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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조국의 독립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쳤던, <스무살의 독립 투사들>

작성자5인격|작성시간19.08.14|조회수2,314 목록 댓글 11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과제존나쩌려버려

 

 

 

 

 

 

 

 

 

 1. 원태우(1882~1950)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사를 준비.

때마침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 관광을 다녀온 후 서울로 되돌아간다는 소식에 원태우는 안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지나가자 돌을 던짐.

거사 당시 나이 23세의 농민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의 창문을 깨고 정확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머리에 명중되었으며 이때 깨진 유리파편 중 8조각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박혔다고.
이토 히로부미는 뇌진탕을 일으키는 등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되었으나 급하게 치료를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

당시의 기차가 시속 20km정도의 저속기차여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네.

 

원태우는 이후 체포되어 고문 뒤 불구가 되고, 한국전쟁 발발까지 일제의 감시와 착취 속에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전해짐. 

 

원태우 의사의 의거는 최초의 이토히루부미 암살 시도로, 이후 의거들(안중근 의사의 의거포함)의 점화격이 되었다고 해.

의거지는 현재 안양자동차학원 맞은편 지점으로 비석 하나가 세워져있음.

 

 

 

 

 

 

 

 

 

 

 

 

2. 김향화(1897~?)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전개되고 전국 각지로 파급되자, 특히 진주와 수원의 기생들을 중심으로한 독자적 만세 시위가 이따랐다고 함.

 

1919년 3월 29일, 수원 기생 조합의 30여 명이 성병 검진을 받으러 자혜의원으로 가던 중, 수원경찰서 앞에 이르러 기생 김향화를 선두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름.

병원에 가서도 검진을 거부하고 대한독립만세 제창.

또 돌아오는 길에 경찰서 앞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고 헤어졌는데, 주도자 김향화는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음.

투옥 당시 나이 22세

 

출소 후의 행방이 묘연하여 고문 후 사망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고 해.

 

>당시 신문에 기록된 기생들의 전언

 

....향화언니가 가장 앞장서 외쳤어요. 기생들 꽃값으로 영치금 넣었지요.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왜놈들에게는 술을 따르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언니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들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

 

 

 

 

 

 

 

 

 

 

 

 

3.이선경(1902~1921)

 

10대 여학생이었지만 예외로 포함해봤어.

 

경기여고 재학 중 구국민단 활동을 이유로 퇴학 당하고, (구국민단은 1920년 3·1 운동 이후에 조직된 항일비밀결사단체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사람들의 유족을 구조한다는 목적에서 조직된 단체. 여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음.)
이선경 열사는 독립운동 선전 간행물 배포한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 위해 상해 망명을 시도했다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 경찰에 체포 되어 옥고를 치루게 됨.

 

8개월간의 궐석 재판 끝에 겨우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나게 되지만, 극심했던 고문의 여파로 풀려 난지 9일 만에 자택에서 순국..

순국 당시 나이 19세의 여학생..

 

 

 

이선경 열사가 체포되었다는 당시 신문의 기사

 

 

 

 

 

 

 

 

 

 

 

4. 박재혁(1895~1921)

 

 

 

 

 부산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 현 부산 개성고)에서 만난 절친한 동지이자 의형제인 최천택, 오택과 함께 구세단 활동을 했던 것이 18세의 일. 구세단은 독립투사들의 국내 가교 역할을 하는 비밀결사대로, 매달 한번씩 반일 잡지를 발간해서 경남지역 청년들에게 배포하다가 주도자가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함.

 이후 상해로 건너가 친우 최천택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 경상도 일제 식민통치와 식민지배의 상징인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기로 결심. 당시 나이 25세.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은 중국인 잡상인으로 분장 한 뒤에 폭탄을 헌책속에 숨기고, 부산 경찰서장이자 경상도 경무부 관내 수석장인 하시모토에게 진기한 고서가 있다고 하면서 면회를 청함. (하시모토가 고서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고 해)

박재혁은 하시모토의 집무실에서 보자기를 펴면서 폭탄을 꺼내들고, 유창한 일본말로 동지들을 고문한 죄를 꾸짖으며 곧바로 폭탄을 마루바닥에 던졌음.

 

하시모토는 병원 이송중 사망, 박재혁 열사는 부상을 당한 후 치료받고 체포되어 3심에서 사형이 확정.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박재혁 열사는 모진 고문으로 하반신에 이상이 올 정도였다고.. 다음 해 동지 최천택이 면회를 가면서 갖고온 달걀 꾸러미를 거부하면서 "왜놈손에 사형 당할 바에 단식하여 죽겠다"고 함. 그리고 일주일 후, 열사는 결국 단식으로 순국하심..

 

 

 

 

 

 

 

5. 최수봉(1894~1921)

 

 

 

1919년 밀양 장날 만세시위를 지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일제의 수배를 받게 됨.

