쇗이 광주 mbc에서 만든 518 기획다큐를 보고
연관동영상들을 하나씩 보고 있다오.
쌍코햇들과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 올리오.
아래로는 동영상을 보기 힘든 햇들을 위해 글로 간단히 정리해드리겠소.
(과연 간단할 것인가... 동영상에 나오지 않더라도 쇗이 아는 부분이 있으면 괄호로 추가하겠솨)
북한군이 개입했다거나 폭도들의 폭동이라는 극우세력의 518에 대한 폄훼 주장에 대해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분노하오.
그렇지만 정작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소.
그리고 그 때로 돌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은 무슨 의미를 갖는지 다시 돌아보려고 하는 것이오.
37년전 80년 5월 17일 오늘 광주 날씨는 쾌청했소 (날씨 맑음, 낮최고기온 20.9도)
그렇지만 도청주변의 공기는 매캐했소.
민주화를 요구하던 광주시민들이 사흘 연속 시위를 했고 마지막날인 5월 16일 횃불시위를 했기 때문이었소.
우리가 촛불을 들 때마다 광주는 지금 비슷한 제목으로 동사방에도 사진이 올라오는 바로 그 횃불시위라오.
(김상윤, 당시 33세 전남대 국문과 복학생이었고 도청 앞 횃불시위를 주도한 분이오
화면 뒤쪽으로 횃불을 든 당시 모습이 보이지라.)
이런 현장은 애들한테도 보여줘야 된다 하여
초등학생인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오거나
아이들을 목마 태우고 나온 시민이 많았고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고 하오.
3만명 넘는 인파가 매일같이 몰렸지만 집회는 평화로웠소.
(당시 광주 인구는 73만명 정도라오.)
경찰과의 충돌도 없었고 집회가 끝나면 스스로 뒷정리를 했소.
(이거 들을수록 완전 촛불 아니냐.. ㅜㅠ)
(광주에서 횃불시위를 하고 있던 이 즈음 서울에서는 서울역회군이 있었소. 심재철 XXX)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씨가 워낙 연설을 잘해 화제에 올랐다고 하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성회를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것이요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이분은 이번 문대통령님 기념사에서도 언급된 분이오.)
5월 17일은 토요일 오랜만에 집회가 없는 토요일이었소만
신군부는 자신들의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소.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모든 정치활동은 중지 언론은 사전검열 학교는 휴교조치 파업은 엄금되었소.
그리고 민주화운동 인사 3000명이 한밤중에 갑자기 불법 체포되었소.
불법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아는 사람들도 있소.
17일 자정 되기 직전에 체포되어 합수부로 끌려가 있었기 때문에
한 일주일동안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하오.
(이 때 우리 이니도 체포됐지라.. 옥중에서 사법시험 합격소식을 들었다는 바로 그 때라오.)
계엄령이 확대되면서 전국 주요시설이나 대학에는 공수부대, 특전사가 쫙 깔리게 되오.
전국 배치 계엄군 2만 3860명
광주 배치 계엄군 872명
광주에는 전남대, 조선대에 7공수가 투입됐소
계엄군 예비검속으로 광주 전남에서 8명 전남대 조선대 학생은 112명이 잡혀갔소
당시 전남대 자연대 학생회장이었던 윤목현씨는
골목에 차 네대로 막아서서 그대로 잡혀갔다고 증언하시오.
차에 실려 송정리 넘어가는 곳에 있었던 보안사 지하실로 끌려갔소.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이 때 탈출했소만 나중에 잡혀서
수감생활 중에 옥중 단식투쟁 끝에 돌아가셨소.
제일 똑똑한 사람이 죽었다고 많은 광주시민들이 아까워했지라.)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무고한 시민 165명이 숨지고 3000명이 넘게 다친 광주의 핏빛 오월은 그렇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소
그런데 왜 하필 광주였을까.
왜 하필 신군부는 광주에서 살인진압을 했을까.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오.
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소. 그날은 구름이 많았고 낮최고기온은 25.1도였구려.
일요일 오전 10시쯤 평소같으면 늦잠자고 일어날 시간이겠지만 전남대 앞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소.
