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유격대를 알면 6.25전쟁을 안다.-1
독수리유격대를 알면, 6.25전쟁을 안다(1)
▣ 전우를 추모하며!
6.25전쟁은 우리의 반만년 민족사에서 다시없는 비극이었고 형언 할 수 없는 폐허와 상흔(傷痕)을 남겼습니다.
당시의 우리 국군은 41만 5천명의 전사자와 42만 8천명의 전상(戰傷) 또는 실종자를 냈습니다.
민간인 피해 137만 명까지 합치면 남한 측에만 220만 명이 넘는 실로 엄청난 인명의 피해를 낸 전쟁이었습니다.
북한의 피해까지 합쳐 보면 6.25가 참으로 처절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며, 민족의 수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세기를 흘려보내고, 오늘 여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밑에 들녘과 마을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넉넉해 보입니다.
50여 년 전 그때에 폐허된 강산은 녹음 속에 청청하고 풍전등화였던 국운은 세계 속에서 선진국대열로 당당히 나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와 풍요와 희망이 넘치는 현재에서 옛날을 돌이켜 보면 감개무량하고, 저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가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북한 공산군의 침략으로 내 부모형제가 학살당하며 포탄으로 산야가 찢기고, 불 탈 때 우리 독수리유격대는 젊은 기백과 뜨거운 혈기를 가지고 구국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한 발짝이라도 먼저 피난을 갈려고 아우성일 때 우리는 포천 신읍에서 독수리유격대를 창설하고 일동으로 들어와 향토방위와 공산군 토벌작전에 임했습니다.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북진을 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하고 일동면 운담에 본부를 두었던 독수리 유격대는 1950년 11월 30일 중공군 공세에 밀려 충주까지 후퇴를 했습니다.
이후 독수리유격대는 제천, 단양, 청송, 안동, 예천, 의성, 풍기 등에서 인민군 10사단과 공비를 토벌했고 이어 양평에서 8사단과 전후방 임무교대를 한 후 화야산, 설악동, 청평발전소, 현리, 하판리, 상판리, 샛말, 청계산, 강씨봉, 도성고개, 백운산, 광덕산, 하오고개, 도덕동, 육단리, 사곡리, 천불산, 734고지, 373고지, 계웅산 등의 치열한 전투를 하였으며 금강산으로 연결되는 철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금성까지 진격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역을 능가하는 용맹을 떨치고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것입니다.
50년 11월 공산군을 토벌하는 작전 중 최영찬 대원이 이곳 낭유리에서 전사를 했고, 51년 1월 태백산지구 토벌작전 중 의성에서 정봉필대원이 전사하고, 51년 2월 6일 충북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에서 최종성 유격대장과 안** 부대장, 최종철 작전관, 고관도 교육관, 최규동 보급관이 17연대 1대대로부터 희생되었습니다.
51년 6월 26-28일에는 격전을 치르던 오성산과 대성산사이에 373, 734고지에서는 송완희 소대장, 권유성, 박용달, 오삼만, 윤주회, 이강록, 임철원, 정동진, 한상준대원이 전사를 하고, 김익수 대장(隊長)과 이규화소대장, 이강헌, 안윤호, 민병권, 송원섭, 안윤호, 이덕배, 이완진, 조용세 등 많은 대원이 전상을 입었습니다.
앞에서는 적의 포탄이 빗발치고 뒤에서는 독전하며 쏘아대는 연대장의 권총이 귓전을 날았습니다.
군가의 한 구절처럼 우리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진격을 했던 6.25전쟁을 이제는 반세기 전으로 묻어두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백발의 노구(老軀)가 되어 이곳을 찾기도 힘겹습니다만, 우리의 과거사는 더욱 새로워지고 감개무량합니다.
우리 생존 대원들은 전사한 전우들을 명예를 복원하고자 노력을 해 왔지만 그 결실이 미미하였습니다.
이러한 중에서도 본 행사는 전몰대원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 분 들이나 내빈 여러분이 나라를 지키고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독수리 유격대 유족 여러분!
잃어버린 여러분의 혈연이 세상에서 잊혀진다고 통곡하지 맙시다.
여러분이 유족으로서 위로 받지 못한다고 상심하지도 맙시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시고 형제가 되는 전몰대원들은 대한민국에 신명을 바친 애국자들입니다.
그들은 훈장을 받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훈을 내세우기 위하여 적진으로 돌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이 땅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기 위하여 신명을 바친 애국자입니다.
유족여러분!
우리가 우러러보는 저 태극기 속에 여러분의 선친이 계시고, 여러분의 형제가 계십니다.
