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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눈물한방울]명나라로 보내진 조선 공녀들의 운명

작성자솔솔바람눈|작성시간21.06.23|조회수9,166 목록 댓글 28

출처 : http://mlbpark.donga.com/mp/b.php?p=1&b=bullpen&id=201904070029515586&select=&query=&user=&site=&reply=&source=&sig=h4aTHl-gi3aRKfX2hgj9GY-1jhlq


[명나라로 보내진 조선 공녀들의 운명]


때로는 중국 내부사정을 중국 기록보다 조선왕조실록이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할 공녀들과 명황실 내부의 이야기가 그것이죠.

중국 스스로가 기록하기 뭣해서 기록하지 않은 부분을
사신들과 공녀들을 통해 듣고 조선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 조선왕조 실록을 바탕으로 글을 써 봅니다.



태종8년(1408년) 8월 명에서 사신 황엄이 도착합니다.

명나라 사신 황엄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죠.

당시 명의 황제는 영락제였는데

그가 실시한 베트남 원정과 베트남의 멸망에 조선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베트남이 다시 독립하자 세종과 신하들이 잘됐다고 축하하고 명황제를 비웃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뒤이은 몽골, 서역원정과 정화를 파견해 남방항로 개척까지 나서고 있던 때였죠.

"저 놈은 지 맘에 안들면 바로 쳐들어올 놈"

이라는 게 태종과 조선조정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구를 수락하기로 합니다.



전국적으로 금혼령을 내리고 13세이상 25세 이하의

양갓집 규수를 대상으로 한 모집(을 가장한 강제연행)이 있었는데

처녀들은 미친 척하거나 장애인인 척하거나

혹은 금혼령을 어기고 결혼해서 공녀로 가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이에 부모들은 투옥되거나 관직을 박탈당하기도 하고

큰 벌금을 물어야만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부모들은 보내지 않으려 버텼습니다.

예를 들어 권집중의 딸과 함께 양대미녀로 손꼽히던

권문의(호패법의 발안자)의 딸도 잡혀갈 뻔

하지만 권문의는 딸이 아프다고 버텼고 그 일로 투옥됩니다. (만... 곧 풀어줍니다... 어쨌 건 딸은 지켰으니 성공)


그렇게 두 달간 300명의 여성이 모집 되어

몇 번에 걸친 심사 끝에 그중 7명이 추려내어집니다.

최종 5명이 정해지는데 최종심사는 태종과 명 사신 황엄이 맡았고

어쨌건 총 5명이 뽑혀서 명으로 가게 됩니다.


면면을 살펴보자면

전 공조판서 권집중의 딸 나이는 18세 경상도 안동부 출신.

전 판서 임천년의 딸 나이는 17세 충청도 회덕현 출신.

전 영주지사 이문명의 딸 나이는 17세 경기도 인주 출신.

사직 여귀진의 딸 나이는 16세 풍해도 곡성군 출신.

수원기관 최득비의 딸 나이는 14세 경기도 수원 출신.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황엄이 떠나자

가족들은 다들 길가로 나와 통곡했고

아버지나 오빠,남동생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렇게 길을 떠난 공녀들은 북경에서 영락제와 마주하게 되는데...

조선에서도 미녀로 이름 높았던 권씨 처녀에게 한눈에 반한 영락제는

그 자리에서 현인비의 품계를 줍니다.


조선에서 손에 꼽히던 미녀인데다

옥퉁소를 잘불고 요리에 능하여 영락제의 총애를 받던 현인비 권씨.


그렇게 2년이 흘러 1410년이 되었습니다.

영락제의 현인비에 대한 총애는 여전해서

전쟁터까지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고

신하들에게 현인비를 위한 시를 지어보라 미션을 내릴 정도였죠.


하지만 갑자기 현인비가 급사합니다. (당시 나이 20세)

전날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죽어버렸죠/

그래서 영락제의 슬픔은 더 깊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이 흐릅니다.

1413년 영락제에게 여씨 성을 가진 궁인이 참소를 넣습니다.

바로 현인비 권씨는 독살당한 거라는 참소였고

범인은 조선에서 온 여씨(앞서 5명 중 사직 여귀진의 딸)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사결과 죽기 전날밤 현인비가

여씨가 가져온 호도차를 마셨다는 게 드러납니다.

