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흥미돋]136명의 조선인은 76년 동안 아직도 일본 바다 속에 있다. 조세이 탄광 수몰 `사건`
작성자호우호우호우호우작성시간18.05.09조회수1,657 목록 댓글 10나도 최근에 알게된 사건이라서 여시들도 같이 알았으면 해서 글을 써!
조금 내용이 길지만 그래도 끝까지 읽어줬으면 좋겠어.
말머리는 자체적으론 씹빨인데 뭘 해야할지 일단은 흥미돋으로 할게.
<사진출처: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395981>
조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개시한 이듬해인 1942년 2월 3일 오전 10시 채탄작업에 투입된 탄광 광부 183명이 갑작스런 갱내침수로 인해 사망한 대현탄광사고로 기록된 사건
1938년 4월에 발표된 ‘국가총동원법’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전쟁에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 인적·물적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통제할 목적으로 만든 법이다. …(중략)… 이 법은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되어 강제징용·징병·식량공출 등 전시통제체제가 시행되었다.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국가총동원법’>
국가총동원령으로 강제 징용된 총 조선인 인구는 당시 조선인 인구 30%를 차지하는 800만명이라고 추정하고 있음
(중복인원 포함)
이 법으로 일제는 군인, 근로정신대, 일본군 ‘위안부’등의 이름으로 조선의 인력들을 강제 동원 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물자였던 석탄 조달을 위해 일본 탄광에 ‘모집’되어 간 조선인들도 있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말만 모집일뿐 실제로는 가족을 고문하겠다는 등의 협박으로 강제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끌고 갔다고 말한다.
1934년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충청남도 홍성 지역 젊은이들. /조선DB(사진 제공=홍성군)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은 크게 노무 동원과 병력 동원(징병), 군 위안부 세 가지 형태로 진행됐다. 이 가운데 노무 동원은 광산·항만·공사장·군수공장·농장 등 산업 현장에 인력을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노무자(勞務者)라는 것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당시 노무 동원된 조선인들 대다수는 강제적으로 끌려갔고, 임금은커녕 허기도 면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중노동에 시달렸다. 일본인 감시자들의 폭력 속에서 도망치지도 못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일본의 노무 동원이란, '강제 노역'이었던 것이다. "
(수몰 전 조세이탄광)
특히 조세이탄광은 탄광 중에서도 위험도가 높은 해저탄광이었고, 낙반사고와 침수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위험한 탄광으로 소문나 있었다.
이 때문에 광부모집에 어려움을 겪어서 조세이탄광측은 임금이 저렴하면서도 위험성에 대해 모르고 있던 '순박한' 조선인들을 선호했다고 한다.
실제로 '모집'이라는 이름 아래 조세이 탄광에 온 조선인들은 가혹한 채탄 노동자 생활을 했다.
조세이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의 수는 1,258명.
(군함도로 끌려간 조선인은 500~800여명)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보고 이 지역의 일본인들은 조세이 탄광을 ‘조선탄광’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인 노동자에 의해 조세이탄광이 엄청난 성장을 했기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이 탄광은 태평양전쟁을 앞둔 1941년에 최고 출탄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사진: 현재 남아있는 조세이탄광 근처 탄광촌 (일본인들 블로그 출처)
이 실적을 위해 조세이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약 3m30cm의 높이의 울타리로 에워싸인 숙소에 감금되어 일제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생활하면서 하루 약 12시간을 채탄작업에 투입되었다.
당시 조세이탄광은 작은 누수가 계속해서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는 안전하지 않은 갱도였다.
이를 보고 위협을 느낀 조선인 노동자들이 작업장 범위를 벗어나거나 도주를 하다 붙잡히면 일제는 본보기라며 무차별한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본래 조세이탄광은 채탄작업이 이뤄져서는 안 되는 탄광이었다.
이전에 발생한 다른 탄광에서의 침수사건 때문에 조세이탄광이 위치한 야마구치현의 탄광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후쿠오카광산감독국에서 해저채굴제한을 두었었다.
그런데 조세이탄광은 이 해저채굴제한을 포함한 안전규정을 어겨가면서 채굴작업을 했는데, 이는 전쟁을 위한 물자확보를 위해 감독기관(일제정부)의 묵인하에 이뤄졌을 확률이 매우 컸다.
특히 채굴 작업이 이뤄지던 곳은 깊이가 너무 얕아서 해수면에서 37m정도 밖에 되지 않아 조선인 노동자들은 천장에서 배의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10시에 채탄작업이 한창이던 조세이 탄광에서 누수가 시작되며 갱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갱도가 무너진 것은 삽시간이었다.
당시 채탄작업을 위해 일하던 183명이 사망했고 그중 136명이 조선인 노동자였다.
사고직후 일제 경찰대와 탄광측 직원들의 이상한 행동을 하기시작했다.
