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중꺾마중꺾마중꺾마
1995년 6월 12일 아침 9시경,
은평구 모 아파트 경비원은 아파트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는 걸 보고 119에 신고함. 작은 화재라 불은 금방 껐는데...문제는 욕조 속에 시신 두 구가 있었음
해당 아파트에 거주하던 가족은
남편 외과의사 L씨
아내 치과의사 C씨
두살짜리 딸이었음.
이 중 시신은 아내인 C와 딸이었음. 둘 다 목 졸린 채 욕조에 잠겨 있었고, 아내의 옷은 팬티만 남고 모두 벗겨져 있었음.
경찰은 누군가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안방에 불을 질렀다고 판단함. 근데 집안은 딱히 어질러진 게 없었고, 사라진 물건도 없었고, 돈과 귀금속도 그대로 있었고, 현관문은 얌전히 잠겨 있었음. 누가 봐도 강도의 소행은 아님. 경찰은 자연스럽게 남편을 의심하게 됨.
남편은 강릉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다 사건 한 달 전 복무를 마치고 개인 병원 개업을 준비하고 있었음.
(공중보건의 = 의사가 군대 가는 대신 보건소 같은 공중보건업무에 종사하는 거. 군 복무를 대체하는 거임ㅇㅇ)
사건 당일은 남편의 정형외과 개업일이었음. 남편은 아침 7시에 아내와 딸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했고, 8시쯤 병원에 도착했다고 진술함. 이 부분은 경찰도 인정을 함.
결국 쟁점은 피해자의 사망 시각임.
피해자가 아침 7시 이전에 죽었다면 남편의 범행이 가능한 거고, 반대로 아침 7시 이후 사망했다면 남편의 범행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함.
이 중 경찰이 제시한 건 시반과 강직이었음.
- 11시 30분 경 시신 검안을 할 때 아내의 지문을 뜨기 위해 손가락을 폈는데, 상당히 딱딱했음. 손가락 관절까지 강직이 진행되려면 사망 후 최소 6~12시간이 경과해야함. 즉 피해자는 아침 7시 이전에 사망했다.
- 또한 아내의 시신에서 양측성 시반이 보였는데, 이런 시반이 보이려면 사후 6~8시간이 경과해야함.
거기에 경찰은 집을 수색하던 중 남편의 옷 바지에서 영화 수십개 목록이 적힌 쪽지를 발견함. 이 중 하나가 <위험한 독신녀>였는데, 극중에서 여자가 살인 후 남자의 시신을 욕조에 빠뜨려 사망 시각을 조작하는 장면이 있음.
경찰이 이 영화를 봤냐고 질문하자 남편은 모른다고 부인함. 근데 남편이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던 94년에 강릉에서 두 번이나 이 영화를 대여점에서 빌려본 기록이 있었음. (남편은 상당한 영화광이고 공중보건의는 특성상 항상 칼퇴라 강릉에 근무하던 시절 수백편의 영화를 봄)
또한 아내는 92년도부터 인테리어업자인 다른 남성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음. 아내는 치과의사였는데 자기 병원 진료실에서 내연남과 관계를 가지고, 일기에 <남편과 잠자리를 하면서도 내연남이 생각났다> 라고 적음. (남편은 아내의 외도를 몰랐다고 진술)
남편은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장모가 평소 남편을 구박하고 경제적인 요구를 많이 해서 처가와의 불화도 있었음. 살해 동기까지 충분한 상황이었음ㅇㅇ
1심에서 남편은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음.
이후 남편은 항소하면서 갑자기 사건이 변하게 되는데...
시신의 주변 온도가 뜨거울 경우 강직은 빠르게 진행됨. 즉 욕조 물이 뜨거웠다고 가정하면 피해자가 오전 7시 이후에 사망했다라도 검안 시간인 11시 반에 손가락 관절이 굳어있을 수 있음.
사망 추정 시각을 아는데 가장 정확한 건 직장 온도임. 하지만 95년 당시 대한민국은 법의학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고, 피해자의 직장 온도와 욕조 안 물 온도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음.
남편의 변호인 단은 의뢰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스위스의 저명한 법의학자인 토마스 크롬페허를 한국 법정에 초빙함. 토마스는 직장 온도와 물 온도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 시각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남편이 출근한 7시 이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증언함.
시신이 발견된 이유가 화재였잖아?
검찰은 남편이 오전 7시 이전에 불을 조그맣게 피워놓고 나가 알리바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가능하더라고 주장함.
이에 변호인단은 1800만원을 들여 현장과 똑같은 세트장을 짓고 실험하는데, 불이 난 지 10분 만에 연기가 바깥으로 나감. 즉 화재는 경비원이 신고한 오전 9시 전후로 일어났다는 거임.
