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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에 대해 확신이 든 순간이 있나요?”
“(오른쪽)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요. 남편이 한화이글스 팬이거든요.”
“사실 제가 어렸을 적에 집이 좀 많이 안 좋았어요.
집안이 기울다 보니까, 부모님께서 자주 부부싸움을 하셨어요.
그 때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처음 봤어요.
어린 저였지만, 그걸 보면서 든 생각이 하나 있었어요.”
“그게 뭐였나요?”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해요.”
“어머니 아버지와 헤어진 이후 줄곧 혼자 살아왔어요.”
“부모님의 결정에 대해 원망해본 적이 있나요?”
“원망하진 않아요. 엄마도 엄마의 삶이 있고 아빠도 아빠의 삶이 있는거니까요.
지금은 제가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이미 지나간 건 힘들지 않아요.
부정에서 긍정은 한순간이거든요.”
“1년 동안 취업준비하면서 계속 떨어졌어요.
이게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면접이 있었는데 그 날 합격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방에서 혼자 계속 울었어요. 너무 행복해서.”
“어떻게 면접에 합격하셨나요?”
“5명이 함께 보는 면접이었는데, 마지막이라고 다짐하고 들어가니
면접관님께 저도 모르게 말을 해버렸어요.
‘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어. 약주를 많이 드신 날이면 꼭 손찌검을 하셨거든.
그런 모습이 어릴 땐 얼마나 충격이야. 큰 상처가 됐지.
나중에 안 사실인데 우리 아버지는 부모님이 어릴 때 돌아가셨대.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 하고 자랐다나봐.
그런 아버지로서는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셨던 거지.
무조건 엄격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신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용서해 보려고 노력했지.
그런데 아무리 해도 내가 받았던 상처는 아물어지지 않더라고.
아마 아직도 나는 아버지를 온전히 용서 못한 것 같아.”
“몇 십년 전 어느 겨울이었어. 내가 택시에 손님 태우고 원효대교에서 남단으로 착 내려오는데,
그 엄청 추운 날에 한 사람이 다리에 쪼그려 앉아 있더라고.
그 사람을 지나치는 순간 눈이 딱 마주 쳤는데
굉장히… ‘나 좀 살려주세요’ 하는 처량한 그 눈빛 있잖아.
난 그때 손님도 있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없었어.
그때 전화를 해서 경찰에 거기 사람 있으니 구조해 달라고 지원요청 하면 되는데, 그걸 안 했어.
아마 딴사람이 하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거든.
지금도 그게 굉장히 마음에 좀 걸려. 그때 그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내 기억에 지금도 선하게 살아있어, 몇 십년이 지났는데도… 사람? 사람이란 그런거야.”
“내가 85세야. 전라도 남원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서울로 왔어.”
“특별히 기억나는 초등학교 제자가 있으세요?”
“예전엔 있었어. 근데 그 제자들이 하나 둘씩 죽었어.
그래서 기억하기가 좀 그래. 그거 만큼 슬픈 일이 없어.
나한텐 영원한 아이들이었거든.”
“사람들이 저한테 여기 청계천에서 뭐하냐고 자주 물어봐요. 분위기 좋은 데서 책 읽는 게 어색한 시대가 벌써 왔나요.”
“학교 때문에 서울로 처음 올라온 날이 기억이 나요.
아빠가 저를 데려다주고 가시는 길에 눈물을 보이시더라고요.
아마 떨어져 사는 게 처음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원래 애교도 없고 눈물도 없어서 그때는 ‘아빠 왜 울어’ 하고 그냥 보내 드렸는데
아빠가 내려가셔서 잘 도착했다고 전화하셨을 때는 저도 울컥하게 되더라고요.
그날 아빠가 우시는 거 처음 봤거든요.”
“우리 집 곰이랑 같이 놀러 나왔어요.”
“꼬마일 적에 아버지가 술과 게임에 빠져서 직장을 그만두셨어요.
그날 이후로 부모님이 싸우는 일이 잦아졌어요.
어머니는 혼자 살림을 책임지면서도 아버지한테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죠.
하루는 자는데 또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다툼이 끝난 뒤에 거실에 나갔는데 어머니가 혼자 TV를 보면서 울고 계셨어요.
그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 방에 들어가서 말했어요.
‘그만 좀 하셔라.’라고요.”
“무섭진 않았어요?”
“한 대 맞을수도 있을 것 같았죠.
그런데 다 크고나서 돌아보니 그때 아버지는 화가 나기 보단 충격을 받으셨을 것 같아요.
그때 저는 겨우 7살이었거든요.”
“그래도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어요. 결국 제가 초등학생때 이혼하셨죠.
요즘도 연락이 와요. 아주 가끔.”