학교를 장악한 계엄군과 학생 200명 정도가 전남대 정문 앞에서 투석전을 벌이게 되오.
계엄군은 도망가는 학생들도 끝까지 쫓아가 잡고 곤봉을 마구 휘두르오.
이성길 씨 (당시 24세 전남대 법대 학생회장)의 증언이오.
"2인 1조가 돼서 끝까지 추적을 한다니까? 그리고 잡아요.
또 잡는 과정이 잔인하잖아요. 곤봉으로 뚜드러 패고 발로 밟고 그리고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원래 전국적으로 학생들은 비상계엄이 확대되면 나와서 시위하기로 약속했다고 하오.
그런데 서울지방의 대학교 지도부들은 유시민햇처럼 예비검속으로 다 잡혀가버리게 되오..)
이 전과 달라도 너무 다른 공격적 진압에 놀란 학생과 시민들은
비상시에 도청으로 모이자는 약속대로 금남로로 몰려갔소. (오후 2시 ~ 4시)
그곳에서도 시민들을 막아선 건 경찰이 아닌 특전사들이었소.
쇗이 캡쳐는 한장밖에 안 해서 안보이오만 동영상을 보면 나오는데
화면 안에 있는 사람들 앞쪽 햇들이 보기 왼쪽으로
곤봉을 든 계엄군이 도열해 있는 상황이라오. ㄷㄷㄷ
진압방식은 잔인했소.
조양배씨 (당시 26세 동아일보 직원 광주 양동 천교에서 구타)의 증언이오.
"내 머리위로 뒤통수가 뻥! 하는 거예요
멍해갖고 있는데 이렇게 보니까 내 몸이 공중에 뜨는 거예요
언제 차가 왔는지 트럭에 이렇게 양쪽에 이렇게 계엄군들이 잡아서 끌어 올려가지고
바닥에 쓰러지니까 이새끼! 엎져!"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며 전국에 공수부대를 보냈지만 유독 광주에 집중되었소.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시위 규모는 수백명에 불과했지만
7공수에 이어 11공수 또 3공수 병력을 자꾸자꾸 보내오
18일 7공수 872명
19일 11공수 1056명
20일 3공수 1477명
21일 20사단 4946명
22일 전교사 11966명
27일 47개 대대 총 20317명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때 광주시민이 73만명이었소...)
이런 초강경 진압에도 광주시민들은 굴하지 않았소.
조정관씨 (당시 19세 연세대 정법대 1학년 18일 시위에 참여)의 증언이오.
"전두환 세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끈질기고 강하게 투쟁을 한거거든요 해방광주를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 5월 27일의 학살까지 도망가지 않고 싸워낸 어떤 불굴의 싸움이었어요"
시내는 쑥대밭이 되었소.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에 따르면 5월 18일 하루만 광주시민 405명이 검거되었소
그렇지만 시위대는 점점 늘어나 이날 밤 9시에는 2000명까지 늘어나게 되오.
1980년 5월 18일 공수부대는 전국을 장악하고 있었소. 광주에만 있던 건 아니었소.
하지만 이런 계엄군에 맞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곳은 전국에서 광주가 유일했소.
아마 이 점이 왜 518은 다른 지역이 아닌 광주에서 일어났느냐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이제 5월 19일로 넘어가오.
계엄군이 휘두르는 곤봉과 대검에 당시 금남로는 피로 얼룩지고 시민들은 공포에 질리게 되오.
이날은 밤부터 비가 왔소.(5.6mm) 낮최고기온은 22도였소.
한 시민이 쓰러져 있소.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었구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오.
아무 이유없이 계엄군의 곤봉에 맞았기 때문이었소.
이 분은 최병귀씨 (당시 31세 영화사 상영기사 5월 18일 가톨릭센터에서 부상당함)로 무사하셨고 증언해주시오.
"저도 이해가 안 가요. 그게.. 우리가... 나쁜 짓을 허고 그랬다믄 모르는데
아무것도 안 허고 그냥 바둑을 뒤고 있는데 뭣이 후다닥하길래
고개를 돌린 것밖에 생각이 안 나요.
