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南區)
-바다를 향해 남쪽으로 튀어나온 반도형상을 하고 있다.
감만동(戡蠻洞)
-바닷가에는 감만포가 있어 조선초기에 수군진영을 두었다.
-감만포란 포구의 이름은 그때 수군이 주둔하면서 오랑캐에 이긴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감만이라고 기록되기도 했는데 이(夷)자도 오랑캐란 뜻과 벤다 또는 친다는 뜻을 가졌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이곳으로 유인해 전멸시켜 감만(오랑캐에 이기다)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나 '감만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그 이름이 있었다.
-일본인이 말하는 '가마'란 일본말의 '감'인 우리말의 '두꺼비'로 말했으니 해괴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감만동은 수군진영에서 오랑캐를 쳐서 이긴다는 뜻으로 따온 이름이다.
대연동(大淵洞)
-옛날에는 못골이라 했다. 못이 있는 골짜기란 뜻이었다.
-그 못은 아주 커서 마을의 이름을 지을 때 큰못이란 뜻으로 큰 대(大), 못 연(淵)이 된 것이다.
문현동(門峴洞)
-옛 이름은 찌께골이라 한다.
-찌께골은 지게골에서 온말로서 지게는 마루나 바깥에서 방으로 드나드는 곳에 문종이로 안팎을 두껍게 싸서 바른 외짝문이라는 뜻이다.
-지형이 양쪽으로 산에 의해 에워싸여 있어 마치 집안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기 때문에 옛날부터 찌께골로 불리어 왔다.
-문고개라는 상당히 높은 고개가 있었는데, 조선후기 문안동네에 영산신씨가 먼저 들어와 살았고, 그후 문밖동네에 몇집이 생기게 되어 이 두 마을에 사람이 왕래할 때에는 이 고개가 문의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문고랑 명칭이 붙었다 한다.
-그래서 한자로 門(문 문), 峴(고개 현)
우암동(牛岩洞)
-옛부터 천연의 포구로 배가 정박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한다.
-이 포구안의 언덕에는 하나의 큰 바위가 있어 그 모양이 소모양과 같다하여 이곳 포구를 우암포라 하고 동리명을 우암이라 불렀다 한다.
-일제시대 때 바다의 매축을 위해 산을 굴착하였는데, 이때 소모양의 바위가 없어졌다 한다.(ㅠㅠ)
용당동(龍塘洞)
-신라시대 때 남해신(南海神)에 제사하는 중사(中祀,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가 행하여진 형변부곡(兄邊部曲)의 위치로 추정된다.
-지금의 상하 용당리의 중간에 옛날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을 둘러싼 부근 산세가 용의 모양과 같다하여 이 못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마산이 용이었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용호동(龍湖洞)
-용호동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쓰게된 것은 일제시대부터이다.
-장산봉 아래에 호수같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하늘을 오르지 못한 용이 이무기(깡철이)가 되어 있었다고 해서 용호동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인가는 거의 없었고, 소금을 굽는 동이만 여기저기 있어 동이 있는 갯가라는 뜻에서 분개(盆浦)라 불려졌다 한다.
문제시 호다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