“아버지를 용서하셨나요?”
“아니요. 그저 아버지는 원래 그런 분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을 뿐이에요. 사람은 원래 다 다르니까요.”
"연 날리는 장비가 뭔가 특별한데요?"
"20년 전부터 쓰던 건데, 난 이거 안 팔아.
북에서 나와 북경의 딸 집에 있을 때부터 쓰던 거야.
타지 생활이다보니 딸이 나가면 할 일이 없어 연을 배우게 됐어.
서울에 여동생하고 남동생이 있어서 왔는데, 앞으로 이 연과 같이 늙어 죽을꺼야."
“친구의 친구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는데, 저를 잘 이해해줘요. 벌써 43년이 됐네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어디 계신지도 몰라요.
그래서 쭉 부산에서 외할머니하고 같이 살았는데,
중학교 때 외할머니 건강이 안 좋아서 제가 스스로 독립하겠다고 말하고
그 이후로 서울에서 혼자 살았어요.
제가 나중에 성인이 된 다음에 타투를 직업으로 한다고 하니까 외할머니가 실망을 하셨어요.
그래서 외할머니를 직접 만나서 제가 처음 한 타투를 보여드렸더니 감동을 받으셨어요.”
“할머니가 왜 마음을 바꾸신 것 같아요?”
“제 첫 문신이 제 어머니의 얼굴이었거든요.”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그래서 그런 멋진 모자를 쓴 건가요?”
“아니요. 전 매일 이렇게 입어요.”
“출산하고 바로 처음 핏덩이인 딸을 보여줬을 때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실감이 잘 안 났죠. 그러다가 한 3~4일 뒤 처음 모유 수유를 해줄 때였는데,
잘 모르겠어요. 모유 수유 해주는데 그냥 울었어요.
‘내가 진짜 이제 엄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뭔가…….무슨 느낌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눈물이 나더라고요.”
“솔직히 서울 처음 딱 올라왔을 때가 제일 행복했던 거 같아요.
지방사람들은 알텐데, 들떠서 그냥 올라온 것 만으로도
서울에서 뭔가 막 이루어 낼것만 같고, 뭘 해도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죠.
근데 막상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고 현실을 경험해보니까
진짜 제가 되게 초라해지더라고요.
‘난 진짜 아무것도 아닌 그냥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가만히 있으면 우울해져서 저는 그냥 계속 움직여요.
계속 활동하다보면 그걸 좀 잊고 살 수 있으니까.”
“내가 죽기 전에 꼭 만났으면 쓰겄는데, 아직 못 만난 사람이 있어.
다른 사람들은 다 보이는데 그 놈은 안 보이네.
50년 전에,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노동일도 하고 별 거 다해먹었을 때 만난 애야.
나한테 ‘형님형님’하면서 따라다니길래 동생 같이 가깝게 지냈지.
어느날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서울에서 방 얻으라고 논 한 마지기 팔아서 돈을 부쳐줬거든.
돈 찾은 날, 시간이 늦었길래 여관에서 묵었지. 그 동생이랑.
근데, 아이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이놈아가 그 돈을 가져가 버렸어.
논 한 마지기면 얼만 줄 알아? 그게 지금 시세로 치면 1억은 가요, 지금.
그날 차비 한푼이 없어서 세검정에서 미아리 고개까지 걸어갔어.
그 놈 찾을라고. 땅바닥에서 잠까지 잤어요. 돈 한 푼이 없어서…”
“만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제 돈도 돌려달라고 못 그러잖어. 50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할거야.
때릴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고. 예쁘다고 내가 해줄라고.”
“예쁘다구요?”
“그래. 나를 참 사람 되게 하려고 니가 그랬구나… 너 잘 먹고 잘 살어.
이제 미워하는 것도 지쳐버렸고, 그 사람 얼굴이나 봤으면 좋겠어.”
“가장 슬펐던 때가 언제였나요?”
“전 사실 가장 슬펐던 떄와 행복한 때가 겹쳐 있어요. 제가 오토바이를 타다 교통사고가 나서 목뼈 1,2번이 아작 났어요. 병원에서는 죽거나 식물인간이 된다고 했죠.”
“그 후 어떻게 됐나요?”
“이렇게 살아있잖아요.”
“중풍이 들었어요. 말이 어눌하니까 대화할 사람도 없고, 혼자 살아요. 저한텐 얘네들이 내 가족이에요. 하나도 외롭지 않아요.”
“한국에서 살다보면 힘들지 않아요?”
“어려운 건 없어요. 한국인들과 함께 지내는 건 매우 수월한 걸요.”
“한국인과 사는 게 쉽다는 건가요?”
“그 누구와도 함께 사는 건 쉬운 일이에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사람들을 사랑하면 돼요.”