1심 사형이었던 판결은 2심에서 무죄로 바뀜.
대법원은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하는데 파기환송심에서 또다시 무죄가 나오고, 대법원에서 무죄가 최종 확정 되면서 이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음. 재판만 5번 했고 무려 8년의 시간이 걸림.
남편이 범인이라고 추정할 근거는
1. 위험한 독신녀를 두 번이나 빌려봤으면서 끝까지 모른다고 진술한 점에서 (남편의 살해 여부와 별개로) 이 사건에서 남편이 완벽하게 진실하지 않다고 추론할 수 있음. 거짓말 탐지기 또한 대부분 거짓 떴음
2. 보통의 강도나 살인자가 침입한다면 굳이 시신을 욕조에 넣을 필요 없음. 언제 사람이 들어올지 모르는데 얼른 죽이고 나가는 게 정상임. 두 살 난 딸의 시신까지 욕조에 담궈놨다는 점에서 범인은 사망 시각에 혼선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고, 실제로 이 사건의 쟁점은 사망 시각이었음.
3. 또한 집안 물건이 전혀 어질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집을 방문한 적 있거나 피해자와 잘 아는 면식범의 범행이라고 추론할 수 있음. 피해자의 내연남은 사건 당일 다른 지역에 있었단 게 이미 증명됐음. 더군다나 두살짜리 아기는 목격자의 역할도 못하는데 아기까지 죽였다는 점에서 엄청난 원한 관계여야 할 텐데, 피해자에게 그 정도로 심한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었음. 남편 외에는 딱히 범행을 저지를 용의자가 없는 상황.
반대로 남편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부분
1. 위에 썼듯 남편은 상당한 영화광이었고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동안 수백편의 영화를 봤음. 위험한 독신녀를 봤는데 까먹었거나 그냥 빌려만 놨다가 안 봤을 가능성도 있음.
2. 사건 당일은 남편의 병원 개업일이었음. 병원을 개업하는데는 큰 돈이 들어가고, 이 부부는 경제적으로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음. 당시 변호사도 남편의 누나가 동생의 무죄를 주장하며 눈물로 읍소한 걸 듣고 몇 차례 남편을 접견한 끝에 무죄를 확신하고 자발적으로 나선 변호사였음. 아파트 담보 대출 등으로 간신히 개업 비용을 마련했는데 다른 날도 아닌 개업 당일에 살인을 저지른다는 건 좀 이상함. 만약 남편이 시신을 욕조에 넣어 사망 조작 시각을 은폐하겠다는 계획을 미리 세웠다면 억 단위의 돈을 들여 개업을 했을까?
3. 남편이 범인이라면 너무 멍청한 살인임. 셋이 살던 집 안에서 둘이 죽었다? 누구나 나머지 한 명을 의심함. 더군다나 남편의 직업은 의사임. 의학적 지식을 활용한 계획 살인이라고 의심할 수 밖에 없는 현장을 만드는 건 나 의심해달라고 호소하는 수준임.
즉 남편이 범인이라면
개업비용+사건 이후 여기저기 조사 다니며 벌지 못할 돈까지 수억의 경제적 손실을 각오하고,
아내와 딸을 살해한 후 욕조에 시신을 넣어 사망 추정 시각에 혼란을 주고, 지연 화재를 일으킬 만큼 치밀한 계획을 짠 끝에
자기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살인을 저지른 거임.
보통 계획 범죄는 자기가 용의선상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자기한테 최대한 이득이 오도록 판을 짬. 하지만 이 사건에서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사람은 남편임. 개업 당일에 사건이 벌어져 수억의 돈을 날렸고, 수개월 간 수감 생활을 했고, 만약 2심에서 판결이 뒤집어지지 않았다면 사형 당할 수도 있었음. (당시는 사형 집행했음.)
그 노력과 그 돈이면 차라리 시신 없는 살인을 만들거나 제 3자를 고용하는 게 여러모로 빠르고 편리함.
어쨌든 이 사건은 8년의 공방 끝에 미제 사건으로 남음.
피고인이 해당 범죄를 저질렀단 걸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해내는 게 검찰의 의무고, 이 사건에서 검찰은 실패했음. 이 글을 읽는 여시들 중에서도 몇 명은 남편이 범인이라고 생각할 거고 몇 명은 남편이 억울하다고 생각할 텐데 이럴 경우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게 법의 원칙임. 천 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무고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되는 게 법이니까 ㅇㅇ...
풀려난 남편은 현재 다른 여성과 재혼 후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구 함. 여담으로 이 사건 피해자인 아내 분이 백지연 앵커의 베프라 함. 백지연 앵커의 소설 <물구나무>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쓴 거래.
난 누가 범인인지 모르겠음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