분노한 영락제는 당장 여씨를 잡아오라 명령했고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참혹한 고문 끝에

황제의 총애를 질투하여 독살했다는 자백을 얻습니다.

조선인 여씨는 산채로 온몸의 살을 포 뜨는

능지처참을 당하여 비참하게 죽습니다. (당시 나이 21세)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 온 다른 공녀들에게도 불똥이 튀어

임씨(22세)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이씨(22세)는 고문끝에 참형을 당합니다.

5명 중에 살아남은 건 마침 남경궁전에 가있었던 가장 어렸던 최씨(19세)뿐이었습니다.

또한 온 지 얼마안된 2차 공녀(1410년, 1명)에게도 혐의가 가자

정씨(21세)도 고문에 대한 두려움에 스스로 목을 매어죽습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신하들은 여씨의 가족도 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태종은 확실하게 여씨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는 게 아니므로

가족까지 처벌하는 건 불가하다고 주장하죠.



1417년

조선에 현인비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많다는 것을 알게된 명은 공녀를 더 요구했고

그리하여 태종 17년(1417) 5월

조선에서는 3차 공녀 선발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규모를 크게 하고 심사를 엄격히 할 것을 요구하여

무려 600명의 여인을 선발해 뽑고 뽑아서
2명을 명으로 보내는데

지군창군사 한영정의 넷째딸 한씨 처녀와

부령 황하신의 딸 황씨 처녀였습니다.

여성의 외모에 대해 기록이 박한 실록에서마저

한씨는 고고하고 품위있게 아름다우며

황씨는 대단히 화려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고 적었을 정도였죠.




명으로 가던 도중에 황씨 처녀는 갑자기 복통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약도 별다른 효험을 보지 못합니다.

황씨 처녀는 시원한 김치국물이 먹고싶다고 애걸하지만

중국땅 한가운데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꽤나 골치를 썩힙니다...

하지만... 얼마 후 황씨 처녀는 복통이 가시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북경에 도착해 둘은 영락제를 만나는데

영락제는 그들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습니다만...



황씨가 오는 도중 배가 아팠던 건

사실 임신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낙태약을 먹어서 배가 아팠던 것이고

오는 도중 아무도 몰래 사산했다는 사실이 이후 조사결과 드러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형부 김덕장의 옆집에 살던 관노였으며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황씨가 공녀로 뽑혀가게 되자

형부 김덕장에게 부탁하여

정표로 황씨에게 빗을 건낸 정황도 적발됩니다.



당연히 명 황실은 뒤집어졌죠...

아니 임산부를 보내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면서

영락제는 열받아서 조선에 항의하려 합니다.

이 상황은 외교분쟁화 할 수 있는 사안이었고

황씨 처녀의 목숨이 날라가는 건 물론

황씨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이 소식을 들은 한씨가 영락제에게 찾아갑니다.

(이때 한씨는 '여비'의 품계에 봉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국의 왕이 어찌 사사로이 여염집의 여자 일까지 아시겠습니까?

부디 그러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황씨에게 너무 무거운 처벌도 하지 말아주시옵소서"라며

영락제의 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호소하죠.

평소 총애하던 여비 한씨의 눈물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영락제는

조선측에 항의하기로 했던 걸 없던 일로 하고

황씨의 처벌을 한씨에게 맡깁니다.

그러자 한씨는 황씨를 그 자리로 불러오게 한 뒤

따귀를 한 대 때리는 걸로 처벌을 대신하죠.



다시 2년이 흘러 1420년이 되었습니다

이해 명 황실의 내명부에서는 대형 스캔들이 터집니다.

바로 앞에 조선인 공녀 여씨를 참소했던 궁인 여씨(한족)와

궁인 어씨 그리고 환관들이 그룹XX를 즐겼다는게 드러난 것이었죠.

이 소식이 영락제에게 들어가자

처벌을 두려워한 여씨와 어씨는 자살합니다.

하지만 영락제는 어씨를 맘에 들어해서

그다지 크게 처벌할 생각이 없었던 터라

자살하게 내버려둔 그들의 주변인들을 조지는데...



그때 끌려가던 한 궁인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현인비를 공녀 여씨가 독살했다고 참소한건 여씨(한족)의 모함이었습니다!"

