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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60년대 상류층 자녀들의 연애소설로 유명한 작품 <젊은 느티나무>

작성자회색|작성시간21.04.29|조회수4,592 목록 댓글 29


ㅊㅊ 더쿠 https://theqoo.net/1192563013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이샤쓰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집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 나간다―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뭘해?]

하고, 한 마디를 던져 놓고는 그는 으레 눈을 좀더 커다랗게 뜨면서 내 얼굴을 건너다본다. 그 눈동자는 내 표정을 살피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보다도, 나에게 쾌활하게 웃고 떠들라고 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어쩌면 단순히 그 자신의 명랑한 기분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느 편일까? 나는 나의 슬픔과 괴롬과 있는 대로의 지혜를 일점에 응집시켜 이 순간 그의 눈 속을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인제 오우?]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가 원한 듯이 아주 쾌활한 어투로, 이 경우에 어색하게 군다는 것이 얼마만한 추태인가를 나는 알고 있다. 내 목소리를 듣고는 그도 무언지 마음 놓였다는 듯이,

[응, 고단해 죽겠어. 뭐 먹을 거 좀 안 줄래?]

두 다리를 쭈욱 뻗고 기지개를 켜면서 대답을 한다.

[에에, 성화라니깐, 영작 숙제가 막 멋지게 씌어져 나가는 판인데------]

나는 그렇게 투덜거려 보이면서 책상 앞에서 물러난다.

[어디 구경 좀 해. 여류 작가가 될 가망이 있는가 없는가 보아줄께.]

그는 손을 내밀며 몸까지 앞으로 썩하니 기울인다.

[어머나, 싫어!]

나는 노우트를 다른 책들 밑에다 잘 감추어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냉장고 문을 연다. 뽀오얗게 얼음이 내뿜은 코카콜라와 크랙커, 치이즈 따위를 쟁반에 집어 얹으면서 내 가슴은 비밀스런 즐거움으로 높다랗게 고동치기 시작한다. 그는 왜 늘 내 방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할까? 언제나 냉장고 앞을 그냥 지나 버리고는 나에게 와서 달라고 조른다.
어떤 게으름뱅이라도 냉장고 문을 못 열 까닭은 없고, 또 누구를 시키는 것이 좋겠다면 부엌 사람들께 한마디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쟁반을 들고 돌아와 보면 그는 창 밖의 덩굴장미께로 시선을 던지고 옆얼굴을 보이며 앉아 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가 곁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조용히 가라앉은 눈초리를 하고 있다. 까무레한 피부와 꽤 센 윤곽을 가진 그의 얼굴을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나는 참 좋아진다. 나에게는 보이려 하지 않는, 혼자만의 표정도 무언지 가슴에 와 부딪는다.
그의 머리통은 아폴로의 그것처럼 모양이 좋다. 아주 조금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몇 올 앞이마에 드리워 있다.

[고수머리는 사납다던데.]

언젠가 그렇게 말하였더니,

[아니, 그렇지 않아. 숙희, 정말 그렇지 않아.]

하고, 그는 진심으로 변명을 하려 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농담을 하였을 뿐이었는데 오늘도 그는 그렇게 내 방에서 쉬고 나더니,

[정구 칠까?]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아니, 참 내일부터 중간 시험이라구 하쟎았든가?]

[괜찮아. 그까짓 거------.]

사실 시험이고 무엇이고 없었다. 나는 옷 서랍을 덜컹거리며 흰 쇼오츠와 곤색 샤쓰를 끄집어내었다.

[괜히 낙제하려구.]

하면서도 그는 이내 라킷을 가지러 방을 나갔다. 햇볕은 따가왔으나 나뭇잎들의 싱싱한 초록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곤 한다. 우리는 뒷산 밑 담장께로 걸어갔다. 낡은 돌담의 좀 허수룩한 귀퉁이를 타고 넘어서 옆집 코오트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중략)

물리학 전공의 그는 상당히 공부에도 몰리고 있는 눈치였으나 운동을 싫어하는 샌님도 아니었다.

테니스를 나는 여기 오기 전에도 하고 있었지만 기술이 부쩍 는 것은 대부분 그의 덕분이다. 그가 내 시골 학교의 코우치보다도 더 훌륭한 솜씨를 갖고 있음을 알았을 때의 나의 만족이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머리가 둔한 사람이 나는 도저히 좋아질 수 없지만 또 운동을 전연 모른다는 사람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스포오츠는 삶의 기쁨을 단적으로 맛보여 준다. 공을 따라 이리저리 뛰면서 들이마시는 공기의 감미함이란 아무것에도 비할 수 없다.

