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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똑똑한 여자는 불행하다? '나혜석 콤플렉스'

작성자고등어뱃살냥|작성시간23.04.11|조회수2,459 목록 댓글 2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부먹수집가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소개해주려고 달려왔어!


바로바로 <나혜석 콤플렉스> !

나혜석 콤플렉스란, 똑똑한 여자, 자기 뜻대로 산 여자는 시대를 너무 앞서 갔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논리,

사회심리를 뜻해.


남자들은 지들이 감당이 안되는 똑똑한 여자들의 인생을 입맛대로 해석해왔지. 쉬익쉬익

그래서 똑똑한 세 여성들의 진짜! 인생을 알아줬음 해!


1. 나혜석

나혜석은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야. 작가,시인이면서 동시에 여성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지.





(위키백과 참고)

그 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그를 따라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림, 조각, 언론, 문필, 시 등에서 활동했다. 1927년 유럽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3] 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때 여러 남성들과의 연애로 문제가 되었으나 곧 그림활동에 매진하던 중,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뒤에 최린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된다.

1935년 정조 취미론을 발표, 순결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즉, 해외도 돌아다니며 굉장히 능력있던 '신여성'이었어. 특히,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던 헬조선후기 알고있지?

사람 의식수준이 그렇게 빨리 바뀌겠어..? ㅎ 아무튼 노답이었던 상황에서 충격적이고 신박하게 감-히 아--낙네가






"ㅎ 내가 정조를 지키든 말든 존나 니 아랫도리나 신경써 ^^ ㅗ"

라고 말한 걸로도 (21세기 말투 호환) 유명해


얼마나 눈꼴시려웠겠어 거기다 이혼도 하고 남자 관계도 복잡하고..

찌질이 조선 꼰대와 총독부의 크로스로 나혜석은 굉장히 많은 억압을 받고, 파리행이 좌절되기도 했어.

그리고 결국 정신착란 증세와 파킨슨 병등을 앓으며 돌아가셨어...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간 자의 당연한 말로' 로만 기록되어왔어.

하지만 다들 알겠지? 사실 굉장히 명석하고 당당한 여성이었으며 찌질한 남성들의 공격을 받았던 거야.





화가 이중섭도 가족과 헤어져 정신분열로 자해를 거듭하다 돌아가셨어. 말년이 씁쓸하고 비참했던건 나혜석,이중섭

둘다 같지만 나혜석은 똑똑한 여자라서 당연히 불행해져야 했고, 이중섭은 '위대한 화가의 치열한 예술혼'으로 기억됐어.


즉, 나혜석 콤플렉스는, 잘못은 사회가 아니라 똑똑한 여성에게 있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협박이지.



 

2.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하면 뭐가 떠올라?


사실 나도 찾아보기 전까진



이런 넘나 상냥한 백의의 천사 ~ 라고 생각했어.


BUT She is..

나이팅게일은 굉장히 권력지향적이었으며 미소천가라기 보단 강단있는 장교였어.

크림 전쟁에 직접 참가하고 싶었지만,


'엥? 여자는 예쁘고 조신하게 돌봐줘야 하는거 아니냐!!! '



사회의 성역할 고정 관념 때문에 뜻을 이룰수 없어서 간호 '장교'가 되었던 거야.

나이팅게일은 단순히 상냥하게 ^^ ~ 돌봐줘서 상을 받은게 아니라 보건, 위생에 큰 공적을 세워서 국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어.


(두산백과 참고)

나이팅게일은 군진의학과 병원행정의 전분야에 관한 많은 양의 자료를 제출하였으며 수많은 믿을 만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뒤에 이 자료들을 모아 개인적으로 〈영국군의 보건과 능률 및 병원관리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점에 관한 보고 Notes on Matters Affecting the Health, Efficiency and Hospital Administration of the British Army〉(1858)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위원회의 활동 덕분에 1857년에 군의학교(軍醫學校)가 세워졌다. 같은 해 인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그녀의 관심은 인도에 파견된 영국군의 보건에 쏠렸는데, 1859년에는 이 문제를 위한 새로운 왕립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뒤 1868년에 인도 총독부 산하에 최고 권위의 위생국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나이팅게일은 다른 새로운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1860년에는 크림에서의 그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국민들이 기부한 나이팅게일 기금 4만 5,000파운드를 가지고 성 토마스 병원에 세계 최초로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세웠다. 또한 극빈자 진료소에서 일하는 조산원과 간호사들을 교육시키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극빈자 구호소의 개혁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


즉, 나이팅게일은 '돌봄미^^' 가 아니라 혁명가라고 정의해야 정확해.

특히 간호사를 여성의 전문 직종으로 인정받는 데도 일조했는데, 간호과 여시들이 많이 배웠을 거야 ! (설명을 미룬다)




3. 신사임당





oh                      oh

   5만원

oh                      oh


한국 지폐 최초 여성 위인이야. 여성 또한 들어가게 되어 좋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어.

물론 신사임당은 zl존 능력자였지만 결국 '아들 잘 키운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를 짙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쪽짜리 성공이라는 거지.


신사임당 또한 재응과 열정으로 뭉친 권력 지향적인 여성이었어.

학식과 예술성 또한 뛰어났지만



<흔히 아는 포도 그림 일화>


여성이라는 장벽에 막혀 100% 인정받지 못했어.

신사임당은 이에 매우 분개했고, 그 분풀이로 임종 직전 남편에게

"내가 죽은 후 재혼하자 말라."는 유언을 남겼어.


조선의 억압적인 풍속에 따르지 않았던 신사임당은 왜 갑자기 현모양처가 되어버렸을까?


(다음백과 참고) 신사임당은 생존시에 ‘신씨’, ‘동양 신씨’ 등으로 불리며 명성이 자자한 여류화가였다. 당대의 명사 소세양으로부터 ‘신묘한 붓이 하늘의 조화를 빼앗았다.’라고 칭송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당쟁이 한창이던 17세기경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그녀를 화가가 아니라 서인의 종주로 떠받들던 율곡의 어머니로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파의 분쟁을 교묘하게 이용하던 숙종의 환국정치로 인해 입지가 약화된 서인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다.



붕당정치 시절에 한남들이 왜곡시켜버렸지롱 ^ㅠ^ ~ 한 사람이 아닌 어머니로만 남겨버린거야.

물론 신사임당은 지혜로웠고 집안도 잘 다스렸어. 하지만 이는 남성 사회가 수용할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에너지를 쏟을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남성사회 프레임이 생 중, 생 후 제곱으로 크로스되어 신사임당도 엥? 할 기록을 만들어버렸어.






'위대한 여성들'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여성의 삶을 전유하고 싶은 남성의 시선, 욕망일 뿐, '역사적 실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살기 위해서, 현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여성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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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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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호루스 | 작성시간 23.04.11 ㅁㅈㅁㅈ 나혜석 현대적인 해석? 같은거 다 남자시선에서 만들어진 거 더라 ㅋㅋㅋㅋ 어이없었음... 드센 여자만 보면 꼬추가 찌그러지는 남자들 왜사냐
  • 작성자아프다고요 | 작성시간 23.04.11 송시열 가만안둬 존나짱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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