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Midnight...
조선 중기 이전 혼인여성 관련 사례를 보면
1. 이여순 - 오언관 사례
“오언관은 도를 같이 공부하는 친구였는데 남편이 말하기를 `당신 같은 처가 있고 오언관과 같은 친구가 있으니 나의 일생의 행운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세 사람이 앉아서 종일토록 도를 논하여 때로 야심하게 하였습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6년 8월19일).
해석 : 조선 양반여성 이여순, 이여순의 남편, 남편 친구 오언관 세 사람이 서로 학문을 논하는 벗이었음
이여순이 오언관과 산천 유람다닌 일로 고발됐지만 광해군이 간통 증거 명확치 않다고 처벌ㄴㄴ함
관심을 끄는 것은 사건보단 배후다. 사료대로라면 남녀 구분이 칼 같던 조선에서 혼인한 여성이 남편친구와 학문적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2. 신사임당 남귀여가혼
신사임당은 친정인 강릉에 38년을 머물렀고 서울에선 10년을 산 것으로 돼 있다. 며느리보다 딸로서 오래 산 것이다. 그가 살았던 16세기 중반은 현모양처의 토양조차 조성되지 않았다. 시집을 전제로 자식과 남편을 섬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여기서 당시 혼인관행을 엿볼 수 있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여자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고 남자는 본가와 처가를 주기적으로 오가는 형태란 뜻이다.
* 남귀여가혼 = 고구려 서옥제에서 시작된 풍습으로 남자가 처가에 장가드는 형태. 조선시대 중기 이후까지 이어짐
* 차이점 : 서옥제는 혼인 후 일정 기간 처가에 머물다 남편 쪽으로 거주지가 정해짐. 남귀여가혼은 혼인 초기 후의 거주지가 남편의 집으로 고정되지 않음. 우리나라 전통혼례는 조선중기까지 "남귀여가혼"임.
*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고, 드라마 같은데서 나오는 친영례 (신랑이 신부집가서 식올리고 신부를 데려옴)는 보통 왕실같은데서나 하던 것. 18세기 이후에야 민간에 확산됨ㅇㅇ 그전까진 메이저 X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있는 저자가 전하는 조선의 `색다른` 가족상이다. 세상에 알려진 내용과 많이 달랐다는 거다. 17세기 이전까지 딸은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상속재산을 결혼 후에도 관리했다. 칠거지악? 말은 있었으나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령 큰 죄로 몰렸던 자식을 못 낳는 문제조차 `양자`로 해결됐다. 한마디로 당시 조선은 “꽉 막힌 남성 중심 사회가 아니었다.”
`장인 집(장가)에 든` 남자가 이리저리 옮겨 다닌 풍습은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이를 깨뜨린 건 중국 바람이다. 부계 위주 문화가 선진적이란 인식이 비집고 들어온 탓이다. 여인의 숨통을 조이는 시집살이가 시작된 건 이때부터다. 딸이란 정체성이 며느리로 바뀌는 순간 가족의 역학관계는 적잖은 변화를 겪는다.
ㅊㅊ https://m.edaily.co.kr/news/Read?newsId=01912246596449328&mediaCodeNo=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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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유의 혼인풍습이 사라지고 소위말하는 ㅈ같은 풍습이 자리잡기 시작한 건 18세기 가서야 볼수있음
16세기 말~17세기 초 양란 (임진왜란-병자호란) 이전 조선과 이후 조선은 거의 다른 나라라고 봐도 무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