나는 오늘 도무지 컨디션이 좋지가 못하였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때면 엉망진창인 대로, 또 턱없이 좋으면 좋은 그대로 적당히 이끌고 나가 주는 그의 솜씨가 적이 믿음직해질 따름이었다.

[와아, 참 안된다. 퇴보일로인가봐.]

[괜찮아. 아주 더워지기 전에 지수랑 불러서 한번 시합을 할까?]

하늘이 리라빛으로 물들 무렵 우리는 뽈들을 주어 들고 약수터께로 갔다. 바위틈으로 뿜어 나는 물은 이가 시리도록 차갑고 광물질적으로 쌉쓰름하다. 두 손으로 표주박을 만들어 떠내 가지고는 코를 틀어막고 마신다. 바위 위로 연두색 버들잎이 적이 우아하게 늘어지고, 빨간 꽃을 다닥다닥 붙인 이름 모를 나무도 한 그루 가지를 펼친 것으로 보아, 이런 마심새를 하라는 샘터는 아닌 모양 같지만 우리는 늘 그렇게 하여 왔다.

[약수라니 많이 마셔. 약의 효험이나 좀 볼지 아나?]
[멋 때매?]
[멋 때매는? 정구 좀 잘 치게 되나 보려구 그러지.]

그는 허리를 굽혀 표주박으로 물을 떴다. 그는 그것을 내 입가에 대어 주었다. 조용한,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보이는 일이 없는, 자기 혼자만의 얼굴의 하나인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조금만 마셨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머지를 천천히 자기가 마셨다. 그리고 표주박을 있던 자리에 도로 놓았으나 아주 짧은 사이 어떤 강한 감정의 움직임이 그 얼굴을 휘덮은 것 같았다. 그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나는 돌연 형언하기 어려운 혼란 속에 빠져들어 갔으나 한 가지의 뚜렷한 감각을 놓쳐 버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나는 라킷을 둘러메고 담장께로 걸어갔다.

<오빠.>

그는 나에게는 그런 명칭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빠.>

그것은 나에게 있어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 같은 어휘이다. 그 무리와 부조리에 얽힌 존재가 나다.

나는 키보다 높은 담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정원 안을 걸어갔다. 운동화를 벗어 들고 맨발로 걷는다. 까실까실하면서도 부드러운 잔디의 촉감이 신이나 양말을 신고 디딜 생각을 없이 한다.

[발바닥에 징을 박아 줄까? 어디든지 구두 안 신고 다니게 말야.]

그는 옆에 있는 때면 이런 소리를 한다.

[맨발로 물위를 걸으면 고향에 온 것 같아. 아니 내가 나 자신에게 돌아온 것 같은 그런 말이 드는 걸-----]

나는 중얼중얼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나 저녁 이맘때가 되면 별안간 거의 수습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엉클리곤 하므로 그 뒤로는 할멈처럼 입을 봉하고 아무런 대꾸도 하질 않는다.

시무룩해 가지고 테러스 앞에 오면 ― 그 안 넓은 방에 깔린 자색 양탄자, 이곳 저곳에 놓인 육중한 가구, 그 안에 깃들인 신비한 정적, 이런 것들을 넘겨다보면 ― 그리고 주위에 만발한 작약, 라일락의 향기, 짙어진 풀내가 한데 엉겨 뭉익한 이 속에 와서 서면 ― 나는 내 존재의 의미가 별안간 아프도록 뚜렷이 보랏빛 공기 속에 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내가 잠시 지녔던 유쾌함과 행복은 끝내 나의 것일 수는 없고, 그것은 그대로 실은 나의 슬픔과 괴로움이었다는 기묘한 도착(倒錯)을, 나는 어떻게도 처리할 길이 없다.

오누이------
동생------

이런 말은 내 맘속에 혐오와 공포를 자아낸다.

싫다.

확실히 내가 느껴 온 기쁨과 즐거움은 이런 범주내에서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무어라고 부르면 마땅할까.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재작년 늦겨울 새하얀 눈과 얼음에 뒤덮여서 서울의 집들이 마치 얼음 사탕처럼 반짝이던 날 므슈 리에게 손목을 끌리다시피 하며 이곳에 도착한 나에게 엄마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숙희의 오빠얘요. 인사를 해. 이름은 현규라고 하고.]