그 소리에 경악을 금치 못한 영락제는 현인비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명하는데

조사 결과 한족 궁인 여씨는 조선인 여씨에게 동성이니 친하게 지내보자며

황제에게 줄을 좀 대줄것을 부탁하지만 공녀 여씨는 거절합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데다

얼마 후 바깥 행차에서 가마의 서열문제로 시비가 붙어

조선 공녀 여씨에게 뺨을 맞는 일까지 생기자

한족 여씨는 황엄과 모의하여 영락제에게 참소하고

아랫사람들을 이용해 증거를 조작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농락 당했다는 걸 안 영락제는 미쳐버렸고

황엄은 이미 죽고 없던터라 부관참시하고

그의 가족은 물론 종까지 다 살해했으며

조금만 관련이 있거나 고문에 의해 나온

허위자백이 명백해 보이는 증언까지 모두 받아들여서

수많은 궁인들을 학살합니다.

누구의 말도 귀에 담지 않았으며

도리어 말리려는 신하들과 궁인 역시 모두 죽여버렸죠.

이 사건을 '어여의 난'이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 3000명에 달하는 후궁, 궁녀, 환관이 사형당하여

거의 전멸할 지경에 다달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어느날 벼락이 3군데에 떨어지자

영락제가 하늘의 경고라고 보고 살육을 중지할 거라

모두가 기대했다는 증언이 실록이 남아있을 정도였지만

영락제는 여전히 살육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조선 공녀들에게도 이 시기는 잔혹한 시기였습니다.

앞서 위기를 넘겼던 황씨 역시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데

단순히 겁이 많았는지 아니면 성격이 안 좋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명나라 사신들의 말로는 성격이 안 좋았다 합니다)

고문을 하자 주절주절 죄 없는 주위사람들까지 다 들먹여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가죠.

그리고 자신 역시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된 뒤

참형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이때 황씨의 나이 20살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락제가 미쳤어도

총애하던 여비 한씨까지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냉궁에 감금하고 음식을 끊어 버립니다.

그렇게 천천히 한씨는 죽어갑니다

하지만 여비 한씨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평소 주위 사람에게도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그랬던 그녀를 불쌍히 여긴 환관 한명이 몰래 음식을 조금씩 넣어줘서

여비는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나 겨우 영락제가 이성을 되찾아갈 무렵까지

한씨는 냉궁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몇 년간 한씨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1423년 한씨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사신이 와서 대신 제사를 지내고 간 것.

한씨의 남동생인 한확을 영락제가 마음에 들어해

훗날 차기황제가 되는 인종의 딸을 주어 손자사위로 삼으려 했던 것을 볼 때

아마 여비 한씨도 어여의 난에서 살아남은 이후

계속 총애 받으며 별 문제 없이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1424년 7월 18일 운명의 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영락제가 사망한 것이었죠.

명나라는 순장제도를 계속 운영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잠재적인 스파이가 될 가능성도 있는

외국출신 공녀들은 특히 순장 1순위였죠.

영락제의 장례식날 30여명의 궁인이 순장되게 되는데

여기에 여비 한씨뿐 아니라 1차로 온 공녀 중

이때까지 살아남은 최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최씨는 28세였으며

공녀가 대체로 18살을 넘지 않았던걸 추정해볼 때

한씨는 많이 잡아도 25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장례식이 시작되고 순장되는 궁인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이 제공됩니다.

당시 순장 풍습은 목을 메달아 죽인 후 무덤에 같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궁인들은 차례로 단상 위에 올라갔고 환관들은 그녀들의 목에 밧줄을 걸었습니다.

이 중 신분이 높았던 여비 한씨는 목에 밧줄이 걸린 채로

식을 참관하던 명나라의 차기황제 인종에게 부탁을 합니다.

"저는 오늘 여기서 죽더라도 조선에서 저를 따라왔던 저의 유모는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세요"

인종은 그 부탁을 듣고 식이 끝나면 유모 김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리라 허락하죠.

그리고 유모가 울면서 유언을 들으러 오자

한씨도 울면서 조선말로 유언을 남깁니다.

"어머니, 저는 갑니다, 어머니, 저는 갑니다...."

울음소리와 유언이 섞이자 조선말을 모르는 환관은

유언이 끝난 줄 알고 단상을 차버리고

한씨는 그렇게 유언도 끝마치지 못한 채 목이 매달렸습니다.