방해를 한다하든가 싸움을 한다든가 그런것도 없이 느닷없이 맞어브니까 이건 정신이..."
진압은 하루전보다 더 잔인해졌소.
구타나 폭행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가 되었소.
달아나는 시민들은 끝까지 쫓아가 붙잡았소.
잡힌 사람들은 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었고 군홧발로 걷어찼으며
남녀할 것 없이 옷을 벗겼소.
박금옥씨 (당시 36세 양동시장 상인, 지금도 양동시장 상인)의 증언이오.
"우리 시민들이 보고 있쓰믄 열이 안 날 수 있가니?
나 그 때 여 뭐 거 저저 총에다 칼 꼽은 거 그 때 처음 봤네"
일반 곤봉보다 20센티미터 더 길게 깎은 곤봉은 주로 사람들의 머리를 노렸소.
M16 소총에 꽂은 대검으로 사람들을 마구 찔렀소.
안성례씨 (당시 43세 광주 기독병원 간호사 오월 어머니집 전 관장)의 증언이오.
"대검으로 예리하게 찔린.. 여기 그림에도 있지마는, 피가 팍팍 솟잖아 동맥이 이렇게 저기허니까
우리 옷에도 막 피가 솟으고 벽에도 막 그렇게 피가 솟구치고"
당시 경찰방침은 이러했소.
그렇지만 계엄군은 개의치 않았지라.
사단장마저 자제를 말했지만 특전사들은 듣지 않았소.
최영태 전남대 사학과 교수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사람 남침을 유도하는 사람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은 적이다. 계엄군은 그렇게 배웠어요. 보믄
따라서 시내에서 시위를 하는 대학생이나 시민이나 모두가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는 적, 빨갱이
그래서 그들은 곤봉을 휘두르면서 이 빨갱이들아 외치면서 했고"
최초희생자이신 김경철씨가 이날 새벽 광주 기독병원에서 숨지셨소.
전날 금남로에서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게 직접 사인이었소.
계엄군의 이 살인적 진압에 시민들은 처음엔 놀라고 두려워했소.
왜이렇게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냐며 답답해 하기도 했소
그렇지만 시민들의 이런 감정은 곧
불의를 저지른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분노로 발전하게 되오.
이제 5월 20일이 되었소.
518당시 신문과 방송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소. 오히려 시민들을 폭도로 몰았소.
이런 언론의 부재속에서 시민들은 유인물과 가두방송으로 신군부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소.
이날은 낮에 비가 왔기 때문에(12mm) 낮최고기온은 17.5도였소.
이 날 새벽 광주 문화방송 건물이 불탔소. kbs건물도 마찬가지였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는 방송에 대해 시민들이 분노했기 때문이었소.
항쟁기간 내내 시민을 폭도로 몰았던 언론들은 전두환 통치기간 내내 땡전뉴스로 전락했지라.
(보고 있자면 욕이 랩처럼 나오는 그당시 캐배쓰.
난동이란다 이 시밧들이)
보도통제 때문에 신문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소.
캡쳐에 보이는 건 전남매일 6월 2일자 신문이오
검열 때문에 다 삭제해야 하는 부분이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구려.
주인없는 구멍가게에 돈 놓고 물건 가져간 일 헌혈하려다 비명에 간 여학생을 보도하는 것마저 다 삭제되오
문순태씨 (당시 39세 전남매일 편집부국장) 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은 정간되오.
"광주에 살고 있는 기자로서 역사 앞에 가장 치욕적인 거고 큰 역사적 부채감을 갖고 있는게
그 기간동안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거죠"
시민들은 여기 사람이 죽어간다고 여기 군인들이 시민을 죽이고 있다고 미치도록 알리고 싶었지만
이를 전달할 방법이 없었소.
언론이 사라지고 나자 시민들 스스로 언론이 되오.
육필로 쓴 대자보 유인물등을 만들어서 뿌리고 가두방송으로 도청 앞 상황을 알리오.
(내용 한번 읽어보시구랴.. 고립된 이와중에 생활필수품 나눠쓰자는 이 착한 사람들...)