저 진보랏빛 양탄자 위에 서서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리과 대학의 수재란다. 우리 숙희두 시골서는 꽤 재원이라고들 하지만 서울 왔으니까 좀 어리벙벙할 테지. 사이좋게 해 줘요.]

엄마의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눈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열심히 청년의 큰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V네크의 다갈색 스웨터를 입고 그보다 엷은 빛깔의 샤쓰 깃을 내 보인 그는, 짙은 눈썹과 미간 언저리에 약간 위압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으나 큰 두 눈은 서늘해 보였고, 날카로움과 동시에 자신(自信)에서 오는 너그러움, 침착함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해 보였다. 전체의 윤곽이 단정하 면서도 억세고, 강렬한 성격의 사람일 것 같았다. 다만 턱과 목 언저리의 선이 부드럽고 델리킷하여 보였다.

<키도 어깨 폭도 표준형인 듯하고---- 흐응, 우선 수재 비슷해 보이기는 하는걸------>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채점을 하였다. 물론 겉 보매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만큼 나는 어리석은 계집애는 아니었지만.

내가 그의 눈을 쏘아보자, 그는 눈이 부신 사람 같은 표정을 하면서 입술 한쪽으로 조금 웃었다. 그것은 약간 겸연쩍은 것 같기도 하였지만, 혼자 고소* 하고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자기를 재어 보고 있는 내 맘속을 환히 들여다보는 때문일까? 그러자 나는 반대로 날카로운 관찰을 당하고 있는 듯한 긴장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단순한 태도로,

[참 잘 왔어요. 집이 이렇게 너무 쓸쓸해서 아주 좋지 못했는데------]

하고 한 손을 내밀어서 내 손을 잡았다. 나를 도무지 어린애로만 보았다는 증거일 게고 또 아마 엄마의 감정을 존중한 결과였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엄마의 얼굴에는 일순 안도와 만족의 표정이 물결처럼 퍼져 갔다. 나는 이 청년이 엄마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짐작하였다. 말하자면 그들 인공적(?) 모자 관계에 있어서는 항상 세심한 배려가 상호간에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다.

(중략)

현규와도 마찬가지다. 그와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순전한 타인이다. 스물 두 살의 남성이고 열 여덟 살의 계집아이라는 것이 진실의 전부이다. 왜 나는 이 밀을 대로 알아서는 안되는가?

나는 그를 영원히 아무에게도 주기 싫다. 그리고 나 자신을 다른 누구에게 바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를 비끄러매는 형식이 결코 <오누이>라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또 물론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같은 일을― 같은 즐거움일 수는 없으나 같은 이 괴로움을. 초저녁의 불투명한 검은 장막에 싸여 짙은 꽃향기가 흘러든다. 침대 위에 엎드려서 나는 마침내 느껴 울고 만다.


[숙희야, 나 이런 것 주웠는데------]

일요일 아침 아래층으로 내려가니까 소파에 앉아 있던 엄마가 손에 쥐었던 봉투 같은 것을 들어 보였다.

[뭔데?]

나는 가까이 갔다. 그리고 좀 겸연쩍어졌지만 하는 수 없이,

[어디서 주웠소, 이걸?]

하면서,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려고 하였다.

[잠깐------ 거기 좀 앉아 보아.]

엄마는 짐짓 긴장한 낯빛을 감추려고 하면서 앞의 소오파를 가리켰다. 나는 속으로 픽 하고 웃음이 나왔으나 잠자코 거기에 가 걸터앉았다.

지수는 K장관의 아들이다. 언덕 아래 만리 장성 같은 우스꽝한 담을 둘러친 저택에 살고 있다. 현규랑 함께 정구를 치는 동무이고 어느 의과 대학의 학생인데 큼직큼직하고 단순하게 생겨 있었다. 그러한 그가 걸맞지 않게 적이 섬세한 표현으로 나에게 러브레타를 써 보냈다고 해서 나는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마의 엄숙한 표정은 역시 약간 넌센스가 아닐 수 없었다.

[글쎄, 이게 어디서 났을까?]
[등나무 밑 걸상에서]
[오라, 참 게다 놨었군.]
[오오라, 참이 아니야. 숙희는 만사에 좀더 조심성이 있어야 해요. 운동을 하구 난 담에두 그게 뭐야? 라킷은 밤낮 오빠가 치워놓던데.]

흐흥 하고 나는 웃었다.

[편지 보낸 사람에게 첫째 미안한 일 아니야?]
[참 그래. 엄마 말이 옳아.]

