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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종편주의] 승은상궁 발라버리는 후궁.swf

작성자잉여감자|작성시간13.04.18|조회수4,936 목록 댓글 13

 

 

 

 

 

 

 

 

 

 

 

 

다운받아서 보는데 인조의 후궁 소용조씨 일생을 그린 드라마임

장희빈 저리가라 하는 악녀임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의 후궁으로, 1630년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이후 1638년(인조 16년) 정4품 소원(昭媛), 1640년(인조 18년)에는 정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소용 조씨(趙氏)는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후궁으로 모략을 일삼으며 권세를 장악하였다. 1635년(인조 13년) 정비(正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죽은 뒤, 1638년(인조 16년) 계비(繼妃)로 책봉됐던 장렬왕후(莊烈王后)를 인조와 별거시킬 정도로 투기가 심하고 모사와 이간질에 능하였다. 또한 1643년(인조 21년) 인조의 다른 후궁이었던 상궁(尙宮) 이씨가 궁녀 애향을 통해 소용 조씨(趙氏)를 저주한 사건이 발각되었으나, 이는 소용 조씨(趙氏)가 스스로를 저주하여 상궁 이씨를 모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소용 조씨(趙氏)는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와의 불화가 심했는데, 이로 인해 인조가 장자(長子)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를 감시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년)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자, 소용 조씨(趙氏)는 세자가 왕위를 차지할 목적이라며 갖은 모함으로 인조의 의심을 부추겼다. 결국 1645년(인조 23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환국했으나, 소현세자는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 당시 소현세자의 주치의로 침술을 행했던 의관 이형익(李馨益)은 소용 조씨(趙氏)의 어머니인 한옥(漢玉)의 집에 드나들던 자로,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독살의 흔적이 뚜렷했던 시신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례를 서둘러 마쳤고, 의관 이형익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인조는 적자 계승의 원칙을 저버리고 형제 계승을 따라 소현세자의 원손(元孫)이 아닌 인조의 차자(次子)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자 책봉 직후인 1645년(인조 23년) 10월 소용 조씨(趙氏)는 정2품 소의(昭儀)에 올랐고, 인조의 총애를 등에 업은 채 장렬왕후를 이간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으로 몰아내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소현세자빈 강씨가 자신을 저주했다고 무고(誣告)하던 소의(昭儀) 조씨(趙氏)는 1646년(인조 24년) 세자빈 강씨가 어선(御膳)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게 하였다. 이로써 별당에 유치됐던 강씨는 끝내 폐서인(廢庶人)으로 사약을 받았고, 소현세자의 왕손 3형제가 모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반면 같은 해 12월 인조는 소의 조씨(趙氏)의 소생인 왕자 이징(李?)을 숭선군(崇善君)으로 삼았다. 이듬해 1647년(인조 25년)에는 소의 조씨(趙氏)의 장녀가 효명옹주(孝明翁主)에 봉해져,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의 손자인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과 혼인하였다. 또 1648년(인조 26년)에 소의 조씨(趙氏)의 소생인 왕자 이숙(李潚)을 낙선군(樂善君)으로 삼아, 조씨(趙氏) 슬하의 세 자녀가 모두 작호(爵號)를 받았다. 이후 소의 조씨(趙氏)는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승하하기 전에 종1품 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

한편 1649년 5월 왕세자 봉림대군이 제17대 임금 효종(孝宗, 1619~1659)으로 즉위하자, 친청파(親淸派) 김자점은 북벌정책을 펼쳤던 효종을 청나라에 밀고하였다가 유배되었다. 손자 김세룡을 부마(駙馬)로 앞세워 귀인(貴人) 조씨(趙氏)와 사돈지간으로 결탁했던 김자점은 이후 자신의 아들 김련(金鍊), 김식(金?), 손자 김세룡, 김세창(金世昌) 등과 역모를 꾀하였다. 이들은 귀인 조씨(趙氏)의 장자인 숭선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다 계획이 틀어지자 의빈(儀賓) 김세룡을 옹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1651년(효종 2년) 11월 귀인 조씨(趙氏)의 저주 사건이 발각되면서 모든 계획이 탄로 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귀인 조씨(趙氏)가 딸 효명옹주와 함께 궁으로 무녀(巫女)를 불러들여 임금이 거처하는 대전과 자의대비(慈懿大妃 : 장렬왕후), 인평대군(麟坪大君 : 인조의 3남) 등의 처소에 뼛가루 및 절단된 시체 등을 파묻어 두고 저주를 행하였으며, 승려들과 불상을 세워서 효종을 무고(巫蠱)했다는 죄목이 밝혀졌다. 마침내 1651년(효종 2년) 12월 14일 역적 귀인 조씨(趙氏)는 자결하라는 명을 받아 사사(賜死)되었으나, 인조가 귀인 조씨를 총애하였던 것을 생각해 작호는 폐하지않고 장례도 종1품 귀인에 맞게 예장하였다. 그리고 김세룡의 아내인 효명옹주와 숭선군 이징은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각각 중도와 근도에 안치시켰다. 역당 김자점 일가를 비롯해 저주 사건에 동참했던 궁인, 무당, 승려 등 관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후 1652년(효종 3년)에 낙선군 이숙도 작호를 삭제하여 이징과 함께 이름만 기록되도록 했다

 

 

 

 

 

+) 굴욕적인 인조의 삼전도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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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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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연아님밖에 안보여요 | 작성시간 13.04.18 ??처음 보는데 원래 연기가 저래?? 뭔가 되게 어조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이상해.. 사극톤이랑 안맞아..ㅠ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Lydia | 작성시간 13.04.18 안에 있는 후궁이나 승은상궁 모시는 나인인듯. 근데 김현주(숙원)랑 눈 마주쳤는데도 고개 빳빳하게 들고 있으니까ㅋ
  • 작성자흥미니민이 | 작성시간 13.04.18 인조, 선조 너무 싫어.
  • 작성자마미마미 | 작성시간 13.04.19 그러게 광해군 한테 왜그랬어 중립외교로 실리좀찾자니깐 왜그랬어 서인들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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