들불야학을 했던 강사들이 만들던 투사회보는 그런 대안언론 중에서도 가장 시민들의 신뢰를 받았소.
(잘 보이지 않아 읽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클릭하면 커질 것이오.)
전용호씨 (당시 23세 들불야학 강사 투사회보 제작팀장)의 증언이오.
"전날에 일어났던 큰 사건들하고 피해상황이라든지 계엄군 이동경로라든지
진상을 밖으로 알려야 되겠다 이런 취지에서 진행을 했는데
결국은 그것이 언론의 역할을 겸하게 되었지 않는가.."
(님을위한 행진곡이 들불야학 출신 두분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작곡된 것이라오.)
한편 이 날은 계엄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던 시민들이 전세를 역전시켰소.
계엄군의 만행을 보다못한 택시기사들이 택시와 버스를 동원하여 금남로로 행진을 시작했소.
장훈명 (당시 28세, 택시기사. 금남로 차량시위 주도.)의 증언이오.
"학생들 우리가 방패막이가 좀 돼주자 맨몸으로는 안되겄고
군대에서 장갑차 대형으로 차로 진형을 짜가지고 차로 밀자. 그 방법밖에 없다."
계엄군은 총을 사용하기 시작했소.
3공수, 11공수에는 밤 8시 실탄이 일제히 지급됐소.
밤 11시 광주역에서는 계엄군이 총을 난사해
시민 네 명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가 죽었고 수십명이 다쳤소.
금남로에는 십만명이 넘는 시민이 쏟아져나와 (광주시민은 73만명이었소.)
다음날 새벽까지 밤샘시위를 했소.
시민들은 애국가를 불렀고 태극기를 흔들었소.
박대현씨 (당시 28세, 대학중퇴 후 구직중. 차량시위 때 태극기 흔드는 그 당사자요)의 증언이오.
"그 때 그 정황이라면 정말로 젊은 사람 젊은 혈기라면 나처럼 하지 않았겠냐"
(분수대 앞에 조그맣게 서 있는 기자가 보이시오?
뒤쪽으로는 도청이 보이오 당시 계엄군이 그쪽에 있었고 기자의 앞쪽으로 시민들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던 거요)
계엄군의 학살에 떨쳐 일어난 광주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소.
삼천명이 넘는 무장 계엄군들이 앞에 있었지만 그보다 삼십배가 넘는 시민들이 뒤에 있었기에
이대로만 하면 밤샘시위에 계엄군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넘쳤소
다음날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소.
1980년 5월 21일 수요일 날씨 맑음 낮최고기온 26.1도
이날은 평일인 수요일이었지만 부처님 오신날이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시민들은 금남로로 나왔소.
어림잡아 십만명은 되는 시민들은 계엄군을 도청쪽으로 몰아내려 하고 있었소.
그 자리엔 까까머리 고교생 강용주 군도 있었소.
계엄군도 우리 국민인데 땡볕에서 고생한다며 물을 떠다주었소.
그 때는 오후 한시쯤이었소.
물을 떠다주고 돌아서자마자 애국가가 도청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더니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소.
지금은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을 맡고 계신 강용주씨의 증언이오.
"뭔 애국가 소리야 하고 쳐다봤죠 근데 애국가 소리가 멈추자 마자 총소리가 콩볶듯 나는 거예요
내가 물을 떠다 준 군인이 시민들을 향해서 발포했다는 거죠
그 군인에게 물을 떠다준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사격은 십분동안 계속되었소.
이 집단발포로 최소 서른명 이상이 숨지고 수백명이 총상을 당했다고 추정하오.
하지만 아직도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소.
1988년 청문회 때나 1996년 검찰 조사 때 이 문제를 밝혀내려 했지만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발뺌했소.
(청문회 때 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이제 우리 모두 알고 있지라...)
공식적으로는 발포명령을 한적이 없다고 증언하셨죠?
어느부대가 언제 어디에서 발포를 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젊은 쿨붱 오랜만이라 캡쳐해보았소.)
당시 계엄사령관인 이희성은
그와 같은 세부사항은 제가 파악할 수 없는 조그마한 말단부대 사건입니다.