저 태극기속에 그 분들의 명예와 공훈이 담겨 높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유족 여러분!
이제라도 저 태극기를 가슴깊이 새기어 위안으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전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저 태극기와 함께 영원하시다는 긍지를 가지십시오.
독수리 유격대원 여러분!
우리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나라를 지켰습니다.
우리가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은 것은 헛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역사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장한 대한민국 국력과, 젊은이들이 만끽하고 있는 자유가, 우리의 신명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자신(희생) 뿐이었지만 조국의 자유와 평화는 우리가 구해 낸 것입니다.
우리는 당당한 길을 걸어왔고 걸어가야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지만 우리 스스로 자존하고 긍지를 가집시다.
이름도 없이 -
군번도 없이 -
무덤도 없이 -
후손마저 남기지 못 한 채 조국에 몸 바친 전우의 영령들이여 -
당신들은 얼어붙은 강변에서 -
눈보라치는 능선에서 -
포탄이 빗발치는 고지에서 산화하셨습니다.
흐르는 피 막아주는 이 없고,
찢긴 상처 싸매 주는 이도 없는 외로운 고통 속에서 절명을 하셨습니다.
당신들은 항상 용감하셨고 장하셨습니다.
당신들은 항상 앞장서 진격하셨고, 뒤 따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어 진격을 하고, 앞서든 전우가 쓰러지면 우리는 다시 앞서 나갔습니다.
옆에 전우가 쓰러져도 우리는 쓰러진 전우의 마지막 운명을 지켜 줄 겨를이 없었습니다.
운명하는 전우의 손을 잡아주기 보다는 달려드는 적과의 백병전에 우선해야 했고, 전우의 시체를 제대로
거두어 주지도 못 한 채 앞으로 진군을 해야 했습니다.
전우여!
그리운 전우여!
숨을 몰아쉬던 당신의 모습과 파르르 떨리던 당신의 마지막 맥박이 지금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합니다.
그렇게도 멈추기 어려워하던 당신의 마지막 숨결이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당신의 마지막 눈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급박한 경우였더라도 운명하는 당신의 손길마저 잡아주지 못했던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습니다.
갈 잎이라도 꺾어 햇빛이라도 가려 줬어야 했는데 ―
모두가 때 늦은 후회요, 가슴 아픈 사연뿐입니다.
전우여!
그리운 전우여!
때가 늦었지만 살아있는 우리가 합심해서 돌을 깎아 비를 세우고 당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향을 피워갑니다.
하늘이 높고 산야가 푸른 곳 !
자유와 평화가 가득한 곳 !
태극기가 힘차게 휘날리는 곳 !
오늘 이 추념의 소리를 위안으로 삼으시고 양지 바른 이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우리가 당신의 후손을 대신하며 명복을 빕니다.
해마다 태극기를 높이 올리고 향도 피우리니 -
해처럼 달처럼 영원하게 이 나라를 살피고 감싸 주소서 !
전우여 !
전우여 !
그리운 전우여 !
commando63@ paran.com
▣ 독수리유격대 개요
동족상잔으로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였고 온 나라가 아비규환으로 휘돌렸던 6.25전쟁이 이젠 반세기의 세월 속으로 저물어 버렸습니다.
허겁지겁 남으로 내닫던 피난길에는 길가마다 죽음의 시체가 즐비했고 폭격 맞은 엄마 시체에 매달려 젖을 빨던 아이의 처절한 모습도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우리의 반만년 역사에서 6.25보다 더 잔인한 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한 발짝이라도 먼저 피난을 가려고 아우성일대 우리 독수리 유격대는 가족을 놓아둔 채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섰습니다.
젊은 혈기에서 무너지는 나라를 우리가 지켜야 갰다는 간단하고 작은 용기에 실천 이였지만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참으로 엄청난 흔적으로 우리의 가슴 깊이 남겨져 있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던 수많은 사람들은 무난하게 목숨과 가족을 지켰고 전쟁이 끝난 후 현재까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회에 순응하며 잘 살고 있지만 가족을 버리고 전쟁터로 나섰던 우리 대원들은 많은 수가 전사나 전상을 당했으며 부모 형제 가족을 잃음으로서 심신을 함께 음지에 놓고 멍든 가슴으로 반세기의 세상을 살아 왔습니다.