갱도의 입구를 널빤지로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수가 마을까지 솟구쳐 올라와 마을이 침수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으나 생존자는 ‘탄광주택지역은 해면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혹은 사망자의 가족들이 갱도로 들어가서 2차 피해를 우려해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도 하나, 어쨌든 사고 직후에 입구를 봉쇄한 것은 사실이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출처: 일본 조세이탄광 수몰 사고 진상조사 2007)
갱도 내에 있던 180여명이 사망한 대참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보도는 너무도 초라했다.
3-4줄의 짤막한 기사 서너개로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평소 우베시의 지역신문은 지역을 대표하는 탄광산업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탄광에 대한 대소사를 기사로 쓰고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세이탄광 수몰사고에 대한 작은 보도는 당시 태평양 전쟁 중에 국민과 광부들의 사기를 저하시키지 않고, 일제의 업무 과실을 숨기기 위해 고의적으로 축소 보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누수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두 지점은 사고 며칠전부터 일본인 탄광 직원들이 상주하며 누수 정도를 체크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탄광측은 이미 누수에 대해 사고를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침몰사고에 대해 ‘경계태세’에 있었으나 이것에 대해 조선인 및 다른 식민지 노동자들에게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조사하면서 우리는 다음의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로, 조세이 탄광의 수몰사고는 예방이 가능한 사고였다는 점이다. 회사측은 수몰사고가 있을 수 있다는 징조를 몇 차례에 걸쳐 확인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전점검을 새로이 하던가 아니면 갱내작업에 투입되는 광부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등 충분한 안전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안전상 해서는 안 되는 사항=탄주(탄광안에 설치하는 기둥)를 제거하고 채탄작업을 하는 상황까지도 과감하게 전개했던 것이다.
둘째로, 법적으로 조업이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지역에서의 무리한 조업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다시 말해서 조세이탄광은 처음부터 조업해서는 안 되는 지역에서 불법적으로 채탄작업을 감행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셋째로, 광부의 안전과 광산자원의 보호를 위해 설치된 광산감독국이 적절한 행정조치를 취했는지의 여부가 의심된다는 점이다. 채탄작업의 개시부터 일상적인 감독관리 이르기까지 광산감독국은 광산업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고, 법규에 정한 바를 위반할 경우에는 형사처벌이 가능할 정도의 권한을 갖고 소정의 광업소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런 감독국이 조세이탄광의 위반행위를 간취 못 했다고 할 수 없으며, 또 설사 간취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을 면 할 수는 없다. 광산감독국은 광부의 안전을 관리하고 책임져야할 의무를 유기한 것이다.
이상의 점을 생각하면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는 단순히 ‘사고(accident)’가 아니라 탄광회사측의 위법행위와 행정기관의 관리소홀이 빚어낸 ‘인재(人災)’이며 따라서 하나의 ‘사건(case)’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관계서류 등 자료( 및 사료)확보의 어려움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이 점 수몰사고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또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일본정부와 관계기관의 적절한 대응이 촉구되는 바이다."
< 출처: 일본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진상조사 (2007)>
그런데 일본정부는 지금까지도 희생자 180여명의 유골을 발굴 한 적이 없어.
위에도 썼듯이 이 사건은 단순히 탄광회사의 잘못만 있는 것이 아냐.
전쟁을 명분으로 한 국가의 묵인, 그리고 관리소홀로 이뤄진 인재야.
그런데 지금 일본은 “해방이전에 자행되었던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모든 행위는 1965년의 한일회담으로 일소 되었다.”라는 태도로 나오고 있어.
(한일회담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 이드냐?' 한일협정 반대 시위하는 고등학생들, http://contents.kdemo.or.kr/sub03/sub03_06.html)
심지어는 책임은 회사에 있다며, 그 회사 마저도 이미 망해서 없어졌다는 이유로 회사 소유주 후손들은 유족들조차도 만나주지 않고 있지. 유족들이 회사 소유주 후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별다른게 아냐. 위령비, 추모비 세울 공간 하나만 내달라고 했는데 무시하고 있는거지. 위령비 명목의 비석이 아예 없는건 아니야.
“…위령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피아(해저탄광 배수 및 환기구)가 있는 해변 반대편, 즉 방파제 위쪽으로 나있는 국도를 건너가면 수풀이 우거진 공터가 있는데, 그 한구석에 덩그러니 위령비가 서 있다. 사고가 나고 40년 뒤인 1982년 4월에 세워진 것이다. 이 비에는 사고 경위나 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한 문구가 단 한마디도 없다. 그저 ‘조세이탄광 순난자의 비’(長生炭鑛殉難者之碑)라는 제목과 함께 최소한의 사고일시, 그리고 ‘영원히 잠들라, 편안하게 잠들라, 탄광의 사나이들이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건립위원’이라는 사람 10명의 이름이 첨부돼 있는데, 우베시 관계자와 지역 유지들 이름이라고 한다.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가해자 측의 진정성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추도비를 세우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았어!
바로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라는 일본시민운동가모임이 주도해서 돈을 모았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을 하고, 그래도 모자란 돈은 모임의 대표인 야마구치 다케노부씨가 융자를 받았다고 해.
