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서구(達西區)
대구의 옛 지명이 '달구벌'이다.
달서구는 '달구벌의 서쪽에 위치한 구-지역'이라는 뜻에서
"달서구"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達句伐(달구벌) - 넓은 평야, 큰 마을(부락), 큰 성)
갈산동(葛山洞)
-뒷산에 칡나무가 많아 `칡뫼'로 불리어 졌는데, 칡뫼가 갈뫼로 다시 갈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감삼동(甘三洞)
-썰1:『경상도읍지』에는 ‘감삼못’이 달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당못보다도 규모가 더 큰 못이었던 감삼못은 감삼동의 지명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못으로 전해지며, ‘우물제’라고도 불렸던 감삼못은 현 달성고등학교 일대에 있었으나 1970년대 중반 개발로 인하여 없어졌다.)
-썰2: 약 300년 전 어느 날 원님이 이 지역을 지나가다가 시등(柿登, 현 감삼동 69-1번지 일대)에 있는 감나무에 달린 붉은 감을 보고 그 탐스러움을 감탄하였다.
이에 마을에서 인사차 나온 대표가 감을 원님께 대접하면서 마을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감이 매우 달고 맛이 있어 세 개나 먹었으니 ‘감삼동’으로 지어 부르게 했다는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대곡동(大谷洞)
-본래 한실이라 불리어 졌는데, ‘한실’이란 큰골, 즉 골이 깊고 크다는 뜻이다.
-‘한’의 뜻은 크다 또는 넓다 로, 한자로 표기하면 大이고, ‘실’의 뜻은 고을 마을이란 뜻으로 한자의 谷이다.
즉 한실은 큰 마을이라는 뜻이므로 한자로 표기하여 대곡이 되었다.
도원동(桃源洞)
-골이 매우 깊고 그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다고 하여 ‘도원골’ 또는 ‘도원리’라 하였다고 한다.
-냇가에 복숭아 잎과 꽃이 떠내려 와서 따라 올라가니 복숭아나무가 많이 있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복숭아 도(桃)자를 따서 ‘도원동’이라고도 한다.
두류동(頭流洞)
-둥글게 펼쳐진 산의 형세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 산이 둥글게 펼쳐져 있다고 묘사하여, ‘두리산’으로 불렀다는 이야기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1918년에 제작된 『조선지형도』에도 두류산(頭流山)으로 표시되어 그 유래를 뒷받침하고 있다.
본동(本洞)
-조선 중기 이후 대구의 방리로 존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매자동과 취령동, 구암리를 합하여 송현동이라 하였다.
-1987년 본리동 일부를 남구 본동으로 법정동을 신설
-1988년 달서구를 신설할 때 본동을 편입
-1990년 달서구 송현2동을 송현2동과 본동으로 분동
본리동(本里洞)
-원래 대구부 감물천면(甘勿川面) 지역
-옛날에는 작촌(鵲村)이라 불려졌다.(까치 작)
-지금부터 150여년 전 현재 본리초등학교가 있는 주변에 까치가 많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감천리(甘川里)와 작촌동(鵲村洞)을 합하여 본리동이라 하였다.
-1988년에는 신설된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상인동(上仁洞)
-이 지역에 있는 상인산의 이름을 따서 상인리라 하였다.
성당동(聖堂洞)
-본래 상댕이 또는 성댕이라고 불렸다.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 불렸는데 이 지역의 산 모습이 못을 중심으로 하여 용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길지(吉地)의 의미를 지닌 성당으로 불렀다.
또 하나의 설로는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고 하여 성당동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이 성당은 일제시대때 만들어진 것으로 현 대성사 위쪽(두류산 서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대구지역 독립운동 장소로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의하여 강제 철거, 폐쇄되었으며
1960년 두류산 공원 개발로 순환도로가 개설될때 까지 그 터와 사택이었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송현동(松峴洞)
-이 지역에 솔고개[松峴]가 있었기 때문에,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신당동(新塘洞)
-신당지(新塘池)라는 못에서 이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용산동(龍山洞)
-용산동은 와룡산 밑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용산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월성동(月城洞)
-본래 대구부 조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일리와 광수동을 합하여 조암의 위쪽이 되므로 상동(上洞)이라 하여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 되었다가 1957년 대구시에 편입되었는데, 대구시 수성구의 상동과 이름이 같아서 새 이름을 지었다.
