을 한국말로 번역해 이박사 식으로다가 소화한 뽕짝 음반을 내게 되고
96년 3월 21일 드디어 일본에서 첫 음반이 나옴
제목은 ‘이박사의 뽕짝 디스코 파트 1·2’인데
‘이박사’나 ‘뽕짝’ 같은 단어는 우리말 소리 나는 그대로 ‘E-Pak-Sa’, ‘Pon-Chak’ 이렇게 적었다고 함
왜냐하면 그게 더 이국적이고 이박사의 노래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
반주도 일부러 김수일 씨 키보드 하나로 한정하고 최대한 코리아 이박사가 부르는 원조 뽕짝 맛 나게 만들었다고 함
소니랑 1년 계약 후 다시 2년 연장해 3년 동안 모두 6장의 음반을 내게 됨
“처음에는 1년 계약이었는데 인기가 점점 많아져 총 6년간 일본 소니와 활동을 했지.
요즘도 종종 나를 기억하는 일본 팬들이 여기 놀러 와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가. 팬클럽 회원도 8만 명이나 됐었어.”
한류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 현란한 복장을 한 한국인이 나와서
일본의 엔카 비슷한 무언가를 사이키델릭하게 부르는 모습은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고 함
당시의 일본 젊은이들은 금세 이박사에게 열광했고
소니뮤직과 자회사 큔소니 레이블은 발 빠르게 한국어 앨범을 제작해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고 함
이박사가 일본에서 발매한 싱글 「이박사의 뽕짝 디스코 파트 1&2」,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박사의 뽕짝 대백과」
그리고 1990년 일본 최고의 테크노 그룹인 덴키그루브(DENKI GROOVE)와 함께 만든 「이박사&덴키그루브:열려라 뽕짝」 등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1996년 이박사는 ‘일본 가요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게 됨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일본에서는 살충제 광고도 찍게됨(에어로졸 모기살충제 CF)
배경음악으로는 '강원도 아리랑' 메들리를 사용했다고 함
"1996년 부도칸에서 공연을 했지. 1만7천 석이 꽉 찼어.
지금도 일본에서 오라고 하는데, 외국은 길게 있으면 지루하더라고. 아는 사람도 없잖아."
일본 3대 음악프로그램 중 하나인 후지 TV의 '헤이헤이헤이'에 출연도 했다고 함
최고의 한류스타 보아보다 5년 먼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었던 동방신기보다
이박사가 먼저 도쿄 부도칸의 만석 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함 (나도 글 쓰면서 알게됨)
부도칸은 일본 가수들에게도 꿈의 무대라고 함
"재미있는 건 제 한국말 노래 해석하려고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한 일본 청소년이 무척 많았다는 거예요.
그중에는 우리나라 연세어학당에 유학와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돌아간 친구들도 있어요.
저한테 보내는 팬레터는 꼭 한국말로 쓰고 얘기도 한국말로 하구요.
덕분에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어붐이 불었다며, 마음 뿌듯하다, 그런 말씀하시는 재일동포 분들 여럿 만났어요."
일부 열성 팬은 이박사와 대화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고
한국에서 중년층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던 이박사가 일본에서는 20, 30대 젊은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고 함
“한국 음악에는 너희들의 엔카와 다른 파워와 한이 담겨 있다고 말해줬지. 그 자리에서 라이브로 내 노래를 들려줬어.
내가 강연한 후 그 대학에 한국어 강좌가 생겼다더라. 도쿄대 학생들이 내 공연을 보기 위해 단체로 몰려오기도 했어.”
이박사는 일본 최고의 명문 도쿄대 강단에 서기도 했는데
1996년 당시 도쿄대의 초청을 받고 ‘한국 트로트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강의를 했다고 함
당시만 해도 우리 전통 가요는 일본의 엔카에서 비롯됐다는 의식이 팽배하던 시절인데 그야말로 국위 선양
끝으로 이건 자료들을 찾으면서 참 안타까웠던 영상이었음
Mnet의 방송 트로트X 3회를 캡쳐한것인데
방송을 안봐서 앉아있는 사람들의 역할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심사위원단(?)의 자리에는 설운도, 태진아, 그리고 까마득한 트로트 후배들(홍진영, 박현빈), 뮤지, 혐세윤이 있었는데
이박사가 자기들보다 한참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존칭 하나 쓰지 않고
삿대질을 하며 '이박사 아니야?', '이박사 맞지?', '나 이박사 공연 처음봐' 라는 말을 하며
그래도 우리나라의 음악장르 중 하나를 개척해낸 사람을 너무 깔보는게 아닌가 싶은 느낌을 많이 받았음
특히 태진아는 이박사가 한창 일본에서 잘나가던 시기에
'이박사는 뮤지션이 아니라 광대'라는 말을 하며 그를 비하한 적도 있다고 함
그래서 그런지 저 방송에서 이박사를 처음 봤을 때 표정이 좋지않음
물론 뒤로 가서는 웃으면서 보긴 하지만 딱히 감정이 좋진않은듯
모은 자료들은 많은데 글 다쓰고 한번 다 날라가서 글 쓸 의욕을 잃어벌임..
내가 보고 존나 멋있다고 생각한 이박사 공연영상 남기고 떠남
* * *
진짜 마지막으로 이건 설명이 너무 재밌어서 다시 첨부함 ㅋㅋㅋ
'몽키매직(2012),
이박사 스스로 개척한 장르인 '테크노뽕'을 대표하는 노래
라이브 공연 시 본인이 원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 특징'
MBC 인간시대에 '신바람 이박사'라는 제목으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머리속에 넣고 있는 노래가 3,000개였다고해
자료 찾으면서 인터뷰들도 되게 많이보고 옛날 자료들도 많이 봤는데 이 글에 다 못넣는게 아쉽네
욕망방지짤은 필요없겠지?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모구모구코코팜 작성시간 18.03.29 댓글에 트로트계의 핑크플로이드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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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허으바나운나나 작성시간 18.03.29 ㅋㅋㅋ개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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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맛있는건 참을수 없어 작성시간 18.03.29 아 삿대질... 내가 제일 싫어하는건데 존나 무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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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환환 작성시간 18.03.30 이박사라는 가수는 알고있었지만 그냥 잠깐 흥했다 사라진 가수라고만 생각했었어... 진짜 대단한 분이신데 나도 색안경끼고 봤던거 같아서 반성하게 된다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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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폭풍똥방구 작성시간 18.06.04 이박사 울동네 살았었는데 아직도 살고 계시려나 몽키매직 좋아했었는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