그 길로 만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 의열단 내에서 폭탄제조법을 배우고 밀양으로 돌아와 기회를 엿보던 중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사건 소식을 듣고 거사를 도모하기로 결심. 당시 나이 25세.

 

1920년 12월 27일 오전 7시 30분 경 밀양 경찰서 서장실에서 전 경찰서원이 모여 서장 와타나베의 훈시를 듣고 있을 때, 최수봉은 경찰서 창밖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폭탄 2개를 잇달아 던짐.

첫 번째 폭탄은 순사부장의 어깨를 맞고 탁자 위에 떨어졌지만 불발, 이어 현관쪽에 떨어진 폭탄은 폭발하였지만 힘이 약해서 기둥을 폭파하는데 그치고 특별한 사상자를 내지 못함.

 

최수봉은 인근 민가로 근처로 도주,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후 체포되어 다음 해에 사형이 집행되었음.

 

 

 

 

 

 

 

6. 김익상(1895~1925 추정)

 

 

 

 

 

아마 가장 통쾌한 의거 중 하나가 아닐까 함.

 

서울 마포구 출생 김익상은 1920년 북경에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을 만나 그의 뜻에 감탄하여 의열단에 가입.

1921년 9월 9일에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 받고 즉시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를 결행. 당시 나이 26세, 비행사를 꿈꾸던 청년..

 

 김익상은 일본인으로 변장, 양복 속에 폭탄과 권총을 감추고 북경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음.

 김익상의 기지를 보여줄 수 있는 이때의 일화가, 기차 안에서 일제의 몸수색과 신분증 검문이 이루어지고 있을때 일제의 요주 인물로 낙인찍혔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옆좌석으로 이동,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본 여자에게 말을 붙이면서 교묘하게 부부 행세를 했다고. 천만다행으로 김익상을 일본인으로 본 경찰이 검문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고 함.

서울에 무사히 도착한 뒤 김익상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 잠입,

청사 2층에 즉시 폭탄 두발을 던지고, 이에 놀라 1층에서 뛰쳐나오는 일본 헌병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할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청사를 빠져나옴. (....bbbbb)

 

의거 직후 김익상은 이태원의 동생집에서 묵고, 삼엄한 수사망을 뚫고 이튿날 평양에 도착해 일본 의복으로 변장해서 국경을 무사히 벗어나 북경에 도착,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에게 거사의 성공을 보고했다고.(...bbb)

 

 

1922년에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를 처단하기로 결심, 의열단원 동지인 오성륜, 이종함과 거행. 오성륜이 먼저 총을 쏘고 불발하면 김익상이 폭탄을 던지는 시스템이었음.

그러나 이 때는 총이 불발하고 폭탄이 터지지 않는 불행으로 실패하고, 오성륜은 현장에서 체포, 이종함은 피신에 성공, 김익상은 피신 중에 총탄에 맞고 체포됨.

 

피신 중에도 벌어졌던 일화가 하나 있음. 김익상은 피신 중에 중국 순경이 달려들자 그에게 총탄을 발사했는데 총구를 중국순경에게 겨누지 않고 하늘을 향해 발사함.

재판정에서 판사가 그 사실에 대해 묻자 김익상은, "대한독립과 관계 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을 위해 쏘았다. 총구를 하늘을 향해 겨눈 것이 맞다"고 진술하며 그때의 재연을 하고 박장대소하는 기지를 보여주었다고..

 

 

 

 

 

 

 

 

7. 윤봉길(1908~1932)

 

 

 

 

 

충남 예산 출신, 일찍이 농촌 계몽 운동가로써 활동하다가 한계를 느끼게 됨.

1930년, 장부출가 생불환(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상해로 망명, 백범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 축하의식과 일본군 전승 축하식을 상해 홍구공원에서 함께 거행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거사를 계획. 당시 나이 24세의 청년이자, 갓 태어난 두 아들들의 아버지..

 

 

오전 11시경 윤봉길은 수통형 폭탄의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함.

이 의거로 일본군 대장과 단장이 사망하고 주요보직의 군인들이 부상당함. 또한 당시 중국 총통이었던 장제스가 "중국의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일개 조선의 청년 하나가 해냈다"며 감격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성원하는 계기가 됨.

침체되어있던 독립운동에 활기를 띄게 한 의거였다고 할 수 있겠음.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후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재판정에서도 "일본을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의거 직후 연행되어가는 사진은 그래서 일제의 조작이라는 설이 있음.

다음 해 총살당한 열사님의 유해를 일제는 쓰레기 처리장에 버렸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될수 있었음..

 

다음은 거사 이틀 전 열사님이 두 아들들에게 남기신 유언.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반드시 조선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너희는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8. 유동하 (1892~1918)

 

 

왼쪽부터 안중근,우덕순,유동하

 

 

 

함경남도 출신.