이렇게 모인 돈이 한국돈으로 약 8천만원으로 사건이 발생한 바닷가 근처의 낡은 주택부지를 사서 간단하게라도 추도식과 추모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래.
야마구치 다케노부 씨
“회원들 모두 마음이 일치했습니다. 강제연행 사망자들이 한국 천안 ‘망향의 동산’에라도 안치되려면 뼛조각이든 유품이든 뭐가 필요한데, 여기 조세이탄광 수몰자들은 지금도 바닷속에 있으니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분들 유골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희 모임 힘으로는 무리이고. 그래서 우리가 매입한 자리에 빨리 추모공간을 만들어서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고 싶은 겁니다.”
<출처: https://www.ilje.or.kr/service/victimSupport/view/279>
그리고 2015년 조세이탄광 추모비가 세워졌어.
조세이탄광 사건은 위에서 언급한 야마구치 다케노부씨가 1976년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관련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해. 그리고 이것에만 그치지 않고 유족들도 찾아내고 위에 쓴 관련 모임도 결성해서 계속해서 추모 사업을 하고 있어.
[김형수/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족회 회장: (야마구치 다케노부) 그분이 (조세이 탄광사고를) 발견을 해서 그분을 통해서 유족들도 알게 되고, 자기 호주머니 풀어서 저희들이 추모재에 참석 할 수 있도록 초청을 해 줍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지금 현재도 한일 불교 협회가 함께해서 추모재를 지내고 있대.
“유족회가 결성되면서 조세이 탄광 사고가 국내에 점차 알려졌지만, 국내에서 대규모로 현장을 방문해서 추모재를 지낸 것은 올해 관음종이 세번째였습니다. 10여 년 전 조연 스님이 300여 명의 방문단을 이끌고 현장에서 추모재를 지낸 뒤 맥이 끊겼던 국내 주도 추모행사는 지난해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의해 10년 만에 다시 시작됐습니다.“
가장 최근 소식은 18년 1월에 나온 기사야.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에서 일본 후생노동부와 유골발굴과 관련한 교섭이 다음 달에 있다. 라고 하는데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찾을 수가 없었어ㅠ
긴 글이었는데 여기까지 읽어줘서 너무 고마워.ㅜ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하다보니 4-5시간은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아.
아마 대일항쟁기(2007년 9월 20일 국회결의안을 통해 인정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용어)에 일제가 한 악행 중에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을거야ㅠㅠ
강제로 가미카제 대원이 되어서 고인이 되었는데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있다던가.. 하는 얘기들이 참 많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밝혀지고 유족들도, 그리고 피해자분들의 유골이 다시 한국 땅에 돌아왔으면 좋겠어.
마지막으로 조세이 탄광 사건에 대해 만들어진 지식채널 e 동영상링크랑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홈페이지 링크 두고 갈게!
지식채널E: http://www.ebs.co.kr/tv/show?prodId=10000&lectId=10599460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http://www.chouseitankou.com/index.html
<참고자료들>
일본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진상조사(2007)
관음종, 조세이탄광 유골 발굴 첫 발걸음, http://m.btnnews.tv/news/articleView.html?idxno=46228
일제 강제동원(징용)과 전범기업 : 조세이탄광, 도요공업(마쓰다 자동차), 오지제지, 니혼강관(JFE스틸) ,http://hkkim5209.blog.me/220329218896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https://www.ilje.or.kr/service/victimSupport/view/279
日 조세이 탄광 사고...韓日불교계 유골 발굴 '촉구',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8413
조선인 강제징용, 군함도는 극히 일부였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20/2017072002589.html
탄광촌 사진1: http://blowinthewind.net/haikyo/chosei/chosei.htm
탄광촌 사진2: http://exploring66.blog.fc2.com/blog-entry-81.html
프리한19, 아프지만 꼭 알아야 할 역사19 편
지식채널E, 조세이 탄광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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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스트-
작성자영독공 작성시간 18.05.09 한일협정때 돈3억불인가받으면서 사과안받기로하고 돈주는것도 사과로주는거 아니고 독립축하금으로 줬다던데 존나빡침 그러면서 민족적민주주의라고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서양과다르다고ㅠㅇㅈ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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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남일이다 작성시간 18.05.09 하 진짜 일본놈들 근현대사 공부할 때마다 빡쳐ㅠㅠㅠㅠㅠㅜ 그대로 돌려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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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쉬운남자아니야앗 작성시간 18.05.09 개빡쳐.....일본에대한 반감만 늘어난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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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충성총성^^7 작성시간 18.05.09 우선 이렇게 긴 글 써준 여시 고생많았구 고마워!!!
전혀 몰랐던 사고인데 이렇게 알게되니 화도 나고 슬프네ㅠㅠ
앞으로도 잊지않게 많은사람들이 알게되었으면 좋겠다ㅠㅠ -
작성자너는뭐니닌 작성시간 19.06.19 여샤 군함도로 연어왔는데 너무 잘읽었어!! 고마워 ㅠㅠ 역사저널 그날 보고 궁금했는데 정리가 잘된것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