라고 대답하오
(개소리 왈왈왈)
발포 현장에서 발포명령을 직접 확인한 기자가 있소.
"발포명령 어떻게 됐는가! 그 때 내가 분명히 들었거든
근데 그 참모 대위가 발포명령 어떻게 됐나 어떻게 됐나
그 때 통신병이 아직 안났습니다.
그런 순간에 내가 시계를 보니까 그 때가 열두시 반은 지났고
그리고 인자 십분 후에 통신병이 발포명령입니다 허니까
바로 그때.."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와 주변지역의 경찰서와 관공서 무기고를 탈취하오.
스스로 무장한 후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이름붙이오.
김공휴씨 (당시 21세, 나전칠기 공장직원, 21일부터 무장시민군 활동)
"맨손인 사람들한테 총을 쏘고 죽이는데 무기를 들지 않는다 하면 저들에게 다 개죽음을 당할 수 있겠다"
시민들의 무장저항에 맞닥뜨린 계엄군은 오후 5시 도청에서 철수하게 되오
이 때는 시외전화가 모두 끊긴 상태라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밖으로 알릴 수가 없었소.
광주는 고립무원이 되어가오.
이제 5월 22일이 되었소
이날은 구름이 많았고 낮최고기온은 28도였소.
계엄군이 물러간 해방광주의 첫 아침이었소.
그렇지만 도청앞 광장은 계엄군을 몰아냈다는 기쁨보다 가족을 잃은 슬픔이 가득했소.
도청 벽에 붙은 사망자 명단 앞을 사람들은 떠나지 못했소.
내 가족의 이름이 여기 있을까 하여.
가족의 시신을 확인한 유족들은 이성을 잃고 말았소..
(쇗이 차마 캡쳐하지 못했소. 넋을 놓은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울부짖는 목소리가 너무 아프오.)
(광주의 어머니라 불린 조아라여사의 말에 따르면 항쟁기간 동안 관이 부족했다고 하오... ㅜㅠ)
그렇지만 시민들은 다시 냉정을 찾기 시작했소.
518이전 민족민주성회 때처럼 다시 도청 앞에 모여앉았소.
할아버지도 아기안은 엄마도 보이는구려.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자고도 하고
고립무원의 상태이니 스스로 질서를 지키고 서로 돕자고도 하오.
김태종씨 (당시 24세, 전남대 국문과 4학년, 5.22-26 시민궐기대회 사회자)의 증언이오.
"담배는 한보루 이상 안판다. 라면은 한박스 이상 절대 못판다 이런 식으로, 에 뭐랄까
자율적인 공동체를 이뤘는데 그런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던 거 같아요"
교통과 통신두절로 식량과 의약품이 절대 부족했던 그 때
시민들은 아무 조건없이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았소.
약국에서는 의약품을 상인들은 먹을것이나 과일을 가져왔소.
자신의 피도 내놓았소.
문응주씨 (당시 29세, 전남대병원 인턴) 의 증언이오
"전대병원 담 쭈욱 줄서서 있고 남광주 사거리 병무청까지 줄이 끊어지들 안했어요.
피가 남어가지고 우리가 다른데 보내줄 정도까지 되었죠."
(수술하려는데 수액 모자라다고 하자 입원환자들이 자기가 맞던 수액 빼줬다는 얘기도 유명하지라...)
어머니들은 밥을 해 나르기 시작했소.
양동시장, 남광주시장, 대인시장 상인들은 시장을 작파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먹였소.
곽미순씨 (당시 22세, 회사원)의 증언이오
"양 3동! 양 3동 그 어머니들도 어~엄청 고생 많이 했어요.
밥 다 거둬가지고 해가지고 나르고 주고 김밥만들어서 차에 실어주고 그랬거든요"
강도, 절도 같은 사건은 평소보다 발생율이 낮아졌소.
총기 수천정이 풀렸지만 오발의 사고가 없었소.
시내 금은방이나 은행에도 아무 사고가 없었소.
시민 궐기대회에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과 애국가였다고 하오.
5월 23일 금요일이 되었소. 이날은 구름이 많았고 낮최고기온은 25.8도였구려.