그리고 나는 편지를 잡아채었다.

[귀중한 물건인가? 엄마 좀 읽어 봄 안되나?]
[읽어 봐두 괜찮아. 안되는 거라면 게다 놔둘까? 감추지.]

나는 조금 성가셔졌다.

[그럼 안심이군. 사실은 벌써 읽어 봤어.]
[아이, 엄마두.]
[그런데 엄마가 얘기하고 싶은 건 숙희가 자기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런 편지에 관한 거라든지 또 그 밖의 일들을, 혼자 처리하지 말고 그 요점만이라도 엄마한테 의논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런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야.]

듣고 있는 사이에 나는 점점 우울해져서 잠시라도 속히 이 자리에서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어졌다.

[엄마가 언제나 숙희 편에 서서 생각하리라는 건 알고 있겠지?]
[응.]

나는 선 대답을 해 놓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엄마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한다면 엄마는 어떤 모양으로 내 편에 서 줄까?


(중략)


지수는 나를 보고 좀 당황한 듯하였으나 이내 흰 이를 보이고 웃으면서 다가왔다.

[안녕하셨어요? 산봅니까?]
[네, 돌아가는 길이얘요.]

아이들은 우리를 새에 두고 떠들어대면서 잡기 내기를 한다. 지수는 한 아이를 붙들어 세터를 맨 줄을 들려주고는 어서 앞으로들 가라고 손짓하였다. 우리는 잠자코 한동안 함께 걸었다. 아카시아의 숲새 길에서 그는 앞을 향한 채 불쑥,

[편지 보아 주셨소?]

하고, 겸연쩍은 듯한 소리를 내었다.

[네.]

[회답은 안 주세요?]


나는,

[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했다. 그는 성급하게 고개를 끄떡거렸다. 귀가 좀 빨개진 것 같았다.

[그러나 여하간 제 의사를 알아주시긴 했겠죠?]

나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서 현규가 가까이 또 정구를 치자고 하더라는 말을 했다.

[네, 가죠.]

그도 단번에 기운을 회복하며 대답하였다. 그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의 휘파람을 들으며 집 가까이까지 왔다.

[오늘 대단히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조금 슬픈 어조로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내 어깨로 기어오르는 풀벌레를 떨구어 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그리구 연습 많이 하세요. 저희들 팀은 아주 세졌으니깐요.]

그는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 입술을 문 채 끄떡끄떡 하였다. 잡석을 접은 좁단 층계를 뛰어오르자, 나는 곧장 내 방으로 올라갔다. 지수가 하듯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어쨌건 기운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내 팔뚝이나 스커어트에는 아직도 풀과 이슬의 냄새가 묻어 있는 듯했다. 나는 기운차게 반쯤 열린 도어를 밀치고 들어선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현규가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내가 없을 때에 그렇게 들어오는 일이 없는 그라 해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몹시 화를 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맹렬한 기세에 나는 주춤한 채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어딜 갔다 왔어?]

낮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한다.

[편지를 거기 둔 건 나 읽으라는 친절인가?]

그는 한발 한발 다가와서, 내 얼굴이 그 가슴에 닿을 만큼 가까이 섰다.

[어디 갔다 왔어?]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죽어도 말을 할까 보냐고 생각했다.

별안간 그의 팔이 쳐 들리더니 내 뺨에서 찰깍 소리가 났다. 화끈하고 불이 일었다. 대번에 눈물이 빙글 돌았으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나는 멍청하니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연회색 샤쓰를 입은 지수가 숲새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전에 지수가 풀벌레를 털어 주던 자리도 손에 잡힐 듯이 내려다보였다.

전류 같은 것이 내 몸 속을 달렸다. 나는 깨달았다. 현규가 그처럼 자기를 잃은 까닭을. 부풀어오르는 기쁨으로 내 가슴은 금방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위에 몸으로 내 가슴은 금방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새우처럼 팔다리를 꼬부려 붙였다. 소리내며 흐르는 환희의 분류가 내 몸 속에서 조금도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중략)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밤에 우리는 어두운 숲 속을 산보하였다.
어두운 숲 속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안겨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진다. 여하간 나는 숲 속에 가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엄마가 기다린다고 안방으로 가라고 했다. 요즈음 인사도 않고 나가고 들어오던 나는 우선 가슴이 철꺽 내려앉았다.

[인제 오니? 그런데 얼굴이 파랗구나. 어디 나쁜 것 아닌가?]

