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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눈물한방울][미제사건]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작성자전.화.하.지.마.시.라.고.요.|작성시간19.03.26|조회수5,118 목록 댓글 7





사건발생



1991년 3월 26일. 이 날은 전국 시군구의회 기초의원을 뽑는 선거일이어서 임시공휴일이었다.




8시 무렵 성서국민학교에 재학중이던 3~6학년 어린이 6명 우철원(13·6학년/1979년 생), 조호연(12·5학년/1980년 생), 김영규(11·4학년/1981년 생), 박찬인(10·3학년/1982년 생), 김종식(9·3학년/1983년 생), 그리고 김태룡(10·3학년/1982년 생)은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조호연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은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 놀라고 핀잔을 줬다.





여섯명 가운데 김태룡은 이때 집으로 아침을 먹으러 가고 나중에 급히 아이들을 뒤쫓아 와룡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따라잡았지만 산에 쫓아갈까 하다가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 는 어머니의 말이 생각나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김태룡은 이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우철원 군을 비롯한 5명의 아이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 와룡산으로 나갔다.



조호연의 형 조무연(당시 중학교 1학년/1978년 생)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 일을 하는 아주머니도 9시쯤 아이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려고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다섯 아이들과 지나쳤다. 
그때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하는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고 한다.

우철원과 같은 반인 김경열과 이태석이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고 증언 했다. 
이들은 점심 먹기 직전 철원이가 아이들과 산 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외룡산 기슭에 사는 김이수 아주머니는 2시 무렵에 다섯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같은 학교 4학년에 다니던 함승훈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증언을 남겼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함승훈은 이 날 동네 형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 
그는 형들과 혼자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다급한 비명소리를 두 차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이 올라갔던 형들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함군은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종식 군의 어머니 허도선과 김영규 군의 어머니 최경희는 함승훈이 
산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11시 30분 쯤에 똑같이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묘한 '위기감' 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찾아 나섰지만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면 야단이나 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들은 6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허탕을 치고 저녁 7시 50분에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샅샅이 산을 뒤졌다. 하지만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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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일지

▲1991.3.26 = 김종식군 등 개구리 잡으러 간 성서초등학교 어린이 5명 실종사건 발생...경찰 수사 착수, 현상금 4천여만원 

▲1992.8 = 경찰 실종 소년들 나환자 정착촌 암매장 제보 접수...현장조사 결과 허위제보로 판명 

▲1992.11 = 실종사건을 영화화한 조금환 감독의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 개봉 

▲1993.1 = 실종자 부모들 김영삼 당시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 제출 

▲1993.11 = 경찰청, 실종사건에 대한 수사연구팀을 구성해 사건을 원점부터 재분석하는 등 수사 강화 

▲1995.7 = 경찰 명지대학교의 도움받아 개구리소년 5명의 변모된 얼굴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생시킨 전단 2만여장을 제작, 전국 경찰에 배포 

▲1996.1 = 한국과학기술원 심리학자인 김가원 교수가 실종 어린이들이 김종식군의 집 주변에 묻혀 있다는 주장을 펴 경찰이 김군의 집 화장실과 보일러실 등에서 발굴작업을 벌였으나 단서 못찾고 해프닝으로 종결 

▲1996.5 =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 해체...대구 달서경찰서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수사본부체제로 전환 

▲1997.8 = 40대 여자가 법정에서 자신이 개구리소년들을 유인, 암매장했다고 진술해 경찰이 수사에 착수...허위진술로 판명 

▲2001.7 =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 한 염전에서 제보...경찰 현지 급파, 허위로 판명 

▲2002.9.26 =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4부 능선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편에서 유골 4구와 신발 5켤레 발견 

▲2002.11.12 = 경북대 법의학팀 개구리소년 사망원인 `타살'로 잠정 결론 

▲2004.3.26 = 개구리소년 5명 경북대병원 영안실서 합동 장례식 

▲2005.11.15 = 심리학박사 김가원씨 개구리소년 추적기 담은 실화소설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 출간 

▲2005.11.28 = 개구리소년 유족들 국회서 `공소시효 연장.폐지'촉구 기자회견

▲2006.3.2 5=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공소시효(15년) 만료 (대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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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에서 타살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용접공이 쓰는 망치가 유력한 살인무기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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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점들

1.범인은 연쇄살인범?
-프로파일러의 공통된 주장은 살인을 즐기는 연쇄살인범이라는 점입니다.
-아이들의 두개골 흔적을 보면 상대방의 고통을 즐기는 타입으로서, 살아있다면? 계속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있을것으로 추정됩니다.
-단독범행이 유력시됩니다. 타살흔적을 보면 대단히 규칙적이고 잔혹하기때문에 혼자했을 가능성이 크고 2~3명의 범인이 더 존재했다면
어떤 다른 흔적이 남거나 자수하는 일이 있을수도 있다고봅니다.

