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뒹구는 모든 건 떨어진 것들이지
이파리가 나무에서 멀어지는 일을 가을이라 부른다
멀어진다는 것은
배 속의 작은 씨앗이 발아한다는 거야
오래전 누군가 심어놨겠지
너의 배 속에 또 나의 배 속에
물의 동자들이 응원했겠지
손 씻고 밤을 지나던 순간에도
우리는 사과 위를 걸었지
먹을 생각도 않고
붉음의 찌꺼기만 나눠 가졌다
나무 아래 있는 나를 그려볼래?
이파리와 함께 벌벌 떠는
내가 가난했을 때,
너는 작게 접은 오만 원을 헝겊으로 감싼 뒤
내 호주머니에 넣어두었지
몰래
비밀을 저금하는 사람처럼
테이블 아래서 나는 그만 문드러졌단다
네 사랑으로
가을이 온다는 게 뭔지,
아니?
이제 믿을 수 없는 일만 믿기로 한다
배 속 씨앗이 뒤척일 때 씨앗을
틔우면 가짜 씨앗을 잊으면 진짜
아니,
그냥 다 가짜
무엇도 지게 하지 말고 우리,
씨앗
이전으로 가볼까
/
박연준, 이파리가 나무에서 멀어지는 일을 가을이라 부른다
엄마가 필요할 때가 있고
아빠가 필요할 때가 있다
어제는 책 몇 권이 필요해 서점에 갔다
서접에서 책에 빠진 친구가 빛나는 때가 있고
다 읽지 못할 책을 욕심껏 담아 온 내가 더 빛나는 때가 있다
그렇게 쌓아둔 물건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렇게 방치된 집이 부모와 물건보다 더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대문 앞에서 인사하고 돌아섰는데
내 속에 너무 사랑이 없어서 놀라는 때가 있고
그럴 때 필요한 좋은 음식점이 중심가에 있다
막히는 길 뚫고 차로 몇 시간을 달려서
먹어요 , 그럼 먹을게요, 퇴근길 식탁은 가끔 이렇게 다정한데
엄마, 아빠, 친구 모르게 두꺼워지는 어둠이 있다
두꺼워지는 침묵이 있다 하지만 두꺼운 침묵이라니? 에이, 그게 뭐야
섭섭해진 친구가 뾰족하게 내민 입술처럼
어색한 시간을 뚫고 다가오는 그 뾰쪽함처럼
제때 아닌 도착이 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부모가 모르는 키스가 있고
책에서 배운 적 없는 포옹도 있다 하지만 너무 시간이 없어서
너무 바빠서 고치지 않은 마음이 있고
내가 더 무너지게 되는 때가 있다
/
김상혁, 고치지 않는 마음이 있고
정면에서 찍은 거울 안에
아무도 없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
버티다가
울었던
완벽한 여름
어떤 기억력은 슬픈 것에만 작동한다
슬픔 같은 건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
어째서 침묵은 검고, 낮고 깊은 목소리일까
심해의 끝까지 가닿은 문 같다
아직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
생각하면
생각이 났다
/
안미옥, 질의응답
네가 잘 때 나는 내 나이보다 오래된 책을 읽었고
네가 깨어났을 때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건물에 갇힌 사람이 건물에서 나오지 못하고
건물에 갇힌 사람만 살아남는 이야기였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아팠어
읽어보진 않겠지만 분명 슬픈 이야기겠지
너는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고
우리는 함께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우리의 작은 눈으로는 다 볼 수 없는 세상을 보았다
고가도로 아래 흘러가는 내로
물오리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지만
그래도 좋구나
말했다
좋은 세상이야
아무것도 새롭지 않지만
그런데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이야
그 소설이 말하려던 건 무엇이었을까?
묻자
무슨 소설?
하고 되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문득
모든 게 이미 겪은 일처럼 느껴져
말하며 불안해하자
그렇지 않아, 안아주었고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제 모든 일이 시작될 거라고
말해중었다
다정하게
/
송승언, 액자소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기형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이 계절 몇 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 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을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 세걸음 봄날은 간다
/
이병률, 당신이라는 제국
애월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 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계절은 높고 환했으리라
달빛과 달빛이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 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
서안나, 애월 혹은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가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만큼 아름다웠다
레몬이 태양 아래 푸르른 잎 사이에서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마음 속을 걸어가던 달이었을까
구름 속에 마음을 다 내주던 새의 한 철을 보내던 달이었을까
대답하지 않는 달은 더 빛난다 즐겁다
숨죽인 밤구름 바깥으로 상쾌한 달빛이 나들이를 나온다
그 빛은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휘파람 같다
그때면 춤추던 마늘 아가씨들이 얼굴을 멈추고 레몬의 아린 살을 입안에서 굴리며
잠잘 방으로 들어온다
저 여름이 손바닥처럼 구겨지며 몰락해갈 때,
아, 당신이 먼 풀의 영혼처럼 보인다
빛의 휘파람이 내 눈썹을 스쳐서 나는 아리다
이제 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어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지난 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 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란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을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 밤 속에서
사랑한다 당신 보고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
허수경, 레몬
*
사람들은 잠시잠깐의 틈을 못 견뎌 그 곳에 보편적인 불행을 욱여넣곤 했다.
네가 떠나고 나서야 세상은 너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너를 그리워하지만 달리 보면 그건 익숙한 불행을 찾는 행위였다
W.우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