작열하는 포탄 속에서 피범벅 되어 적진으로 치닫던 우리의 젊은 혈기는 이제 백 발이 되었고 비호처럼 산야를 달리든 사지도 이젠 힘을 잃어 휘청 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쇠잔한 모습으로 뒤안길에 물러서 있지만 지금 이렇게 자유와 평화와 풍요가 넘쳐흐르는 세상을 보노라면 희한의 기쁨을 느낍니다.
내 부모를 내 처자식을 전쟁으로부터 지키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더 크고 더 장하게 나라를 지켰다고 자부합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당당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바치고 흘린 피를 생각할 때 우리는 깊은 감회와 경건한 마음으로 유명을 달리한 전몰 대원들에게 명복을 빌어 올립니다.
반면에 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낭비와 방종과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어지러워지는 질서에 대하여는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우리 함께 바르게 서서 옷깃을 여미고 저 태극기를 바라봅시다. 그리하여 전쟁의 교훈을 돌이켜보고 새로운 다짐도 간직해 둡시다.
그래야 저 태극기는 내일도, 모래도, 만년을 두고 장하게 휘날릴 것입니다.
6.25 당시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위시해서 軍 당국자들이 말끝마다 북진통일을 외쳐 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 가서 먹고 저녁은 어디서 파티를 하겠다며, 북진통일의 승전을 호언장담하던 국군과 정쟁(政爭)으로 밤낮을 지새우던 정부는 공산군이 남침을 하자 3일을 버티지 못한 채 서울을 뺐기고 풍비박산 도망가듯 한강을 건넜습니다.
모두가 국방의 실제적인 대비는 외면한 채 허풍만을 떨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를 검증하고 자신감과 국방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북한과 손을 잡았고, 조금씩 신뢰를 쌓아 가고 있습니다.
동족 간에 전쟁은 다시없어야 하고 남과 북은 열심히 믿음을 쌓아서 서로가 신뢰하고 뜨겁게 끌어안을 수 있는 민족통일의 시대도 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왜 6.25가 일어났는지를 생각하고 6.25의 진솔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6.25의 교훈
50년이 지난 6.25전쟁은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지 오래고, 머지않아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사회 경영에서 뒷전으로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6.25의 교훈은 지금 이 시기와 이 세대들에게 절대적으로 교육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6.25전쟁의 책임을 공산주의와 김일성의 남침으로만 돌렸습니다.
그리고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켜 낸 것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의 힘으로 믿어 왔습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제껏 망각해 온 사실이 있습니다.
6.25 발발의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문단속을 하지 않으면 도독을 맞는 것이 정한 이치이며 국방의 능력과 준비가 없을 때 외침을 받는 것은 당
연지사입니다.
6.25남침이 그러하고 일제의 침략과 임진왜란에서부터 북방 민족들의 무수한 침략이 그러했습니다.
일제의 침략을 일본 놈만 탓하고 6.25 남침을 김일성만을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킬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군인은 전선을 지키고 국민은 나라를 지킵니다.
군인은 국민이라는 집합 속에 원소로서 국경과 전선에서 일차적인 국방 임무를 수행합니다.
국경이 무너지고 전선을 잃으면 군대의 능력과 가치는 상실됩니다.
그러나 국민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잃어버린 국가도 되세울 수가 있습니다.
앞치마에 돌을 나르고 끓는 물을 적군에게 퍼붓던 행주산성의 아녀자들이나 의병에 가담하여 왜군에게 저항하든 무지렁이 촌부들,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든 필부(匹夫)들이 모두 반만년의 나라를 지켜 온 우리 국민들입니다.
신성한 국군의 역할을 폄하 시키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국군은 막강합니다. 우리의 국군이 그 역할과 능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국민의 올바른 정신과 국가관이 바탕이 되어야 하며 국민과 국군의 연대가 국방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국민정신의 중요성은 6.25 전쟁과 월남 전쟁에서 확인이 됩니다.
월남전쟁은 6.25전쟁보다도 엄청나게 많은 전비와 초 첨단의 무장(武裝)을 투입하고서도 재래식 월맹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낸 우리 대한민국과 패망한 월남은, 바로 국민의 정신적 바탕 없이는 군대의 승리가 어렵고 국가를 방위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6.25 전쟁에서 우리 국민들의 구국활동은 엄청났습니다.
깊은 산속 외진 섬을 막론하고 의용군으로 나선 이가 부지기수로 많았고 그들의 공훈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부에서는 숭고했던 민간의 저항정신을 평가해 주지도 않았고, 자료나 전사의 발굴도 외면했습니다.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나라의 전쟁 기념물 중 거의 전부가 6.25전쟁 때의 것입니다.
