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amu.wiki/w/소신공양
https://m.youtube.com/watch?v=E37cMtCrKoA&lact=2&itct=CCMQpDAYACITCL3V3fm_z-ICFXTETAId7_UPiTIGc2VhcmNoUhRidWRkaGlzdCBtb25rIC0gc2VsZg%3D%3D&csn=8jf2XObOOYWGgAOxr4eYDg&has_verified=1&lact=467&itct=IhMI672a_L_P4gIVDm2LCh3fEAXy&bpctr=1559641859
예전에도 홍콩방에 이걸로 글 올린적있는데 다시 보니까 영상도 안나오고 사진도 안나와서 ㅠㅠ 삭제하고 다시 올려봐
소신공양은 분신자살을 종교로 미화한다는 비판이 있긴하지만 대부분이 독재나 불의에 항거하기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분들이기 때문에 자살로는 설명할수없는 어떤 고귀한 희생같이 느껴지기도함 ㅠㅠ 불에타는 고통도 이겨내는 열반에 도달한다는 것이 대단한거같음
소신공양전엔 대부분 몇달을 음식을 거의 먹지않고 속을 비운다음에 한대 거기다가 휘발유를 뿌리고 먹기까지한다함
그래야 더 잘 타오를수 있다고....
<소신공양 사례들>
김동리의 등신불
사실 한국에서 소신공양이 유명해진 이유는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등신불은 소신공양을 하다 남은 육체에 금물을 부어 불상을 만들었다. 다만 여기서 등장하는 만적이 죄사함을 받기 위해 소신공양을 하는 것과 달리 일반적인 불교에서의 소신공양은 고승이 순수하게 자신의 몸을 공양하는 행위이다. 원칙적으로 소신공양을 한다고 죄를 사해주는 게 결코 아니다. 공양은 무언가를 노골적으로 바라고 해야하는 행위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공양함으로서 보시의 끝을 표현하고자 할 때 할 수'도' 있는 행위이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가을 마지막 장면에서 노승이 소신공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닫을 관 자가 쓰인 종이에 물을 발라 눈, 코, 귀, 입을 모두 봉하고 배 위에서 스스로를 불태운다.
틱광둑의 소신공양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이 불교 탄압 정책과 독재 정치를 펴기 시작했고 친인척들이 대규모로 비리를 저지르면서 남베트남의 형세가 다시 막장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교 탄압 정책에 맞서서 저항하던 승려들을 무차별 진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틱꽝득은 이에 맞서서 소신공양을 하기로 결심했고 1963년 6월 11일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시위가 있었던 당시에 틱꽝득 스님이 주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서 사이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소신공양을 감행하였다.
정권에 저항한 분신자살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끝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틱꽝득의 행동은 종교적인 열망을 기반으로 했기에 가능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 최고 순위가 작열통(몸이 불에 탈 때 느끼는 고통)인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견딘다는 사실은 인간을 초월한 인내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다. 문지방에 발가락 끝을 부딪혔을 때에도 저절로 비명이 나오고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온몸이 지글지글 불타고 있는 상태에서 신음 한 번을 내지 않고 얼굴을 태연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신공양을 감행하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해야 하며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동영상을 보면 소신공양 중에 불길이 거세지자 쓰러질 듯이 앞으로 기울어졌지만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고 다시 가부좌 자세로 정좌하며 결국은 뒤로 쓰러진다. 이건 정말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낳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근육은 구부리는 근육이 펴는 근육보다 많기 때문에 소사체는 근육들이 수축해서 자연스레 안으로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표현조차 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어마어마한 의지로 최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펴고 열반했다. 이 엄청난 광경에 경찰들도 넋을 잃고 멍하게 서서 스님을 바라보았고 주위의 승려들은 틱꽝득에게 일제히 절을 올렸다.
소신공양이 끝난 후 그의 법체는 다시 한번 소각로에 넣어져 8시간 동안 화장(火葬) 되지만 그의 심장은 전혀 타지 않았다고 하며 이후 남베트남 정부에서 파견된 비밀경찰이 황산을 뿌려 훼손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며 금속 용기에 구리줄로 봉인하여 스웨덴 은행에 맡겨졌다가 이후 하노이 국립 은행에서 소장 중이라고 한다.
영상주의
태고종 충담스님
1998년 6월 27일 새벽, 경기도 가평군의 감로사 근처에 손수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가부좌를 틀고 불을 붙여 소신공양하였다. 불자로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알려진' 최초 소신공양. 분단된 국토의 통일과 사회의 안녕, 헐벗음과 괴로움이 없어지며 종단이 화합해 불국토가 앞당겨지길 기원한다는 내용의 열반송을 남겼다. 세수 85세, 법랍 69세.
조계종 문수스님
2010년 5월 31일,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사직리 위천잠수교 앞 하천 둔치에서 유서를 남기고 소신공양하였다. 향년 47세. 유서 내용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하라,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이 긴급 기자회견 및 조계사 경내에 31일 밤부터 분향소를 설치하고 조문객을 받았으며,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의장 퇴휴 스님과 불교환경연대 집행위원장 현각 스님이 현장에 급파되었다.
평소 스님이 기거하던 선방의 세간은 텔레비전 1대, 서랍장 하나가 전부였고, 식사도 하루에 1끼만 먹을 정도로 수행에 정진해 온 상태였다. 방 한 귀퉁이엔 50cm 높이 2덩이로 스님이 보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문이 쌓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회의식이 매우 깊었으며, 평소 동료 승려와도 4대강 관련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각운스님에 따르면, 문수스님은 휘발유를 온 몸에 부었을 뿐만 아니라 반말 가까이 마신 상태에서 ‘소신공양’을 했다. 그 이유는 몸속까지 순식간에 타 들어가며 한 순간에 입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운스님은 “문수스님이 즉흥적으로 고민해서 (소신공양을) 한 것이 아니”라며 “일종식(1일1식)을 하면서 속을 비우고 살을 다 빼면서 치밀하게 준비한 듯 하다”고 말했다. 각운스님은 또 “경찰도 사람 몸속의 내장까지 다 타들어 간 경우는 처음”이라며 “도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놀라워했다”고 전했다.
각운스님은 이어 “마지막까지 가부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듯하다”며 “손을 부처님 모습처럼 올리고 자세를 가지런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각운스님은 “문수스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고 전했다.
사진주의
정원스님
정원스님은 박근혜 퇴진 11차 촛불집회가 열린 7일 밤 서울 종로구 경복궁 맞은편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성 액체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정원스님이 분신한 자리에는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나의 죽음이 어떤 집단의 이익이 아닌 민중의 승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우주의 원소로 돌아가니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라”, "경찰은 내란 사범 박근혜를 체포하라. 경찰의 공권력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박근혜는 내란 사범, 한일 협정 매국질 즉각 손떼고 물러나라” 등의 문구가 적힌 스케치북이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