이 때 월배면과 달성의 이름을 따서 ‘월성동’이라 하였다.
월암동(月岩洞)
-조선시대 대구부 조암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에 달성군 월배면에 속하였다가 1957년에 대구시에 편입되면서 기존의 명칭과 혼동을 피하여
월배와 조암의 이름을 따서 월암동이라 하였다.
유천동(流川洞)
-말 그대로 흐르는 내라는 뜻이다. (흐를 유, 내 천)
-비슬산 동북단에서 시작되어 월배면의 도원동의 상류로 구라동과 유천동 사이를 흐르는 내로서 연장이 11km나 되는데, 이 하천의 이름을 따서 동네이름을 유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곡동(梨谷洞)
-와룡산 밑자락에 있는 마을에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배골[梨谷] 또는 배실이라고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곡동으로 하였다.
장동(壯洞)
-본래 장골이라 하였다.
장기동(長基洞)
-400여 년 전, 구씨(具氏)와 장씨(張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구씨, 장씨의 터라하여 구장터라 불렀다고 하며,
그 후 100여 년 뒤 구씨는 대부분 떠나고 장씨가 마을을 이끌어 왔다고 하여 구자(具字)가 빠지고 장씨 터라는 뜻의 장기(張基)로 불려졌다.
죽전동(竹田洞)
-원래 이 지역에는 대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예전 50가구 정도의 주민이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부업으로 대나무 갈퀴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이들이 만든 대나무 갈퀴는 서문시장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렇게 대나무 갈퀴를 많이 생산하는 곳이라 하여 ‘죽전(竹田)’이라 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도시개발이 이루어지기 전 1970년 만해도 이 마을에 큰 대밭이 있었고, 그 옛날에도 마을 안 빈 집터에 대나무밭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진천동(辰泉洞)
-옛날 진천동에는 4개의 자연촌락인 오복촌, 새악단(새각단), 송정동, 용천동이 있었는데, 용천동의 순우리말 표현인 ‘미리샘’을 한자로 변용하면서
‘용 진(辰)’과 ‘샘 천(泉)’을 사용하여 ‘진천’으로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파호동(巴湖洞)
-1270년 경 한씨(韓氏), 박씨(朴氏)가 이곳을 개척하여 범어, 강창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창 일부를 파산, 파호로 분리되어 파산(巴山)의 파(巴)와 인근을 흐르는 금호강(琴湖江)의 호(湖)를 따서 '파호동(巴湖洞)'이라고 불렀다.
호림동(狐林洞)
-들 한복판에 숲이 홀로 우거져있다하여 홀림(笏林)으로 불리다가, 여우 전설이 있는 동네라 하여 여우 호(狐)를 써서 호림동으로 개칭되었다.
호산동(虎山洞)
-1270년 경 한씨(韓氏), 박씨(朴氏)가 이곳을 개척하여 범어, 강창이라 불렀다.
- 그 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창을 파산, 파호로 분리시켰다.
-파산동의 옛 이름은 머무동또는 머무강창이라고 하는데, 머무동은 금호강으로 올라오던 소금배가 머무는 동네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파산동은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지은 동명인데(파호동도 마찬가지) 파산동과 파호동 사이의 돌무덤에서 많은 뱀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파산'이라는 발음이 기업인들이 꺼리는 단어인 '파산(破産)'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2005년 4월에 동명을 호산동으로 변경하였다.
http://www.dalseo.daegu.kr/pages/executive/page.html?mc=1482
아니 동이 왜이렇게 많아 왜이렇게 난이제지쳤어요..
문제시 호다닥 수정~!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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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고구마맛탕. 작성시간 21.01.02 오...흥미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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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토마도재배자 작성시간 21.01.02 오 ㅠ 내 고향 상인동 송현동 ㅠㅠ 상인동은 은근 심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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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뭘보노? 보노보노가 작성시간 21.01.02 순우리말 지명 전부 한자어로바뀐게 일제강점기땐가? 순우리말이엿음 더좋앗을거같기도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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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인생제5회차 작성시간 21.01.02 우리집 유천동... 저 강..? 때문에 여름에 모기 미친듯이많았는데 이제 수질개선되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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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재와삐 작성시간 21.01.02 나 도원동에서 태어났는데 ㅠㅠㅠㅠ 도원초에서 4학년까지 다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