“내가 부업으로 노인대학에서 9년 동안 댄스강사를 했거든.
거기 학생들이 다 65세 이상이야.
사람이 65년 정도 살았으면 모든 걸 포용하고 배려할 것 같지?
절대 아니야. 자리 하나 두고 ‘선생님 잘 보이는 앞자리가 내 자린데 왜 당신이 왔냐’며 싸워.
유치원생들처럼… 사람의 껍데기는 틀림없이 나이를 먹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아.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건 단지 죽어가기만 하는 과정이어서는 안 돼.
거듭나야해. 더 좋은 사람으로.”
“가정집으로 출동을 나갔는데 갓난아기가 숨을 못 쉬고 있었어요.
부모님은 옆에서 통곡을 하고 계셨고요. 서둘러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어요.
아기여서 손가락 두 개로 조심스럽게 가슴을 눌러야 했죠.
그런데 아기 얼굴이 이미 퍼렇게 질려 있더라고요.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구급대원으로 6년을 일한 저인데도요.
꾹 참았어요. 저는 울면 안 되잖아요.”
“혹시 가족인가요?”
“(청년) 아니요. 아는 동네 꼬마들이에요.
제가 강아지하고 산책하다가, 이 아이들이 제 강아지가 예쁘다고 말을 걸어줬고
그 이후로 이렇게 가까운 친구가 됐어요.”
“(오른쪽 아이) 이 아저씨는 납치범 아니에요! 나쁜 사람 아니에요
“(가운데) 어른들이 초딩이라고 안 놀렸으면 좋겠어요.”
“(왼쪽) 맞아요. 게임할 때 초딩주제에 뭘 아냐고 막 욕해요.”
“(오른쪽) 막 일부러 시비거는 형들도 있어요. ‘초딩 새끼들’ 막 이러면서.”
“친구들은 중학교 올라가면 동생들 안 놀릴 수 있죠?”
“(왼쪽) 네. 신경도 안 쓸거예요.”
“(오른쪽) 그런데 요즘 유치원 애들 보면 너무 이상하긴 해요.
태권도 가면 유딩 애들도 있는데 막 저희한테 엄청 버릇없이 굴고 그래요.
교육이 좀 잘못된 것 같아요.”
“70년을 살아오시면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조언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
“젊었을 때는 낭만이 있었지.
우체국 첫 근무 날 손님으로 왔던 아가씨를 아직도 기억해.
내 나이 또래였는데 인상이 남더라고.
조그마한 시골 동네여서 금방 알게 됐고, 만나게 됐어요.
하지만 서로 마음이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었지.
그 아가씨 부모님이 날 못 미더워하셨거든.
지금은 가끔 생각만 날 뿐이야.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서 나를 기억할지 안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분도 기억의 조각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어.
백발이 성성해진 지금도 그분을 한 번 보고 싶은 감정은 있어요.
손목 한 번 잡아본 적도 없는데 참 웃기지.”
“만약에 지금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할머니 다 됐네.’ 그 말 밖에 더 있어요?”
“올해 초에 어떤 남자랑 나란히 길을 걷는 꿈을 꿨어요.
취업준비로 힘들 때였는데, 저한테 괜찮냐고 묻는 거예요.
그 말에 괜찮다고 답했을 뿐인데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어요.
꿈에서 깨고 생각해보니 3년 전에 인턴 프로그램에서 같이 일했던 남자였죠.
궁금해져서 SNS에다가 이름을 쳐봤는데, 찾아지더라고요.
작은 문화예술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죠. 다짜고짜 메시지를 보냈어요.
‘저 기억하시나요. 오늘 꿈에 그쪽이 나와서 연락드려요.’라고요.
자기 공간에 놀러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갔죠.
‘진짜 찾아올 줄 몰랐다'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들었는데, 제가 나타났을 때 기분이 되게 이상했대요.
발바닥이 찌릿찌릿하다고 했었나. 저도 그랬어요.
같이 밥을 먹게 됐는데, 새우 머리를 남기길래 ‘머리 제가 먹어도 돼요?’이랬거든요.
그러곤 남자가 웃는 모습을 보는데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묘했어요. 그렇게 만나게 됐어요”
“신기하죠. 저도 그래요. 처음 알았을 때는 친하지도 않았고, 이후로는 연락도 한 번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그 사람과 계속 연결돼있었다는 기분이 들어요.
3년 전 인턴 프로그램을 같이 할 때 그 분이 제 마니또였어요.
선물로 ‘언니네이발관'의 CD를 받았었죠.
그리고 그 음악이 제게 남아 위로가 되어줬거든요. 그 순간부터 쭉.”
“그분과 곧 결혼해요.”
“꿈이 있을 때 행복했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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