영락제조차 너무나 착하고 똑똑하다고 찬탄했던 여인의 최후로는

너무나 비참한 죽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비 한씨가 죽은 지 4년이 흘렀습니다.

과연 그런 여비의 고통으로 가장 득을 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그녀의 남동생 한확이었습니다

여비가 공녀로 갈때 빈한한 삶을 살던 그는

누나가 명 황제에게 총애받는 대가로 승승장구합니다.

판한성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 서성부원군, 좌의정에까지 오르며

명나라 공주와 결혼하겠냐는 부마의 자리를 영락제에게 제의받지만 거절하고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을 받아 엄청난 권세를 휘두릅니다.

세종 9년 궁녀를 건드렸다가 걸려서 신하들이 죄줄 것을 청하였지만

세종은 이빨을 깨물며

"그놈은 내가 벌을 줄 수가 없는 놈이다..."

라고 분해 할 정도였습니다.



세종 9년(1427년)

다시 명나라에서 공녀를 요구하는 사신이 옵니다.

이번에는 죽은 여비 한씨의 동생이자

한확의 막내여동생...

실록에 명으로 간 공녀 중

유일하게 이름이 남아있는 인물 한계란(韓桂蘭).

방년 19세에 아름답기로 유명하던

그녀도 공녀모집에 나올것을 요구받습니다.

하지만 과거 빈한한 집안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한씨를 보내야 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 한씨 집안은 명나라 황실과도 인척 관계인 엄청난 권세가가 되어 있었고

한확이 조금만 힘을 쓰면 안갈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확은 누나 여비의 죽음으로 끊어진

명 황실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보고 싶었던 걸까요.

기어코 막내 여동생을 공녀로 또 한번 보내려 합니다.


한계란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아 앓아누워 버리죠.

그러자 한확은 얼른 일어나 공녀로 가라는듯

약을 지어 한계란에게 보내줍니다.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언니를 팔아서 그토록 처참하게 죽도록 만들고

이제는 자신마저 팔아 넘겨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오빠를 바라보는 심정이...

실록에는 그녀가 오빠 한확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이 하나를 팔아 이런 부귀를 누렸으면서 이제 약까지 써가면서 어떤 영화를 더 누리려 하십니까?"

- 세종 36권,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5월 1일(무자) 4번째기사

그리고 한계란은 자신이 시집갈 때를 위해 준비해 둔

비단이불을 꺼내어 은장도로 모두 찢어버리고

혼수용으로 모아둔 재물을 주위사람에게 모두 나누어주며

삶을 포기하다시피 한 모습으로 공녀로 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한계란이 명으로 떠나는 날, 도성 사람들은 나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언니가 중국으로 가 순장당한 것도 억울한데 동생도 그 뒤를 밟는구나"라며

산송장이나 다름없다고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공녀로 간 한계란은 명 황실에서 뛰어난 학식과 총명함으로 존경을 받으며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여사부님"으로 불리웠고

한계란이 명에 있는 동안 4명의 황제가 바뀌면서

4명의 황제를 모셨다 하여 "공신부인"이라는 작위을 얻었으며

특히 성화제는 어렸을 때부터 한계란이 키웠기 때문에

성화제는 한계란을 할머니로 모셨습니다.

한계란이 죽자 태후부터 태자까지 모두가 슬퍼했으며

한계란의 장례식 때는 지금의 장차관급인 명나라 각부 시랑들이

묘비와 제문등을 나누어 쓸 정도로 존경 받게 됩니다.

한계란은 오빠 한확보다 더 오래 74살까지 살았습니다.


한확은 이후 자신을 딸도 수양대군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는데

이 분이 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수대비이며

그녀와 수양대군의 아들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훗날 조선의 9대임금 성종과 월산대군입니다.


또한 그는 계유정난에 단종을 폐위시키고

수양대군을 세조로 옹립시키는데 공을 세우고

세조의 즉위를 명에서 허락받는 데에도 공을 세웁니다.

(세조 시절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한명회 역시 이 집안의 친척)


부귀영화의 끝이 없어보이던 그 역시

1456년 53살의 나이로 명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도중 객사합니다.

그리고 한확의 아들들은 말그대로 개차반이라

온갖 비리와 패악을 저지르다가 이후 연산군 대에 피를 보게 되죠.