도청에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와 화순을 잇는 외곽도로를 막고 차량을 일일이 검문했소.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남마을이라는 마을이 있소.
(광주 화순 잇는 길에 가 보면 주남마을 표지판이 보인다오 광주 가보실 햇들 참고하시오.)
이 날 계엄군은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던 미니버스를 집중 사격했소.
신길순씨 (당시 47세, 주남마을 주민)의 증언이오.
"집에 온디, 냄새가 펄펄 나, 맻명이 죽은지는 몰라. 가마니로 덮어놨드만."
11공수가 18명이 타고 있던 미니버스를 총격해 15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소.
살아남은 세명중에 두명은 야산으로 끌고 가 죽였소.
당시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씨는 17세 여고생이었소.
거기 막 도착해가지고요 좀 서있는데 한분이 내려오시더라고요 높은사람 같았어요 그 중에서
높은사람같애가지고 뭐라그랬냐므는 왜 귀찮게 델고 왔냐 그러믄서...
(아.. 홍금숙씨 트라우마 심하고 힘들었겠소 ㅜㅠ)
비슷한 일은 광주-나주 도로에도 있었소.
11공수가 송암동으로 이동하며 무차별로 사격했기 때문에
10살 방광범군이 저수지에서 숨지고
13살 전재수 군은 놀이터에서 숨졌소
이강갑씨 (당시 23세 무장 시민군 활동, 24일 송암동에서 체포됨.) 의 증언이오.
"15대가 여기를 다 쐈다고. 자기 쏘고 싶은대로 아무데로 다 쐈다고.
여그 집 벼락, 내가 시계를 봤어, 15대가 40분을 쐈다고."
21일과 22일에는 교도소 인근 도로에서 3공수가
사망 10명 총상 12명
22일에는 광주 화정동 일대 주택가에서 20사단이
사망 8명 총상 3명
(예순 여덟살 할머니도 희생되셨소.)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은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소.
시신들은 암매장되어 아직도 다 알려지지 않았소.
강성자씨 (당시 24세, 5월 23일 숨진 강복원씨 누나)
"우리 엄마가 그 효천역 거 산 있잖아요 거 앞에 야산에다가 구덩이를 파가지고
그 구덩이에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들어 있었대요
페인트를 얼굴에다가 쫙 찌끄렀대요"
햇들도 알고 계실
헌혈하고 돌아가다 총격에 사망한 박금희양
남편을 마중갔다가 총격에 사망한 만삭의 임산부 최미애씨
계엄군의 조준사격에 희생당한 대표적인 민간인 희생자들이시오.
계엄군은 민간인 학살에 대해 보고하지도 않았고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소.
그래서 당시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는지 정확한 통계를 낼 수가 없지라.
5월 24일 토요일이 되었소.
오후 늦게 비가 왔고 (12.6mm) 낮최고기온은 26.8도였소.
이 날은 항쟁기간동안 가장 많은 군인이 숨진 날이오.
송암동에서 11공수랑 보병학교간 총격으로 11공수가 10명이 사망했고
호남고속도로에서 31사단과 기갑학교간 총격으로 31사단 3명이 사망했소
시민군과 아무 관계없이 자기들끼리 오인사격을 한 거지라.
좁은 광주지역내에 있는 군인이 하루에 두차례나 오인사격을 한 이유는
지휘권 혼란 때문이었소.
송선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
"외부에서 투입된 병력인 공수부대나 20사단이라든지
그리고 향토사단이라든지 자체병력하고는 다른 통신체계 지휘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용한 통신기기도 달랐어요. 예비주파수라든지 호출번호도 다 달랐어요."
공식적인 진압지휘체계는 회색으로 표시된 왼쪽이오.
그렇지만 지휘체계엔 있지도 않은 정호용 황영시가 수시로 광주에 내려와 진압작전에 개입한 거요.
(물음표가 누구인지 우리는 다 알고 있지라. 그런데 공식 기록에 남겨지지 않는 게 한스럽소.)
2군사령관은 실탄을 분배하지 말라고 했지만
11공수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었소
(광주역에서 네 분 돌아가신 게 20일 밤이오.)
