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지상의 누군가도 나를 싫어하고 경멸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지.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도 없고 나 또한 모두를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니까.
/미완의 세계, 김준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바닥, 박성우
그래. 원래 인생은 한 번씩 힘든 거고,
존재는 한 번씩 무너지는 거고,
그러다가 또 괜찮아지는 거니까.
/어떻게 숨길까, 지금 내 마음을!, 정민선
내가 엮은 천 개의 달을 네 목에 걸어줄게
네가 어디서 몇 만번의 생을 살았든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을게
네 슬픔이 내게 전염되어도
네 심장을 가만히 껴안을게
너덜너덜한 상처를 봉합해줄게
들숨으로 눈물겨워지고 날숨으로 차가워질게
네 따뜻한 꿈들을 풀꽃처럼 잔잔히 흔들어줄게
오래오래 네 몸 속을 소리없이 통과할게
고요할게
낯선 먼먼 세계 밖에서 너는
서럽게 차갑게 빛나고
내가 홀로 이 빈 거리를 걷든, 누구를 만나든
문득 문득 아픔처럼 돋아나는 그 얼굴 한 잎
다만
눈 흐리며 나 오래 바라볼게
천년동안 소리 없이 고백할게
/천년동안 고백하다, 신지혜
누군가 너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거야
그 애는 나의 제목같은 사람이라고
모든 걸 제치고 언제나 맨 앞에 놓일 문장이라고
/제목, 하현
그가 반짝일 때면, 내 마음은 작게 설레였었지
활짝 핀 꽃 앞에 남은 운명이 시드는 것 밖엔 없다 한들.
그렇다고 피어나길 주저하겠는가
/보통의 존재, 이석원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부치지 않은 편지1, 정호승
봄,
폐를 잘라내고 너무 아파서 누구 이름을 부를 뻔 했다. 울지 마 울지 마, 괜찮아 괜찮아, 하고 보내주는 문자를 기다렸다. 종점 같은 데서 기침은 피가 잔뜩 묻어야 쏟아지고 주기도문을 열세 번쯤 외우다가 뒷 문장을 고쳤다 다만 다만, 그다음을 고쳤다 수없이 고쳤다 한번도 말하지 못하고 고치기만 했다.
/2013년, 최문자
별과 달 중에 누가 더 외로울까
힌트는 별은 무수히 많은데
달은 혼자라는 것
그래, 별이 더 외롭지
무수히 많은 속에 혼자인 게
훨씬 더 외롭지
당신처럼, 나처럼
/별과 달 중에, 정철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앞만 있고 뒤는 없으므로
사랑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돌아볼 수 있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이 가시밭길이었음을,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음을 그때 알았다.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