한계란은 자신을 팔아넘긴 오빠 한확과 조카들에게는 의외로 잘해줬고

62살때인 1472년 자신의 조카인 인수대비와 편지로 교류하며

인수대비가 조선의 특산품을 고모 한계란에게 보내자

한계란은 온갖 금은보화와 중국의 서책들을 인수대비에게 보내준 기록도 있습니다.



명에 간 공녀는 약 20년간에 걸쳐 총 146명이며 이들중 이 글의 주인공이었던 양반가의 여인은 30명 안팎이었고 대부분은 가창비, 집찬비로 불리우는 가수, 요리사 등의 집책을 맡고 있는 양인이나 천민출신 시녀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후궁으로 가는 양반집안 딸들의 기록에 비하면 양인,천민출신 공녀들의 기록은 출발할 때
실록에 딱 한 줄 나오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소재로 삼기가 힘드므로 다루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1424년 영락제가 죽기 전 과거 현인비가 해주던 조선음식이 먹고 싶다고 집찬비들을 요구했는데 11~12세의 아이들로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조정에서도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잔혹한 처사라고 반발이 일었으나 결국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져 모집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보내기 직전 영락제가 죽어 이 계획은 취소되었지요.


이후 공녀는 사라졌다가 병자호란 이후 다시 부활하는데 청은 조선의 공주급 여인을 요구하지만 공주가 2살밖에 안된 관계로 왕족의 딸을 공주로 봉하여 청으로 보내는데 이가 '의순 공주'입니다.

의순공주는 청의 섭정왕 도르곤의 첩이 되었으나
도르곤이 반역죄로 처형당한 후 다른 신하의 첩으로 하사되었다가 훗날 귀국합니다.

그리고 이후 청의 공녀요구에는 공노비들을 뽑아서 보내게 됩니다.



다음은 한계란이 죽었을 때 명나라 이부상서(이부의 장관)이 지은 제문의 내용입니다.

" 한씨는 성은 한이요 이름은 계란인데, 대대로 조선국 재상의 집안이다.

부인은 성품이 유순하고 착하여 말을 망령되게 하지 아니하고

행동에 떳떳한 법이 있으며 황실의 기념일을 하나하나 능히 알고 기억하니,

모든 집사가 함께 스승으로 높이 받들었다.

무릇 제사등의 행사에는 반드시 나아가서 물어보면 거의 틀림이 없었고,

행사준비에 반드시 지시를 구하였으니, 여기에 정밀함이 지극하였다.

혹시 여러 조정의 내령을 잊음이 있어서 와서 밝히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말하기를,

이 것은 선묘의 영이고, 이 같음은 영묘의 영이다. 라고 하니,

이런 까닭에 황제와 황후 이하가 모두 일컫기를 ‘스승님’라고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중략...

부인은 해동에서부터 오래 규중에 있으면서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배우고 익힘이 많았으므로,

아름다운 행실과 능함이 있어서 같은 무리에게 존중을 받고 조정에 알려져서

살아서와 죽어서 넓은 은혜와 큰 덕을 받음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부상서(吏部尙書) 만안(萬安)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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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0430_live_boy | 작성시간 21.06.29 여자는 소유물같은거네… 국력이 약해서 공녀를 바쳐야 했던 것도 슬프도 그런 나라에서 팔려간 여자들은 더 비참한듯 ㅠㅠ
  • 작성자monica geller | 작성시간 21.07.04 너무 마음이 안좋다 중국도 중국이지만 지 누이들 팔아서 부귀영화 누리는 게 가족이라니 너무 비참해
  • 작성자5483937 | 작성시간 21.07.15 너무 슬픈 역사다 ㅠㅠ
  • 작성자꽃한송이사실래예 | 작성시간 21.09.07 공녀부터 미군에 여자 팔아서 경제성장 한거까지^^ 여자 팔아서 유지하는건 한국 전통이구나ㅋㅋ 좋게 부르니 공녀지 그냥 자주고 애낳는 노리개인데
  • 답댓글 작성자꽃한송이사실래예 | 작성시간 21.09.07 그나저나 3천명에 가까이 살육을 하는데 환관들이 남아나나...다 도망 안가나...?...가족들땜에 못튀나 대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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