이 전적비들이 때로는 전과(戰果)를 부풀리거나, 희생자들보다도 건립자와 살아남은 자를 더 칭송하는 것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엄청난 규모와 정성으로 마련된 우리의 전쟁 기념관에도 6.25 전쟁에서의 민간인 저항사(抵抗史) 분야는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6.25가 이제는 반세기의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이쯤 되었으니 이제는 6.25를 재 조명하여 우리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군과 국민들이 손을 잡고 함께 국방의 성을 쌓아야 합니다.
이 글은 독수리 유격대나 우리 자신들을 내세우고 자랑하기 위하여 쓰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젊었던 옛날에 이런 글을 썼다면 우리가 이렇게 나라를 위하여 장하게 싸웠다는 자만과 자랑이 되겠지만 우리는 지금 80을 넘나드는 노년으로 인생과 사회에서 열외로 서 있습니다.
이제서 자랑을 하면 무엇하고 칭찬을 받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가 전쟁터에 나선 것은 전쟁을 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도 전쟁을 피하고 싶었고 죽음을 전제로 하는 전쟁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해서는 안 될 것 같고, 우리가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무너질 것 같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일부의 그릇된 무리로부터 총살과 적진추방(敵陣追放)이라는 만행을 당하면서도 우리는 일념으로 구국(救國)을 생각했고, 주위로부터 도망자라는 누명을 들어도,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우리는 침묵하며 구국전선을 지켜 왔습니다.
우리는 오르지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라를 지켰을 뿐입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지금에 와서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의 자랑을 남기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후세들에게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싶고, 이 정신을 역사 속에 흐름으로 남겨서 만세에 두고 대한민국을 지켜가고 싶은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가 “독수리유격대전적비”를 세우고 해마다 현충의 행사를 가지는 것은 함께 전장(戰場)을 누비다 전사한 전우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청춘은 피지도 못한 채 떨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분향할 후손들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시신도 흙으로 잦아들고 흔적을 잃었겠지만 그들의 영혼은 아직도 격전에 산야에서 갈피를 못 잡아 방황하고 있을 겁니다.
이들에게 향을 피워 명복을 빌며 이제는 여기에 자리하고 편히 쉬기를 바며 나라위하는 마음을 후대들에게 전해 가려는 것입니다.
독수리 유격대의 창설 배경
우리 독수리 유격대가 정식적으로 참전의 신념을 가지고 전투부대로서 창설한 것은 1950년 11월 포천 신읍에서입니다.
대원은 포천 출신을 주축으로 하여 63명(이북 출신2명 철원 출신2명 가평 출신1명 포천 출신58명)으로 조직하고 유격대장 부대장 작전관 교육관 보급관의 지휘부와 3개 소대를 두어 소대장 향도, 분대장으로 편성을 하였습니다.
8.15 해방 후 미쏘(美蘇) 양군의 진주로 3.8선이 그어지자 우리 포천은 3.8선의 경계가 되어 남북의 대립이 첨예한 곳이었고 6.25전쟁 중에서도 전략적 요충지로서 공산군들의 공격 주로가 됐습니다.
인천 상륙작전과 9.28 서울 탈환의 여세를 몰아 진격하는 아군은 평양을 선 점령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진격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우리 포천에서도 양문에서 공산군 일부가 저항을 하여 교전이 있었을 뿐 국군은 일사천리로 대로를 따라 북진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국군이 압록강의 초산과 혜산진까지 진격하여 점령을 했을 때에도 우리 관내인 내촌이나 도평리 약사골 등은 공산군 패잔병들이 득시글거렸습니다.
낯 과 밤에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서로 바뀌어 달렸다는 말처럼 이곳은 낯에는 대한민국 치하였고 밤에는 빨갱이들이 산에서 내려와 약탈과 살생을 일삼는 공산치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치안을 유지하고 공산분자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우리 독수리유격대가 조직된 것입니다.
독수리 유격대원의 신분 배경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찾은 우리 국민은 모두들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장래를 설계했으며 국가와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도 대단한 것이 이었습니다.
이러한 국민적 관심은 미소의 양진이 3.8선을 경계로 하여 진주하자 공산 진영과 민주 진영의 극한적인 대결로 증폭 되였으며 3.8선을 안고 있는 우리 포천에서는 좌우익 간에 생사를 거는 투쟁으로까지 대립이 됩니다.
3.8선을 사이에 둔 일동과 이동은 서로 간에 3.8선을 넘어가 약탈과 방화 납치 첩보 테러 행위가 계속됩니다.