7공수 11공수는 21일에 도청앞 집단발포를 하고도
상급부대인 31사단이나 전투교육사령부 육군본부에 보고하지 않았소.
21일 16시경에 황영시는 탱크로 다 밀어버리라고 했다가 지휘관의 반발을 샀소.
(저런 반발이 없었다면 5월 21일 5시에 계엄군 퇴각도 없었겠지라.)
한마디로 계엄군들은 정식 지휘계통의 말은 들어쳐먹질 않았다는 뜻이오.
누가 실질 지휘자인지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법원은 신군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소.
당시 군인들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지라.
아직까지도요.
5월 25일이 되었소.
이날은 비가 왔고 (26.1mm) 낮최고기온은 23.3도였소.
25일에 쓰여진 어느 광주시민의 육필 성명서요. 미국이 우리를 지원하기위해 왔다고 믿고 있었구랴.
계엄군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미국에 대한 기대는 클 수 밖에 없었소. 민주주의 대표라고 자임하고 있었으니까예.
문순태씨 (당시 전남매일 편집부국장)
"미군 군함이 부산으로 오고 있다는 대자보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야~ 우리를 구출하러 온다
그래가지고 얼마나 설레였나 모르겠어요. 기자들도 얼마나 기대를 하고..."
하지만 미국은 광주시민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움직였소.
5월 7일 미 대사는 국무부에 비밀전문을 보냈구랴.
한국 군부가 13공수를 5월 8일 서울 동남쪽으로
5월 10일에는 11공수를 김포반도로 이동할 것이라고 했소
5월 9일 미 국무부 차관이 보낸 비밀전문은
군대를 동원해 경찰력을 보강하려는 한국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데 동의하고 있소.
미국은 신군부가 시위진압을 위해 특전사를 동원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신군부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 거지라.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미국대사, 88년 국회청문회 출석거부)
"제 생각에 그 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국인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고 시위를 하던 학생들도 미국사람이 아닌 한국사람이었고
한국민을 상대로 사용된 군대도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었습니다."
(왈왈왈)
당시 미국정부는 전방에 있어 미국 동의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한미 연합사 20사단 작전통제권을 신군부에 넘겨줬소
미국 정부는 신군부가 27일 도청 진압작전을 펼 때도 일정을 협의했소.
미국에 대한 믿음은 518을 기점으로 불신으로 바뀌게 되고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광주, 부산, 서울 미문화원에서 방화, 점거농성이 이어지고
학생들이 미 대사관 앞에서 분신하기도 하오.
정재호씨 (당시 23세 조선대 법정대 3학년 투사회보 제작).
"518을 계기로 해서 드러나게 된 거죠 확인되고, 미국의 양면성.
민주주의를 위해서 뭔가 역할도 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국익의 차원
혹은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었다."
518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 등 신군부에게는 일부 단죄가 내려졌소.
하지만 학살을 방조하고 전두환정권을 지지했던 미국은
지금껏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지라.
(책임 인정 바라지도 않소. 국내에서는 기록이 훼손됐으니까 미국측 기록이라도 내놔라 하는 마음뿐.)
5월 26일 월요일이 되었소.
날씨는 맑았지만 낮최고기온은 19.1도구려
이날 새벽 다섯시 삼십분 계엄군의 탱크가 화정동에 나타났소.
그동안 날마다 궐기대회를 하며 의지를 다져오던 광주시민들이었지만
계엄군이 언제라도 다시 들어온다는 소문에 불안감은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군의 본부였던 도청은 발칵 뒤집혔소.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폭약이 도청에 있었소.
이걸로 자폭해야 하나
맞서 싸워야 하나 극도의 혼란이었다고 하오.
확인해보겠다던 부지사는 도망갔소.)
그자리의 수습대책위원 17명이 나서기로 하오.
(쇗이 이부분을 캡쳐한 건 두 신부님을 햇들에게 보여드리기 위해서라오.
제일 앞에 보이는 분이 김성용 신부님이라는 분이오. 젊은이들은 도청을 지켜라 어른들이 가야한다고 한 분이지라.
그 옆에 계신 신부님은 조비오 신부님이오. 이번에 전두환 XXX가 사탄이라고 했다는 그분이오.