유동하의 부친은 러시아에서 약재상을 운영하면서 간도, 연해주 등지의 독립투사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며 항일운동을 도왔음.

유년 시절에 만주의 한인마을로 이주, 이때부터 부친과 함께 안중근, 우덕순 등 공립협회의 회원들과 만나 이토히로부미 처단을 논의함. 당시 나이 17세. 

 

러시아어에 능통한 유동하는 안중근, 우덕순과 하얼빈까지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게 됨.

1909년 10월 26일 그들은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안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탄을 맞추는데 성공.

의거 성공 직후 안중근 의사는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크게 외쳤고, 곧바로 의거를 지켜보고 있던 유동하 의사도 뛰쳐나와 "조선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고.

 

그들은 현장에서 체포됐고, 여순 고등 법원에서의 재판에서 우덕순, 안중근 외 연루자 15명이 일제히 어린 유동하는 거사에 대해 몰랐다고 진술. 이에 유동하는 살인방조죄에 정상참작으로 1년 6개월형을 받게 됨.


뤼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후, 시베리아로 돌아온 유동하는 항일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가 독립 운동에 대한 지원을 받고자 많은 애국청년들과 볼세비키 혁명군에 가담, 하지만 시베리아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피체되어 싸말리아 강가 부근에서 27세의 나이에 총살당하여 순국.

 

 

 

 


 

 

9. 이원대(1911~1943)

 

 

 

가장 왼쪽이 이원대

 

 

영천 출신, 어렸을때부터 의협심이 남달랐다고. 의열단 단원이자 이원대의 친우인 안병철이 이원대의 의협심을 믿고 망명을 권했고,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있던 이원대는 23세에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 혁명간부학교 입학해 혁명간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교육을 받고, 백범 김구의 요청으로 '한인특별반'에 입교.

 한일특별반은, 일본 본토와 동아시아 대륙의 교량 역할을 하는 한국,남만주 지방의 일본군 군사 시설을 파괴하는 데 그 사명이 있었음. 이 때 일본군 장교 자동차 폭파, 일본 장교 암살, 시설물 파괴, 공작 활동 등의 주요인사로 나섰다고. 이 때 나이 24세.

이후 한중 연합작전을 통한 본격적인 대일 무력투쟁이 이루어지도록 창단된 조선의용대원으로 중국 호남성 등의 전장에서 전투, 조선의용대의 유능한 파괴 공작대원으로 인정 받음.

 

중국 산서성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고, 악랄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함.

 

 

 

 

 

 

 

 

10. 조명하 (1905~1928)

 

 

 

 

백범 김구와 같은 황해도 출신. 그 때문에 김구 선생의 무용담을 들으며 애국남아로서 독립운동에 일찍이 뜻을 품었다고.

 

부인이 아들을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와 부인의 친정을 방문하려고 함께 집을 나섰다고 함. 그런데 가는 길에 갑자기 조명하는 어머니에게 "큰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 라며 발걸음을 돌림. 여기까지 왔는데 마누라는 보고 가라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아섬. 처자식을 보면 흔들릴것같아 내린 결심이었다고..

 

오사카에서 공부하다가 1927년 타이완으로 향했는데, 당시 일왕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참모총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가 타이완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 

 

28년 5월 14일, 조명하는 단도에 극약을 바른 다음, 구니노미야가 나오는 도로로 감. 양쪽에는 경비군경이 물샐틈없는 경비를 하고 있었지만, 환영 군중 사이에 서있던 조명하는 단도를 빼내 들고 구니노미야가 타고 있는 자동차 뒤쪽에 재빨리 뛰어 올랐음.

차에 동승했던 부하가 위협을 느끼고 구니노미야의 몸을 감쌌고, 조동하는 그를 향해 단검을 던졌음. 운전자 사망, 구니노미야는 가벼운 부상. 

 

조명하는 거사 직후 아수라장이 된 그 자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고, 소란스러워진 중국 군중들을 향해 "당신들은 놀라지 말라. 나는 대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다."라고 침착하게 말했다고.. 

그 자리에서 피체 되어 황족위해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3개월 뒤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사형 당하여 순국.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타이완 타이페이의 일제 처형장에서 조의사가 순국 직전 남긴 유언

 

 

 

 

 

 

 

 

 

 

 

 

 

 

 

 

 

 

이분들 외에도

의열단, 조선의용대, 광복군, 독립군, 의병, 수많은 청년애국열사단에서 활동하셨던

꽃다운 청춘들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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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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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느개삥 | 작성시간 19.08.14 일본만 없었다면.. 저분들은 얼마나 찬란했을까
  • 작성자유정란 | 작성시간 19.08.14 감사합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 작성자Alisa | 작성시간 19.08.14 고맙습니다
  • 작성자을파소 | 작성시간 19.08.14 감사합니다
  • 작성자이민호(1987.06.22) | 작성시간 19.08.1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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