이북에서 반동으로 몰려 숙청을 당하거나 노동당에 반대하여 남쪽으로 월남한 반공 청년들이 조직한 것이 서북청년회였고 이들은 공산당주의 타도에 최 일선에 섰던 사람들입니다.
한편 7사단 9연대는 의정부에 주둔하고 포천은 1개 대대가 방어를 맡았기 때문에 포천의 험한 지형과 전략적 중요성에 비하여 방어력은 절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찰과 현역 부대에서는 서북청년단원들을 개별적으로 무장시켜 3.8선 이북에 침투시키고 정보
수집이나 공작활동에 이용하여 왔습니다.
최종성(창설 대장) 김익수(2대 대장)씨를 비롯하여 정보원으로 불리든 이들이 주동이 되어 독수리유격대를 조직하였고, 대원들 역시 가족들이 공산당(노동당)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독수리유격대의 반공정신과 복수심에 서린 대공활동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공산군들이 국군이나 경찰보다도 서북청년단을 제일 무서워했다는 것은 넓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즉 독수리유격대는 공산당에게 핍박을 받았거나 이에 반하는 반공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선 의용 유격부대였습니다.
17 연대 1대대와의 합류
9.28수복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한 아군은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듯 했으나 중공군의 공세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됩니다.
포천에서 창설된 독수리 유격대는 육군본부의 정식으로 호출부호를 받기 위하여 검열을 신청하고, 포천 초등학교에서 제식훈련과 전술훈련을 받았습니다.
반면 북진하던 국군은 중공군의 총 공세로 전황이 크게 불리해 지자 후퇴를 거듭 합니다.
독수리유격대도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육군본부 검열을 포기하고 일동으로 유격대 본부를 옮겨 수입리 산내지 낭유리 사직리 광산골 백운동 약사골 등에서 공비 토벌과 수색 정찰에 임합니다.
한편 후퇴하여 운담에 주둔한 국군 2사단 17연대 1대대와 합류하게 됩니다.
병원(兵員)의 보충이 절실하고 지형과 지역 정보에 어두운 17연대 1대대와, 후퇴를 하게 되면 보급지원에 어려움이 있을 독수리 유격대는 서로의 보완을 위하여 합류하게 됩니다.
50년 12월 31일 22시경 수입리로부터 기습한 중공군에 밀려 후퇴를 시작한 1대대와 독수리 유격대는 청계골. 화현. 강구남. 청평. 양수리. 양평을 거처 충북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에 주둔하게 되며 이때 아군은 후퇴를 멈추고 반격을 위해 부대를 재편성하게 됩니다.
징집을 받아 피동적으로 동원된 현역들과는 달리 스스로 자원하여 참전한 독수리 유격대의 전투 능력은 현역을 능가하는 것이었고 스스로의 자존심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역 부대는 멀리 후퇴를 하여도 유격대원들은 적진에 남아 유격전을 펴기도 했고, 현역이 감당하기 어려운 작전을 도맡아 수행해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 유격대는 민간인 신분 이였기 때문에 현역과는 차별된 보급 지원을 받아야 했고, 독수리유격대원들은 “어려운 작전은 우리가 도맡아 수행하는데 왜 우리가 현역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는 식의 불만이 독수리 유격대원들로부터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편 부대 후퇴를 멈추고 반격을 준비하던 국군은 부대를 재편성을 하는 과정에서 17연대 1대대 부대대장 김영필 대위가 32연대 3대대장으로 전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32연대 3대대로 부임한 김영필 대대장은 자신의 부대 병력들이 타부대로부터 차출되거나 낙오병 등 응급으로 모집된 수준 이하의 병력이라는 판단을 하고는 전력의 보완을 궁리하던 끝에 17연대 1대대에서 제대로 보급 지원을 해주지 않아 불만을 가지고 있는 독수리 유격대를 자신의 부대로 데려 올 것을 계획합니다.
17연대는 김영필 자신이 먼저 근무하던 부대이므로 김영필은 연대 본부와 1대대 본부에 전화를 걸어 독수리 유격대의 정황과 근무 일정 등을 파악하고 32연대 본부에 승인과 차량 지원을 받은 후 휘하의 정보장교 박영식 소위를 시켜 독수리 유격대를 다른 사람(17연대 1대대) 모르게 자신의 부대로 수단껏 데려 오도록 명령합니다.
독수리 유격대에 대한 모든 상황 정보와 검문소 통과 증명서 차량 등을 32연대에서 지원 받은 정보 장교 박영식 소위는 160여리 떨어진 유격대 매복지로 가서 상황이 있으니 출동해 달라며 대원들을 일제 도요다 트럭 2대에 태우고 본대로 돌아와 나머지 잔류 대원을 마저 태워 32연대 3대대로 옵니다.
