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710122.html?_fr=gg#cb
[짬] 세번째 간토대학살 영화 만드는 오충공 감독
등록 2015-09-23 18:43
수정 2015-09-23 20:49
오충공 감독. 사진 길윤형 특파원
“내년엔 꼭 완성하고 싶어. 재정 문제도 있어서 어렵지만, 해야지.” 한국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간토(관동)대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충공(59)이라는 이름은 피해갈 수 없는 ‘큰 산’이다.
그가 30여년 전에 만든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숨겨진 손톱자국-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학살>(1983)과 <불하된 조선인-간토대지진과 나라시노 수용소>(1986)는 1923년에 일어난 간토대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당시 가해와 피해 쪽에 섰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당시 대학살을 90여년 전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영화를 본 뒤 밀려오는 충격에 당혹감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
재일 조선인 2세인 오 감독은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두 편의 문제적 영화를 내놓은 뒤 30여년 동안 영화판을 벗어나 있었다. 33살에 결혼을 한 뒤 이바라키현에 있는 부친의 회사를 경영하며 생업에 종사해온 탓이다.
83년 ‘숨겨진…’ 86년 ‘불하된…’ 등
간토 조선인 학살 영화 2편 만들어
30년만에 영화 그후 다룬 작품 제작
“동일본대지진과 혐한열풍 보며지금까지 진상 규명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담고 싶었다” 그러던 중 4년 전인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다.
오 감독은 간토대지진 연구로 이름 높은 재일 사학자인 강덕상(83) 선생(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의 연락을 받게 된다.
그는 오 감독에게 “두번째 영화를 찍은 뒤 30년 동안 이뤄진 변화를 다시 한번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이대로 그만둔다면 오 감독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만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고민이 시작됐지.” 당시 지진 피해로 인해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던 오 감독은 긴 고민 끝에 세번째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조금씩 불기 시작했던 ‘헤이트 스피치’ 등 혐한 열풍도 그의 결심에 적잖은 영향을 줬다. 오 감독은 “새 영화에선 1923년 9월1일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뒤 2015년까지 이 죽음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발생했고, 진상 규명을 위해 어떤 노력이 이어졌는지 전체 역사를 다뤄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지진이 발생한 뒤 일본으로 와서 첫 진상규명 활동을 했던 고 최승만(1897~1984)으로부터 이후 관련 연구를 진행해온 연구자들인 강덕상, 금병동(작고), 야마다 쇼지(85), 그리고 지역에서 꾸준히 진상규명 운동을 해온 일본의 풀뿌리 단체들과 한국 유족들의 사연을 담을 예정이다. 영화의 제목은 일단 ‘유족과 유골은 어디에’로 정했다.
오 감독의 신작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전작들이 이룬 뛰어난 성취다. 오 감독의 첫 영화인 <숨겨진 손톱자국>은 1923년 대학살 때 가까스로 살아난 재일 조선인 조인승(1902~1984) 노인의 사연을 축으로 사건을 직접 목격한 20여명의 증언을 모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처음엔 그가 다니고 있던 요코하마 방송영화전문학원(현 일본영화대학)의 졸업 작품으로 기획된 것이다.
‘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위령하는 모임’이 1982년 9월 도쿄 아라카와 강변의 옛 요쓰기바시 부근에서 벌어진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한다는 소식을 들은 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발굴 현장으로 뛰어나갔다. 영화의 주인공인 조 노인은 1923년 2월 경남 거창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뒤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지진이 나던 날 현재 도쿄 오시아게 부근의 공사 현장에 있던 조 노인 일행은 피난을 가다 요쓰기다리 부근에서 소방단에게 붙들렸다. 이후 조 노인은 자경단, 일본 민중, 경찰 등의 공격을 받아가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두번째 작품인 <불하된 조선인>에선 조 노인이 수용돼 있던 지바현 ‘나라시노 수용소’에서, 당시 일본군이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조선인을 학살하라며 ‘불하’한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일본인도 일본 정부도, 확실히 한 일은 했다고 말해야 해!”(조인승) “마을 사람들이 ‘오래 살진 못할 것이다. 어떻게 죽었으면 좋겠냐’고 (묶여온 조선인에게) 물었지.”(학살에 가담했던 마을 주민 기미즈카 구니오) 오 감독이 기록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사라져 버렸을 피해자와 가해자의 생생한 증언이 남아 당시 참상을 우리에게 전한다. 특히 가해자인 기미즈카가 카메라를 앞에 두고 자신의 가해 경험을 고백한 긴 증언은 이 영화의 백미다.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한·일 시민들의 노력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첫 영화의 배경이 됐던 도쿄 아라카와 강변 학살 현장엔 2009년 일본 정부와 민중의 책임을 분명히 언급한 추도비가 건설됐고, 두번째 영화의 배경인 나라시노에선 무참하게 학살된 조선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6구가 발굴됐다. 이후 한국의 유족들이 곳곳에서 확인되는 중이다. 오 감독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지난해엔 제주도, 지난달엔 경남 함안을 방문했다.
그는 “한 희생자의 뒤엔 한 가족이 있다. 그런 사연들을 영화에 많이 담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감독은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이 어려운 것은 “가해의 주체가 일본군이나 경찰이 아닌 바로 일본 민중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지역사회의 무언의 압력은 지금도 이어지는 중이다.
“일본 사람들이 다시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시에 역사를 인식해야 해요. 그러나 그런 공동작업이 아직도 멀었습니다. 당시 학살에 민중이 직접 가담했다는 상처가 깊은 거죠.”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우연히 인기글에서 나라시노수용소를 보고
찾게 됐어...상영회도 했던데
너무 몰랐다...더 공부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