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크랩] [흥미돋]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두 쓸모없는 말이다: 시인의 산문들

작성자리소목|작성시간22.06.13|조회수4,785 목록 댓글 8

출처 : 여성시대 표류





이소호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챕터는 너무 거대한 슬픔이다. 그 슬픔은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다시 연필을 쥐고 필사적으로 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쓴 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불러준 대로, 너에게 쓰인 대로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지문대로 움직인다.

거기 그대로 있으라는 말이 괄호 안에 남겨져 있을 뿐이다. 우리는 비밀스럽게 잠시 사이를 두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주 오랜 기다림 끝에 네가 말했다.
“빨리 다음 문단으로 가자.”

나는 네가 말한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다.
그래도 갈 것이다.
분명 네 손을 잡으면 지옥이 시작되는 줄 알면서도.








성동혁 뉘앙스


사랑할수록 작은 뉘앙스에 휘청거린다. 시 또한 그러지 않을까. 무엇을 쓰려고 할 때, 그것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일, 그것 앞에서 눈치를 보는 일,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나의 생활이 엉망이 되는 일.









최승자 어떤 나무들은


나는 더이상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내게 강요되었던 가치관의 정체를 내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가치관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을 때, 내가 현재를, 미래를, 시간을 더이상 감옥으로 보지 않게 될 때 나는 어떤 가능성의 입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제는 거꾸로의 과정이 진행될 것이다. 내 세포가 내 무의식에게 내 무의식이 내 의식에게 상향 전달하는 과정의 반대 과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내가 분명하게 내 의식으로 의식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내 의식으로 내 무의식에게, 나의 감수성과 나의 사고 방식에게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내 세포들에게 하향 전달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너희들이 느꼈던 게 옳다고,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마침내 그것들이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_1994년 12월 16일







박준 계절 산문

나는 너 좋아하고... 악


분명한 것은 짧은 기간의 교류든 평생에 걸친 반려든 우주의 시간을 생각하면 모두 한철이라는 것이고, 다행인 것은 이 한철 동안 우리는 서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잘도 담아둔다는 것입니다. 기억이든 기록이든.
⠀이제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습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가을날이 또 이렇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해욱 창밖을 본다


나는 다른 하루 속에 있다. 감은 눈 속으로 잠은 오지 않았고 잠 없이는 하루와 하루 사이에 금이 그어지지 않는다. 달력의 날짜가 바뀌고 밤이 물러가도 하루는 끝나지 않고 하루는 시작되지 않는다. 그럴 때 하루와 하루를 가르는 것은 창문이다. 창밖엔 오늘이 시작되고 나는 어제를 이어가고 있다. 나의 오늘은 계속되는데 창밖엔 내일이 흐르고 있다.



-

12월에는 유독 시인이 쓴 산문집들이 많이 나와서
이렇게 한자리에 모아보고 싶었어
이소호 최승자 신해욱은 여성 시인이야

이 글 속 한 문장, 한 단어라도
여시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기를 바라

마침내 책으로도 만나게 되기를 바라

제목은 성동혁의 뉘앙스에서 발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빵너무맛있어빵너무좋아 | 작성시간 22.06.13 전부읽어본다!
  • 작성자스펀지뱝 | 작성시간 22.06.13 너무 좋네
  • 작성자먹고싶은게많은여시 | 작성시간 22.06.13 다 너무 좋다
  • 작성자74기 | 작성시간 23.08.12 개좋다
  • 작성자74기 | 작성시간 23.08.12 제발 지우지 말아주ㅜ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