유격대원들이 3대대에 도착하자 김영필 대대장이 마중을 나와 환영을 하면서 “사실은 전투상황이 아니고 우리가 여러분을 1대대보다 월등하게 지원을 해 줄 테니 우리와 손잡고 일(작전)합시다.
내가 최대한의 지원을 하겠습니다.”라며 합류를 원했습니다.
독수리 유격대 역시 전부터 독수리 유격대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김영필 대대장을 좋아했기 때문에 쾌히 응낙하고 3-4일을 휴식한 다음 3대대 현역과 함께 작전에 임합니다.
얼마 후 17연대 1대대장 유창훈 소령은 독수리 유격대가 없어진 것을 알고 수소문한 결과 자기 휘하에 있다가 전속한 32연대 3대대장이 데려 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격노하며 3대대장 김영필 대위에게 유격대를 원위치(1대대로 복귀) 시키도록 요구 하지만 3대대장은 유격대가 민간인 신분이므로 특정 부대에 예속될 이유가 없고 유격대 또한 3대대에 있기를 희망한다는 이유를 들어 돌려보낼 이유가 없다고 거부를 합니다.
그러나 유창훈은 유격대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김영필을 문제 삼아 군법회의에 회부토록 하겠다고 위협을 했고 김영필은 할 수 없이 유격대를 17연대로 돌아가도록 종용 하지만 유격대 측에서는 “우리가 너희들 장난감 인줄 아느냐? 너희들 17연대고, 32연대고 다 필요 없다.
우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펴 갰다”며 대항을 합니다.
그러나 입장이 난처해진 김영필 대대장은 17연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몹시 어려워진다며 17연대 1대대로 복귀할 것을 간곡히 요구했고 유격대는 17연대에서 보낸 G. M. C. 2대를 타고 17연대 1대대로 복귀합니다.
독수리유격대 간부진 총살과 대원의 적진 추방
51년 2월 5일 저녁 10시경 17연대 1대대에 도착한 독수리 유격대는 군장을 풀어놓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하여 집합하자 무장 현역들로부터 포위를 당한 후 도망병이라는 이유로 창고에 감금되고 간부진(유격대장 최종성, 부대장 안**, 작전관 최종철, 교육관 고관도 보급관 최규동)5명이 정보과로 끌려갔습니다.
1대대 측에서는 유격대원들에게 도망병이라고 추궁을 하며 처벌한다고 하자
유격대 간부들은 “32연대에서 차량과 인솔 장교까지 보내 출동을 요구해서 응했는데 무슨 도망이냐? 우리는 전쟁을 하려고 간 것이지 도망간 것이 아니다.
너희들 맘대로 해라!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 간부들이 책임을 진다.
우리 대원들에게는 절대 손대지 말라”며 항의를 했고 1대대장 유창훈은 김영필 대대장에게 배신을 느낀데다가 유격대가 조금도 굽혀 들지를 않자 총살을 시키고 맙니다.
창고에 감금되어 밤을 지새운 대원 58명은 51년 2월 6일(음력 설날)아침으로 떡국을 먹고 난 후 간부진 5명이 집총한 현역들에게 호위되어 와서는 창고 입구에 서서 자신들의 장갑과 털모자 등을 벗어 대원들에게 나누어 준 후
“우리들은 이제 여러분과 같이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들은 반공을 위하여 뭉쳤고 나라를 위하여 싸우려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절대로 흩어지지 말고 끝까지 나라를 위하여 잘 싸워 주기 바란다.
그리고 몸조심해서 전쟁이 끝나면 성한 몸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기 바란다.
이곳(17연대 1대대)에서 여러분을 받아 주지 않으면 김영필 한태로 가라
그 사람은 여러분을 잘 도와 줄 것이다.”는 당부를 하고는 끌려 나가려다가 다시 되돌아서서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한 후 현역들에게 인도되어 나갔으며, 얼마 후 총살되는 총성이 들렸습니다.
간부들이 총살된 후 58명 대원들은 밖으로 불려 나가 무장한 현역들의 경계를 받으며
“왜 도망을 갔느냐?
앞으로 우리 1대대에 있겠느냐? 아니면 32연대로 가갰느냐?”는 문초를 받았고 간부들을 총살한 현역들이 그 때까지 살기등등하게 흥분되어 있기 때문에 유격대원들은 한결같이
“매복 근무 중 차량과 인솔 장교가 와서 타라고 하기에 급하게 상황이 생겨서 출동하는 줄 알고 탔는데 가서 보니 32연대더라.
