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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뉴스데스크]조선의 ‘화가 신씨’, 신사임당은 ‘시대착오적’ 현모양처인가? [클로저]

작성자애플망고칠러|작성시간22.08.20|조회수1,327 목록 댓글 2

출처 :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3295763?cds=news_edit


신사임당의 초충도(왼쪽),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사임당 영정. 현재 5만원권에 담겨 있다.


● “내 사후 혼인 말라”

당시 신사임당이 지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현모양처’의 시각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여론도 일부 존재했습니다. 부적절한 모델을 확장하는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이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신사임당은 정말 현모양처였을까요. 일처다부제가 일반적이었던 조선 시대, 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자신의 사후 재혼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 “화가 신씨, 사대부에 의해 변모”

또한, 사임당 생전 그의 이미지는 오늘날처럼 현모양처보다는 실력있는 화가였다는 주장도 있죠. 화가 신씨로 더 알려졌던 그는 사후 100년이 지나 17세기, 노론 송시열에 의해 우리가 현재 인식하는 현모양처의 이미지로 소비됐습니다. 율곡 이이를 부각시키려면 그의 어머니 역시 위대해야 했고, 현모양처라는 가치는 이 때 가장 쓰기 좋은 가치였죠.

이후 1970대 박정희 정권 당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를 신사임당에 투영해 우상화하면서 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됩니다. 글, 그림, 시에 탁월했던 사임당이 사후 유교적 가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현모양처라는 점을 강조한 위인이 된 것이죠.

● 시댁 접촉 적었던 사임당

사임당이 초충도 등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딸 세 명, 아들 네 명을 낳아 기르면서도 바느질에도 소질이 있었던 등 완벽한 인물로 그려질 수 있었던 배경은요.

시댁과의 접촉이 적었고 친정의 위세가 셌던 영향입니다. 당대 다른 여성들과 달리, 자신의 실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 시대가 만든 이미지의 아쉬움, 새 시대의 몫

자신의 재능이 있더라도 드러내기 어려웠던 조선 시대, 대학자 율곡의 어머니였던 사임당의 기록은 아주 잘 남았습니다. 대신 당대 화가 신씨로 불리던 기록이 아닌 율곡의 어머니로 강화돼 남았고, 이후 사회적 가치 변화에 따라 그의 이미지도 현모양처로 변모·강화됐죠. 비교적 현대에 와서는 자식들이 똑똑했다는 점에서 교육을 잘했다는 점도 부각됐습니다.

‘화가 신씨’가 ‘현모양처 사임당’이 된 것에는 변화가 존재했습니다. 그의 이미지는 또 앞으로 어떻게 변화, 재생산될지, 변화된 가치에 따라 어떤 면이 부각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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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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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나는그것에대해아주오랫동안생각해 | 작성시간 22.08.20 저 의견에 아주 반대하는건 아니지만, 신사임당이 친정에 있었던 이유는 말그대로 친정이 위세가 셌고 시가가 약했기 때문이지, 사임당이 무슨 시대의 개혁가라서 일부러 그런건 아니잖아. 주장하려는 논조에 너무 억지스럽게 끼워넣은 내용인것 같네.ㅋㅋ 그리고 지폐 선정당시 한은의 선정 이유가 '현모양처' 였던게 문제인거라 그 논란은 신사임당이 실제 어떤 인물이었나와는 별개라고 생각함. 하지만 지금은 신사임당의 수식어에서 현모양처를 지우는게 의미있다고 보기때문에 이런 기사들 나오는건 좋다고 봄.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만두세판 | 작성시간 22.08.20 신사임당 자체로도 좋고 뛰어난 화가인것도 멋있지만 지폐에 들어갈 만한 위인인지는 좀 갸우뚱해져. 율곡이이의 어머니란점이 큰 것 같아서 아쉬운거지.. 여태 여성이 그려진 지폐가 없다가 가장 고액권에 여성이 그려졌는데 결국 어머니 이미지이니까.. 그게 꼭 나쁜건 아니지만 아쉽긴 해.. 그때 박근혜이미지라고 말 많았던것도 좀 찝찝하긴 하고ㅋㅋ 그래도 이미 통용되고 있는거 이미지라도 바꾸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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