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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부산광역시 동래구 동이름 유래

작성자하이마트로가요|작성시간21.01.02|조회수2,010 목록 댓글 9

 

 

 

 

동래구(東萊區)

 

삼한시대에는 변한 독로국의 유지이며 한때 거칠산국의 치소로서 신라에 병합되면서 거칠산군으로 되었다가,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할 때 ‘동래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래’(東萊)라 함은 ‘동쪽의 내산’(萊山)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의 약칭으로 풀이되고 있다.

 

 

 

 

 

 

낙민동(樂民洞)

 

-명칭에 관한 유래는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낙민동은 조선시대 남문동변동(南門東邊洞)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이곳은 동래부 수령이 민정을 살피려 나아가는 지역인데, 수령이 백성을 즐겁게 해준다는 뜻에서 낙민동 이라는 명칭으로 고쳤다고 한다.

 

 

 

 

 

 

명륜동(明倫洞)

 

-『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신향교동(新鄕校洞)이라 하였다.

-조선초기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 했는데 향교가 여러차례 자리를 옮겨 앉게 되자 구교동, 신교동이란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1906년 교동이 되었다가 그 교동이 구교동과 헛갈려 향교의 중심인 명륜당을 따서 1942년 명륜동이라 이름을 고쳤다.

 

 

 

 

 

 

명장동(鳴藏洞)

 

-유래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인근의 염창리(廉倉里)와 같이 명편(鳴鞭)을 간수했던 곳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명편은 옛날 의장(儀仗) 때 쓰는 기구의 하나로 이를 흔들어 소리를 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숙하게 하는 물건으로 일명 정편(靜鞭)이라고도 한다.

-동래부사는 동래 독진을 지휘하여 동래뿐만 아니라 인근의 양산·기장의 군사까지 지휘하였는데, 이때 사용하던 명편을 이곳에 간수케 하였다 하여 명장(鳴藏)이라 전한다.

 

 

 

 

 

 

복천동(福泉洞)

 

-동래읍성 안에는 우물이 6개가 된다고 하였고, 각면각리원근정도 (各面各里遠近程道)조에는 읍내면에 옥미정동(玉未井洞)·대정동(大井洞) ·야정동(野井洞) 등의

우물과 관련된 이름이 있다. 이로 보아 복천동을 동래성안의 우물에 비유하는 뜻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우물은 양반댁에서나 볼 수 있으므로 우물이 있다는 것은 복이 넘치는 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뜻에서 옥샘(玉井)은 물의 맛이 좋기로 소문난 우물이었으므로 복천동은 이러한 것에서 붙여져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사직동(社稷洞)

 

-17세기부터 동래부의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다.

-사직의 사(社)는 토신이고, 직(稷)은 곡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임금을 비롯한 지방 수령이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 제사를 올려 나라와 지방의 풍요와 안녕을 빌었다.

-일제시대 석사리(石寺里)라는 이름은 석사(石社)로 바뀌었다.

-1916년 이곳에 있는 사직단의 이름을 따서 사직동으로 불리었다.

 

 

 

 

 

 

수안동(壽安洞)

 

-명칭에 대한 유래는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수안동 동래 토박이들에 의해 수안(首安)·수안(水安)으로 쓰여지고 있다.

-수안(首安)이라고 한 것은 동래부의 수장이던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어 가장 으뜸 되는 관아 안이라는 뜻에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안(水安)동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땅 밑을 조금만 파내려 가면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해 칭해진 이름인 것으로 풀이된다.

 

 

 

 

 

 

안락동(安樂洞)

 

-동래부 읍내면 동부에 속했던 효현리(狐峴里)·충렬사리(忠烈祠里)·안락리(安樂里)· 염창리(廉倉里)·구향교동(舊鄕校洞) 등을 포함하는 민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충렬사리와 안락리는 서원마을로 바뀌어 호현(狐峴)·화현(華峴) 등 4개 마을을 합해 원리(院里)라 하였다.

-원리란 서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부산지방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 부사, 정발 장군 등을 모신 안락서원(安樂書院)이 마을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충렬사는 사당만이 지어져 사액을 받은 것인데 뒤에 송상현공, 정발장군 등 학덕을 본 받을 만 하다하여 소줄당(昭茁堂)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음으로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충렬사란 사당에 학교기능을 가진 소줄당이 더해짐으로써 서원이 되자 마을 이름도 원리로 바뀌었다.

-1942년 서원의 명칭인 안락을 따서 안락정(安樂町)이 되었다가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칭으로 안락동이 되었다.

 

 

 

 

 

 

온천동(溫泉洞)

 

-온정원(溫井院)이라는 원(院 : 국가의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관리를 위해 역과 역사이에 설치하였던 관용의 여관)이 있었을 뿐 다른 마을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시대 동래부에서 온천시설을 갖춘 바도 있었지만 대중성이나 영리성을 띄지 못했다.

-동래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 이후 일본인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영리를 목적으로 한 온천시설 확장과 여관 등 위락시설이 본격적으로 갖추어지면서부터다.

-1910년 산저리와 장전리 일부를 합하여 온천리(溫泉里)라는 행정단위의 동리명이 생기게 되었다.

 

 

 

 

 

 

칠산동(漆山洞)

 

-삼국시대 동래지역에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존재.

-거칠산은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침 뫼" 즉 황령산(荒嶺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되어진다.

-삼한시대 소국의 치소(治所)가 동래지역으로 옮겨질 때 주산(主山)의 이름을 칠산(漆山)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과 오늘날의 동래읍성이 있는 뒷산을 칠산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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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시 호다닥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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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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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우댜댜 | 작성시간 21.01.02 오.... 흥미돋이다
  • 작성자내가만만한거니니가한심한거니 | 작성시간 21.01.02
  • 작성자11시 전에 취침 | 작성시간 21.01.02 옛 부산이 어땠는지 대충 알것 같아
  • 작성자내눈에콩깍지 | 작성시간 21.01.02 동하!
  • 작성자뤼비통 | 작성시간 21.01.02 동래구 진짜 쪼꼬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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