앞으로 여기(1대대)서 근무하겠다.”고 답변을 했으나
유창훈 대대장이 노란색 표지의 책을 들고 나와 너희들은 도망병이다.
군법에 의하여 총살을 받아야 한다.(군법 9조에 의해서 처벌한다. 라고 증언하는 대원도 있음)
“그러나 간부들이 처벌을 받기 때문에 너희들은 살려 둔다.”고 선언을 했으며
이어서 정보 장교가 “너희들 같은 부정한 놈들은 우리 부대에 필요 없다.
우리 부대에서 즉시 떠나가라!
너희들 같은 놈들에게는 우리의 군복을 줄 수 없다.
그러니 군복은 모두 벗어 놓고 가라.”며 팬티만 남기고 신발과 양말까지 발가 벗긴 후 공포를 쏘며 강(당시에는 달래강 이라고 불렸음)건너 적진(중공군 점령지였음)으로 가라 것이었습니다.
그 때가 구정(舊正)이었기 때문에 얼어붙은 강을 맨발로 건너갔지만 적지(敵地)에서 함부로 이동 할 수도 없고, 현역들이 초병을 세워 지키기 때문에 강을 되돌아 건너 갈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유격대원들은 적군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바람막이가 되는 골짜기에서 모여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알몸인 채 적진으로 추방된 유격대원들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며 앞으로의 진로를 의논한 끝에 소대장으로서 최고 연장자였던 김익수씨가 “간부들도 다 죽고 우리가 여기서 흩어지면 인민군한테 잡혀 죽거나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다.
대장님이 말했듯이 우리가 사는 길은 싸우는 수밖에 없다.
우리 유격대를 다시 하자.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김영필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김영필이를 찾아가야 한다.
32연대가 단양으로 이동을 한다고 했으니 일단 단양으로 가자.”는 주장을 했고 여러 의견들 중에서 김익수씨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며,
그를 후임 대장으로 추대한 후 32연대 3대대를 찾아가 다시 무장을 하고, 의성. 청송. 안동. 예천. 풍기. 제천. 단양 등지를 돌며 일월산을 근거지로 하여 팔공산까지 세력을 뻗치든 인민군 10사단 유격대와 공비들을 토벌하고 양평. 청평. 가평. 백운산. 국망봉. 광덕령을 넘고 육단리. 금성지구까지 이르면서 휴전을 앞두고 한치의 땅이라도 더 뺏으려는 금화지구의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치렀습니다.
독수리 유격대는 군번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전과를 올려도 현역 부대의 몫이 되고 유격대원이 전사(戰死)나 피해(전상)를 입어도 근거나 기록이 남지 않아 군번 없는 용사로서의 외롭고 힘든 의병(義兵)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역이 감당하기 어려운 작전은 독수리유격대가 도맡아서 수행했고 한편으로는 대원이 전사(戰死)를 하거나 피해를 당해도 상급 부대에 보고 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무리한 작전에 소모품격으로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독수리유격대의 평가
독수리 유격대는 휴전이 임박하자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 부대는 해체하라는 국방부령에 의하여 해산되었습니다.
해산된 유격대의 일부는 현지 입대를 하거나 귀향 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 유격대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 도망을 치다가 붙잡혀서 간부들이 총살을 당했다는 누명을 써야 했고 세상에 인심들도 일방적으로 국군에게 총살을 당했다는 사실만 부각 시킬 뿐 진실과 독수리 유격대의 애국 일념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나마 국방부에서 독수리 유격대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고 독수리 유격대의 정신과 공훈이 높게 평가되어 전적비를 건립하고 16명의 위패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봉안되었음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독수리 유격대 조사와 전사(戰史) 발굴에 관여했던 국방부 조사대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는 총살사건 당시 최종성 대장 등 간부진과 유격대원들이 보인 구국신념(救國信念)에서 독수리유격대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에게 총살을 당하면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던 간부들이나 엄동설한에 발가벗겨져 적진으로 추방되는 극한의 수모를 당하고서도 다시 총을 들어 나라를 지킨 이들은 반공에 미치고 나라에 미친 사람들이 아니 갰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어느 곳에서 어떻게 싸웠으며 전과(戰果)가 어떻고를 따져 볼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국군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는 지휘부의 충심(忠心)과 엄동설한(嚴冬雪寒) 속에서 발가벗겨져 적진으로 추방을 당하고서도 다시 총을 들어 대한민국 수호에 나섰던 독수리유격대원들의 투철한 애국정신이 증명된다는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들의 평가였습니다.