저분들 바로 앞에 총겨누고 있는 군인과 탱크가 있는 것이라오...)
김성용 (당시 46세, 남동성당 신부, 죽음의 행진 17인 대변인)
"이 어른들이 총맞으러 갈테니까, 우리들이 먼저 죽을거야. 너희들은 여기서 끝까지 사수해라.
만일에 우리를 죽이고 여기 오면 느그들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워라.
광주의 자존심을 지키고 싸워라."
탱크앞에 드러누워서라도 막겠다고 맨몸으로 탱크까지 걸어가셨소.
그 뒤를 시민들이 따랐소
이것을 죽음의 행진이라고 부르오.
일단 탱크는 돌아갔소.
항쟁지도부는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오.
항쟁 지도부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외신기자회견을 진행하오.
외신으로라도 기록을 남겨야 했기 때문이오.
인요한씨 (당시 21세, 연세대 의과대 1학년, 외신기자회견 통역)
"북을 향하고 있는 총이 왜 남을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어렵다
식량이 떨어져가고 있고 물도 바닥나고 있고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 우리 매일 반공 구호를 외치고 시작한다.
그렇게 몰고가지 마라. 억울하다."
이날 오후 헬기는 소탕작전을 알리는 전단을 뿌리기 시작했소.
(그뿐만 아니라 사격도 했지라 이 XXX들.)
항쟁 지도부는 학생과 여성 노인들을 도청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하오.
(윤상원 대변인이 너희는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도청으로 오는 청년들이 있었소.
구선악씨 (당시 40세, 가정주부 도청진압때 사망한 이정연씨의 어머니)
"엄마 아부지 앉아보세요 내가 할말이 있대요.
내가 그래서 뭔 할말이 있나, 지금은 나가믄 안된다. 지금 나가믄 죽은다.
그 잡초를 누가 뽑을 것이요.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라도 피를 흘림으로서 그 잡초를 뽑을 것이요.
그라고 콜라한병 마시고 그라고 나간 뒤로.."
윤상원 대변인은 미국 대사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미 대사는 요청을 거부했소.
계엄군은 자정을 기해 시내 전화를 모두 끊었소.
도청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을 준비하기 시작했소.
새벽 세시 스피커에서 애절한 목소리가 울렸소.
광주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후까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은 이백여명이었소.
정상용씨 (당시 31세, 항쟁 지도부 외무부장, 도청진압때 체포)는 윤상원 대변인과 마지막 대화를 나눴소.
"상원아. 후회 없냐? 죽어도 후회 없냐?"
"형님, 형님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죽는 것은 역사속에서 영광스럽습니다."
(윤상원 대변인이라오.)
이른바 소탕작전은 삼십분도 안되어 끝났소.
도청에서 열네명 YMCA에서 열두명이 새벽이슬로 스러졌소.
애초에 이백명도 안되는 시민군으로 이만명이 넘는 정규군에 대항할 수 없지라.
계엄군은 그 자리에서 승전가를 불렀소.
넉달 뒤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하고 서로 훈장을 나눠가졌소.
광주는 잊혀지는 것 같았지만 시민들은 끝까지 민주화를 요구했고
(쇗이 쓴 이전글을 참고해주시오.)
87년 6월항쟁으로 폭발하게 되오.
"1980년 이후에 1987년 유월항쟁때까지 7년간
당시 민주화운동을 했던 거의 모든 사람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생각이
광주의 전국화, 518의 전국화
열개, 스무개의 광주는 진압 못한다 저쪽에서."
민주화 이후 518은 극적인 반전을 맞았소.
폭도들은 유공자가 됐고 폭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사건이 되면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라.
하지만 아직도 끝이 아니었소.
518을 폄훼하려는 시도는 끝이 없소.
마지막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오월이오.
많은 분들의 인터뷰가 있어서 쇗이 옮겨적다가
적지 않기로 했소.
햇들이 시간 날 때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시구려.
다만.
산 자들은 많이 할말이 없습니다. 오직 행동해야할 따름이지요.
라는 당시 시민군이셨던 구희현씨의 말만 적어두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