엄마는 내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오빠는 밤늦어야 돌아오고 숙희도 이렇게 부르지 않음 보기 어렵고------]

엄마는 조금 웃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웃음 같았다.

[------편지가 왔는데 어쩌면 엄마가 미국에 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게 되면 일 년이나 아마 그쯤은 못 돌아올 것 같은데 숙희하고 오빠를 버리고 가기도 어렵고------그래 싫다고 몇 번이나 회답을 냈지만------]

엄마는 조금 외면을 하였다.

[어떨까? 오빠는 찬성을 해 주었는데.]

그러면서 내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좋아요.]


엄마가 없는 이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걸까? 현규와 단 둘이 있어야 할 일을 생각하니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었다. 아무도 막아낼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이, 이미 숲속에 가지 않는 것쯤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벅찬 일이 생기고야 말 것이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내 온 신경은 가엾은 상처처럼 어디를 조금만 건드려도 피를 흘렸다. 며칠이 지나니까 나는 더 견딜 수 없어졌다. 할머니한테 갔다 온다고 우겨대어서 서울을 떠났다.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다시는 학교에 다니지도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내 삶은 일단 여기서 끝막았다고 그렇게 생각을 가져야만 이 모든 일이 수습될 것 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러나 다른 무슨 일을 내 머리로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날이면 날마다 나는 뒷산에 올라갔다.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여승들의 절이 있다. 나는 절이라는 곳이 몹시 싫었으나 거기를 좀더 지나가면 맘에 드는 장소가 나타났다. 들장미의 덤불과 젊은 나무들의 초록이 바람을 바로 맞는 등성이였다. 바람을 받으면서 앉아 있곤 하였다. 젊은 느티나무의 그루 사이로 들장미의 엷은 훈향이 흩어지곤 하였다.
터어키즈블루의 원피이스 자락 위에 흰 꽃잎은 찬란한 하늘 밑에서 이내 색이 바래고 초라하게 말려들었다.

그리고 있다가 시선을 들었다. 다음 찰나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일어서 있었다.


현규였다.
그는 급한 비탈을 올라오고 있었다. 입을 일자로 다물고 언젠가처럼 화를 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일자로 다문 입은 좀 슬퍼 보여서 화를 낸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가 이삼 미터의 거리까지 와서 멈추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저절로 그 편으로 내달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젊은 느티나무 둥치를 붙든 것이었다.

[그래, 숙희, 그 나무를 놓지 말어. 놓지 말고 내 말을 들어.]

그는 자기도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말하였다. 그 얼굴에는 무언지 참담한 것이 있었다.

[숙희는 돌아와서 학교에 가야 해. 무엇이고 다 잊고 공부를 해야 해. 나도 그렇게 할 작정이니까. 우리는 헤어져 있어야 해. 헤어져서 공부해야 해. 어머니가 떠나시려면 비용도 들테니까 집은 남 빌려주자고 말씀드렸어. 내가 갈 곳도 생각해 놓고. 숙희도 어머니 친구 댁에 가 있으면 될 거야. 그렇게 헤어져 있어야 하지만, 숙희, 우리에겐 길이 없는 것은 아니야. 내 말을 알아 들어줄까?]

그는 두 발로 땅을 꾹 딛고 서서 말하였다. 나는 느티나무를 붙들고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때 숲속에서의 일은 우리에게는 어찌할 수도 없는 진실이었다. 우리는 이 일을 부정하고는 살아가지도 못할 게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서 헤어지는 것이야. 우리에겐 길이 없지 않어. 외국엘 가든지------]

그는 부르쥔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 말을 알어 줄까, 숙희?]

나는 눈물을 그득 담고 끄덕여 보였다. 내 살은 끝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집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겠지? 내일이건 모레건 되도록 속히------]

나는 또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 그럼.]

그는 억지로처럼 조금 미소하였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산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바람이 마주 불었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 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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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질병관리청장 | 작성시간 21.04.30 비누냄새
  • 작성자어딘가들어본듯한이멜로디 | 작성시간 21.04.30 우와
  • 작성자숑숑쑝 | 작성시간 21.05.01 읽어보고싶다..
  • 답댓글 작성자아이스웨엥 | 작성시간 21.05.02 여샤 이거 구글에 젊은 느티나무 txt 혹은 전문치면 쉽게 볼 수 있어! 내용도 긴 편 아니라 추천추첞ㅎㅎ
  • 답댓글 작성자아이스웨엥 | 작성시간 21.05.02 아이스웨엥 아 보니깐 저게 전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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