독수리유격대 전적비의 건립
독수리유격대는 2대 유격대장 김익수씨와 현 기념사업회장 박홍진씨, 대원 이지용씨 등 여러분이 軍 당국에 나가 애를 쓰심으로서 국방부 조사대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전사실로부터 6.25 전쟁에 참전한 3대 민간 저항부대 중 하나로 평가를 받아, 독수리유격대전적비 건립의 계기를 마련하고, 국방부와 재향군인회 포천군의 후원과 포천문화원 최종규 원장님의 주선 속에 관계 당국의 지원을 받고, 생존대원과 전몰대원 유족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정성을 모아 전적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반만년입니다.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진 우리는 아쉽게도 이 역사를 지켜 온 자료의 전쟁기념물이 빈약할 뿐 아니라.
거의가 6.25 관련 전적비가 주류입니다.
반면에 이 전적비들은 구국정신보다는 지나치게 민족상쟁의 아픔을 상징하고 있으며 때로는 신뢰하기 어렵게 전적(戰績)이 부풀려지거나 아니면 공훈의 주체보다는 전적비를 세운 사람들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주안하면서 독수리유격대전적비는 남북이 통일되어도 역사적 가치와 교훈을 남기기 위하여 독수리유격대의 구국정신을 동족상쟁이나 17연대에서 일어났던 유격대원들의 아픔보다 앞세웠습니다.
아울러 민족 통일시대가 오기를 믿으며, “북괴”라는 표현을 “북한공산군”으로 표현하는 최초의 전적비를 세웠습니다.
도와주신 여러 기관 단체의 후원도 고마웠고, 그 고마움을 표현으로 남겨야 할 것 같았지만 앞에 뜻을 두어 도와주신 단체명이나 고마운 분들의 존함도 새겨 넣지 않았습니다.
특히 전적비 건립에 심혈을 기우려 주신 정석균 국방부 전사편찬책임위원님과, 최종규 포천 문화원장님께 지금도 깊은 감사와 함께 죄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독수리유격대전적비 비문
독수리 유격대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포천지역의 반공 애국청년 63명이 1950년 11월 포천군 신읍에서 조직되어 국군 제 2사단 17연대 및 32연대와 합류하여 경북 의성, 청송, 안동, 예천, 풍기 지역과 충북 제천, 단양지역에서 인민군 제 10사단과 공비들을 토벌하고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전투와 현리, 광덕산, 천불산, 734고지, 373고지 및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일사호국의 정신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중 16명이 전사하였다.
본 유격대는 민간인 신분으로 자생 조직되었으나 투철한 애국정신과 구국 신념으로 참전하였기에 그 용맹
함이 뛰어났고 전과 또한 컸지만 자신들의 신분이나 전공에 따르는 상훈에는 초연하였기에 국가에서도 이를 기억하지 못 한 채 여태까지 전몰대원들의 혼령마저도 안치시키지 못하고 39년간을 잊혀져 오다가 1989년 6월 국방부 당국에 의하여 독수리 유격대의 장한 애국지성과 그 명예로웠던 전적을 확인 받게 되었다.
스스로의 사명감이 강했기에 앞장서 국가와 민족을 지켰으며 임무를 다 하고서는 묵묵히 가슴에 묻은 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들의 고귀한 뜻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국방부장관, 재향군인회장, 포천군수, 육군 제 3070부대장의 후원과 생존대원 및 전몰대원의 유족들이 합심협력 정성을 모으고 포천문화원이 이를 주선하여 여기 관음산 기슭에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 9 9 1 년 6 월 6 일
최면택 지음 김진동 글씨
헌 시 (護國星)
호 국 성
최 면 택
부르지도 않았는데
조국앞에 모이고 뭉쳐
이 겨래 이 강토 지켜낸
장한 임들이여
해와 달이 되어
이 나라 살피시고
산천초목 되어
이 강토 감싸소서
전적비 사양
위 치 : 포천군 이동면 노곡2리(낭유리) 산146번지
규 격 : 8.2 미터(화강암)
제 막 : 1991년 7월 30일(1989년 7월 착공- 1991년 6월 완공)
건립주관 : 포천 문화원
기금조달 : 국방부. 재향군인회. 포천군. 유격대기념사업회. 유격대전몰유족회.
시공지원 : 보병 제3070부대.
戰史考證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전사실.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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