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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뉴스데스크]학폭에 맞섰던 '영웅'..."착한 아이, 왜 먼저 떠났을까요"

작성자잊지말아주세요|작성시간23.04.01|조회수1,678 목록 댓글 4

출처 : 여성시대 (본인 닉네임)
잊지말아주세요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913885&SRS_CD=0000015854#cb

[토요일 오후 6시 34분] 든든한 아들이자 유능한 IT개발자 문효균씨

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편집자말]

아들 영정이 놓인 빈소에서 아빠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과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가까운 친구의 말이었다.

"아버지, 저희는 효균이를 '영웅'이라고 불렀어요. 효균이가 반장일 때 일진 애가 힘이 약한 친구를 괴롭혔었거든요. 어느 날 '빵셔틀(빵을 사오도록 하는 괴롭힘)'을 시키는 것을 본 효균이가 일진 애 얼굴에 돈을 집어던지며 '네 손으로 직접 사먹어'라고 그러더라고요. 일진 애가 효균이게게 주먹을 날렸고 효균이도 가만히 있지 않았죠.

담임 선생님께서 싸운 두 사람을 모두 혼내면서도 돌아가는 효균이를 토닥이며 웃어주셨다고 해요. 그렇게 교실로 돌아온 효균이에게 반 친구들이 박수를 쳐줬어요. 저도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 방황을 많이 했는데 실은 효균이 아니었으면 나쁜 짓이나 하며 살아갔을 거예요."


아빠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중학교 시절 급식비가 없는 친구를 걱정하는 등 아들이 바른 마음을 가졌다는 걸 알았지만 이런 얘기는 처음이었다. 그저 운동이 좋아 고등학교 때 축구팀을 만든 줄 알았는데 그것도 "힘이 약한 애들을 일부러 가입시켜 나쁜 애들로부터 보호"했다는 게 아들 친구의 설명이었다. 아빠는 먼저 떠난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왜 하늘은 이렇게 착한 아이를 일찍 데려갔는지'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그 이야길 듣는데 미치겠더라고요. 평소 나쁜 짓 하다 그렇게 됐으면 죗값을 받았다 생각할 텐데 왜 그토록 착한 아이를... 주변에 보면 나쁜 짓 하는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정직하게 약한 사람을 지켰던 아들은 왜 먼저 떠난 걸까요."

지난 3월 20일 전북 전주 풍남문 광장에 설치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전주합동분향소'에서 고 문효균(1992년생)씨의 아버지 문성철(55)씨를 만났다.

아빠를 무너뜨린 한 마디

효균씨는 유능한 IT개발자였다. 중학교 때부터 주변에 컴퓨터를 조립해주며 스스로 용돈을 벌었을 정도로 이 분야에 관심이 컸다. 그는 4년 전 들어간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항상 투입되곤 했다. 업무뿐만 아니라 회사 동료들도 잘 챙겨 '분위기 메이커'로 불린 효균씨였다.

"효균이는 우리 부부의 인생이며 미래를 살아갈 희망이자 꿈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지치더라도 아이들(효균씨 형제) 얼굴을 보는 순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효균이가 아이였을 땐 뒤뚱뒤뚱 걷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벅찼고. 유치원 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놀도록 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그리고 취업한 직장인이 될 때까지 반듯한 모습으로 성장한 아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행복했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아빠는 아내와 함께 내장산을 찾았다. 온 산을 물들인 단풍을 보며 "더없이 행복하고 좋은 날"을 보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아빠는 TV에서 이태원 소식을 접했다. 취업 후 서울로 독립한 효균씨가 잠깐 떠올랐지만 이태원에 갔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효균씨 할아버지에게 "효균이 전화를 용산경찰서에서 받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빠는 "지옥이 시작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실종신고를 한 아빠는 얼마 후 아들이 이대목동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안내를 받았다. "병원에 있다는 말만 해주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면 누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때까지 아빠는 아들이 다쳤을 거라 믿고 있었다. 병간호를 위한 이런저런 짐을 챙기는데 전주의 한 파출소에서 경찰이 찾아왔다. 그는 "서울 양천경찰서 형사에게 전화를 해보라"며 연락처를 넘기고 떠났다. 아빠는 전화를 걸었다.

"우리 애가 이태원에 갔다가 지금 이대목동병원에 있다는데 다친 것 같아요."
"..."
"지금 짐 싸서 (병간호 하러) 올라가면 될까요?"
"아드님이 사망했습니다."

그 시각 서울에 살던 효균씨 동생은 "형이 다쳐서 입원한 줄로만 알았던" 이대목동병원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아빠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형이 사망했단다"라고 전했다. 동생이 가장 먼저 영안실의 효균씨를 마주했다. 아빠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무너지고 말았다.

"아빠 빨리 와. 무서워."

국가의 공백

하루아침에 유족이 돼버린 아빠는 하루라도 빨리 효균씨를 고향 전주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졌다.

"사망진단서가 나와야 효균이를 데려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서류 절차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어서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물었죠. 다들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정부와 서울시에서 '전담 공무원을 일대일로 붙인다'고 발표했었는데 그게 다 허상이었습니다. 나와 있는 공무원들 모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나가라고 하니까 그냥 나와 있는' 모습이었어요.

한참 뒤에 '오늘은 어렵겠다'는 안내를 받고 숙소로 이동해 있는데 새벽 1시가 넘어 이번엔 검사에게 전화가 왔어요. 부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압사라고 다 발표됐는데 무슨 부검이냐'고 항의하자 그제야 서류 절차를 밟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넘어갔지만 다른 유족 중엔 검사 전화에 위압감을 느껴 부검을 허락한 분도 있어요."

아들의 장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그 시간을 "영혼 잃은 허깨비처럼" 보내던 아빠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소식을 전해온 사람은 이태원 참사로 숨진 한 여성의 친구였다. 서울과 전주의 장례식장에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는 그는 '애인 사이였던 효균씨와 제 친구가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가 숨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는 아빠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참사 당시 효균씨의 행적이다. 참사 후 5개월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빠는 아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죽었는지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다.

지난 2월 아빠는 아들 애인의 생전 이야기가 담긴 기사를 접했다. "결혼을 한다면 이런 남자랑 하고 싶다." 기사에는 그녀가 평소 친구들에게 했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아빠는 아들의 소박했던 꿈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아이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겁게 여행하고 싶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살아 있었다면 두 사람이 결혼도 하고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대단한 걸 바라지도 않고 그렇게 성실하게 살던 이들에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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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출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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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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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잊지말아주세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4.01 댓삭 뭐였어..?
  • 작성자옳이곡이 | 작성시간 23.04.01 진짜 너무 마음 아프다... 꼭 그때 책임자들 제대로 처벌 받길
  • 작성자똥딩 | 작성시간 23.04.01 정말 좋은 사람이었네… ㅠㅠ
  • 작성자못먹어도고 | 작성시간 23.04.01 안타깝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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