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에 첫발을 딛고 맑은 물을 수통에 담고 있는 국군용사. 10월26일 오후 5시50분,
함경남도 혜산에 도착한 6사단 7연대 수색대원의 잊을 수 없는 모습이다.
6·25 54주년 대한민국재향군인회(회장 이상훈)는 이날 오전 11시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6·25 54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안주섭 국가보훈처장은 기념사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치신 호국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깊이 추모하면서 참전용사 여러분의
숭고한 위훈에 한없는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는 참전용사들과 관련 단체들이 현충탑을 찾아 참배했다.
그러나 무더위 탓인지 6·25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져 가는 탓인지
"참배객의 발길은 뜸한 편"이었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도깨비 뉴스는 이날을 맞아 전쟁 당시의 현장 사진을 모았다.
1. 한국전쟁 피난민 전쟁고아
2. 한국전쟁 전투 한국군
3. 한국전쟁 전투 인민군
4. 한국전쟁 정전협정
1. 한국전쟁 피난민 전쟁고아
분단된 조국과 함께 자유를 찾는 일가족들의 모습
북한은 1950년 6월25일 오전 4시 T34형 전차 1백30대를 앞세워 38선 전역을
무력 침공했다. 3년 1개월만에 휴전협정이 조인됐으나 양측의 인명피해는
2백만명에 이르렀고 재산피해도 극심했다.
(전쟁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전쟁고아의 모습 1950년 9월 28일 서울 모습)
한국전쟁 피난민 - 전쟁고아
피난길에 오른 한국의 어머니 (1950)
피난길에 지친 한가족이 연합군이 배급한 급식으로 허기를 메우는 모습
피난길에 지친 한가족이 연합군이 배급한 급식으로 허기를 메우는 모습
피난민. 전쟁고아
흥남부두에 몰려나온 피난민들이 `유엔`군의 `LST`를 다투어 타고 있다.
철수함정을 타려고 흥남부두에 쇄도한 북한동포들
1950년 12월12일부터 약 한달동안, 철수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약 10만명의 북한동포가 해상을 통해 남쪽으로 탈출했는 때의 광경이다.
수십척의 함정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이들 수송은 한국과 유엔군의 철수 못지않게
대규모적인 것이었으며, 큰 기적을 이룬 작전으로 유명했다.
6·25전쟁 중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 흥남철수 성공뒤엔
`기적의 배`가...59명 정원 메레디스 빅토리호 피란민 1만4000명 자유의 품으로 인도. 14,000명의 피란민은 물도 약도 없이 3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닿았다.
50년 7월29일 국군의 소개명령으로 지게나 소가 끄는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 행렬
폐허속에서 노숙하는 전란민 가족 (1950년 9월)
완전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시가와 전난민들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당시)
북한동포의 목숨 건 남하 행렬
1950년 12월4일 평양을 철수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북한동포들은
이렇게 부서진 대동강 다리를 결사적으로 건너 남하하기 시작했다.
51년 1. 4 후퇴때 서울시민들이 철도에서 피난하고 있는 모습
51년 1.4후퇴 때 서울 시민들이 철도를 따라 피란하고 있다.
피란보따리 위에 어린이가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6.25 피난생활 "금지구역"
한국전쟁 때 거제도에 도착한 흥남철수 당시의 피난민 모습
임시수도 부산의 천막촌. 1951년
2. 한국전쟁 전투 - 한국군
드디어 38선(한탄강)을 돌파하고 북진중인 육군용사들.
전선으로 긴급 출동하는 국군 기병대.
학도병 전선투입 -남침한 인민군을 격퇴하기 위해 국군병사들이 50년 7월5일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몸에 맞지않는 군복과 누비담요, 소총등으로
무장한 것으로 보아 학도병들인 듯하다.
1950년 7월14일 전선에서 국군 취사병들이 임시로
가설한 가마솥에 밥을 지은 뒤 소쿠리에 퍼 담고 있다.
1949년에 제주도에서 창설, 6.25개전이래 곳곳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한국 해병대는 1950년 9월15일 UN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상륙용 주정에서 아군의 함포사격으로 검은 연기 싸인 기슭을 바라보면서
상륙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에 돌입한 국군선봉대
패주하는 인민군을 쫓아 직격을 거듭한 상륙 동진부대 국군과 un군은 9월15일
드디어 한강을 건너서 26일까지 인민군을 완전 소탕, 서울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평양공략을 위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는 국군1사단 장병들 -
평양 제2의 관문인 보통문이 보인다.(1950.10.17)
38선상의 간이 아치.(1950) 38선돌파 기념으로 우리 국군들이 세운것임.
1950년 10월 아침. 평양입성...평양. 화신앞 모란봉 가는길.
신상철 (7사단장)씨와 함께 인민군의 말을 타고 찍은 모습.
국군 입성을 환영하는 함흥 시민들.(1950.10.18)
1950년 10월26일, 국군 선봉대 용사들이 만주를 눈앞에 바라보는 압록강 기슭
혜산진에 도달하여 감격에 벅차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고창하고 있다
북한의 상공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공군기
불을 뿜는 무반동총 - 육군이 무반동총을 지급받아 무장한 것은 6.25전란 중이었다.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공군사상 최초로 전선으로 출격하는 무스탕 전투기편대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공군사상 최초로 전선으로 출격하는 F-51 전폭기들
한국전쟁중 국군을 위문하고 있는 연예인
3. 한국전쟁 전투 - 인민군
사진은 부산 인근에서 벌거벗은 채 줄맞춰 이동 중인 인민군 포로들의 모습을
당시 AP통신의 맥스 데스포 기자가 사진에 담았다.
북한 공군조종사들이 긴급 출격을 위해 소련제 야크18 전투기에 오르고 있다.
미군의 참전으로 인민군이 제공권을 빼앗긴 시점이 50년 7월10일경이라는 점에서
이 사진은 이 해 6월말에서 7월초까지의 북한공군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개전초기 한국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민군 전차
탱크를 앞세우고 남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는 인민군. 소련은 지금까지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지지해왔으나 최근들어 중립적인 입장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남침설이 등장하고 있다. (1950. 7. 01 )
1950년 6월 28일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들.
6.25 남침하의 서울에서 이른바 `의용군` 끌려가는 장정들.
6.25 전쟁때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T-34-85형 인민군 탱크. 중량32t,
최대시속 50km, 승무원 4명으로 인민군 전력의 핵심이었다.
4. 한국전쟁 - 38선. 정전협정
38선을 긋는 순간 - 유엔군 연락장교 제임스 레이 대령(왼쪽)과 인민군 연락장교
장춘산(오른쪽)이 판문점에서 휴전선을 정하는 협정을 시작하고 지도에
38선을 긋고 있다.(1951.11.26)
1953년 7월 27일 하오 10시 정각부터 12분간에 걸쳐 조인된 정전협정문의 서명.
1953년 7월 27일 하오 10시 정각부터 12분간에 걸쳐 조인된 정전협정문의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