2.계획성? 우발성?
-범행은 계획적이였습니다. 살인무기를 미리 구해놓았고 살인상대를 물색하던 중에 아이들을 발견한 것이죠. 처음에는 1~2명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여러명이자 당황해서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우발적인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매장을 할때 아이들의 옷을 입힌채 묻은점. 그리고 얕게 매장한 점입니다.

이 곳의 지리를 잘알지만사는 사람은 아닐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발적으로 많은 아이들을 죽이자 당황해서 대충 얕게 묻고 현장에서 도망친 것이죠. 

예를 들어 살인무기나 그런것들을 볼때 이동네 주변에 공사를 하러온 사람이 아닐지 그런 추측이 많습니다. 
-옷을 묶은 매듭과 규칙적인 공격 패턴을 볼때 살인경험이 많은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은 추정할수있습니다.

3.군부대 관련설?
-한때 유력한설 중에 하나였습니다. 실제로 유해가 발견된 곳에서 

400m 떨어진 곳에 50사단의 사격훈련장이 있었고 아이들이 탄피를 줏으러 가는일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발탄으로 인한 사고가 나자 나머지 아이들까지 싹다 죽였다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았었죠. 

하지만 이 설은 증거도 없을뿐더러 조직적으로 묻어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게 중론입니다.

4.왜 10년이 지난 후에 발견?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인과 경찰, 

그 밖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총 동원되어 와룡산을 뒤졌는데 10년이 지나고서야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와룡산은 높이 300미터 정도의 야산일 뿐인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다른 장소에서 피살된 아이들이 나중에 잠잠해지자 와룡산에 암매장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법의학자들이나 범죄심리학자들의 분석은 아이들이 살해되고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매장되었다 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와룡산은 야산이지만 아이들이 놀러갔다고 알려진 서남쪽의 '불미골'이 아닌, 

당시에 존재하던 저수지 반대편에서 능선 반대편을 지난 '세방골' 에서 발견되었고,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와룡산에서도 골이 가장 깊고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의 분석으로는 90년대 초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야산들 대부분이 민둥산에 가까웠고 와룡산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이 인근은 군 사격 훈련장이 있기 때문에 성인들도 발길이 뜸하였고 그만큼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비가 내리면 실개천 같은 게 형성되는 지점이기도 했다고 한다. 


10년이 지나서야 유골이 발견된 이유에 대해선 사건 당일 저녁에 비가 내린 탓에 

아이들의 흔적이 모두 빗물에 씻겨 내려간 탓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발견 당시 쉽게 눈에 뜨인 것은 그 해 여름 폭우로 살짝 덮여진 흙 등이 씻겨 내려갔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살고 있던 지점에서 산 반대편까지. 


아이들의 부모들은 왜 아이들이 그곳까지 갔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탄피 등을 주우러 갔거나 범인이 일부러 아이들에게 탄피 등이 많은 곳을 알려주겠다고 유인하였거나

아니면 정말 다짜고짜 아이들을 외진 곳까지 끌고 갔을 것 등등의 분석이 나왔다. 


아무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와룡산에 대한 수색은 의외로 그리 철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여론적으로 살인이 아니라 실종, 납치 등에 비중을 두고 있었는데다가 

앞서의 증언들처럼 와룡산에서 어린이들이 조난당할 가능성은 생각되지 않았고, 

암매장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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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미제사건이 많고많지만 범인을 꼭 한명 잡고싶다면 개구리소년사건을 꼽습니다.
그만큼 너무나도 미스테리하고 이해가 안되는 사건이에요.

산을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꼼짝없이 그자리에서 몰살당했다는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죠.
하다못해 한두명은 도망친다거나 기적적으로 살아난다던가...
아이들 5명을 혼자서 꼼짝 못하게 할수있는사람은 누구일까요? 대단히 잘알고 따르는 사람이던가 엄청난 압박을 줄수있는 사람?
범인은 어떤사람일까요?
아직 살아있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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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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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영빵발을찾아서 | 작성시간 19.03.26 22 나도 범죄알못인데 저문구보자마자 띠용함ㅋㅋ 성인이 애기들 다섯 묻는게 뭐 힘들다고ㅋㅋ 저 사건보자마자 어른들 다 군부대서 그런거라 바로말함
  • 답댓글 작성자살빼서꼭백예린원피스입을거에요 | 작성시간 19.03.26 444나도 군 이상하게 생각함
  • 답댓글 작성자밀가루 처돌이 | 작성시간 19.07.18 55 군대에서 사람죽이고 묻히는거 그알에서 몇번 나왔는ㅋ디 뭔 개솔;;ㅋ
  • 작성자뿌슝빠슝 | 작성시간 19.03.26 진짜 미스테리야...
  • 작성자테크노파크 | 작성시간 19.03.26 저 흉기가 진짜 말도 안된다. 미쳤다고 저걸로 애를 내리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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