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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눈물한방울](스압)1980년 5월 광주 초등학생이었던 분이 쓴 글.txt

작성자닭강정발산기슭곰발냄새|작성시간23.05.18|조회수2,237 목록 댓글 6

출처 :
entiz/read.php?bn=15#=2351165&page=2&searchType=search&search1=1&keys=광주%2A

*올해 5.18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 참석 후 그 당시 초등학생이셨던 분이 쓰신 글이예요
*원글은 그대로, 달린 다른 분들 댓글은 제가 몇개만 가져왔습니다.


광주출신입니다. 감사합니다.


6학년이었어요.
5월17일 이었나?
2교시가 끝났는데 집에 가라고 했어요.
바로 옆에 있는 전남기계공고 오빠들이 어디론가
막 뛰어가고 학교앞엔 군인들이 있었는데 새까만
몽둥이로 우리를 툭툭 치며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학교는 안갔고 집 근처 조선대에는
군인들이 주둔했고 도청앞에선 매일 데모를 했는데
학교도 안가고 심심했던 저는 도청앞에 놀러 다녔습니다.
그때 어른들은 어떤 멜로디에 맞춰 전두환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석방하라 그러더군요.
전두환 이름을 처음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고 갑자기 조선대에 주둔했던
군인들이 안보이면서 유리창이 다 깨진 버스에는
시민들이 타서 각목으로 차벽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고
어느날부터 어깨에 나무총을 메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김밥도 싸고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는 버스마다
아이스크림, 과자를 막 넣어주셨어요.
고등학생 오빠는 그 버스를 타고 다니다 군인들의 공격에
놀라 화순 근처 어딘가에 내려 유난히 더웠던 그해 5월
집까지 걸어왔다고 했습니다.
생각보다 시내는 평화로웠지만 무서운 이야기가 많았어요.
밤 방송국이 불타오를때 불길은 집에서도 보일 정도였고
헬기가 도청쪽으로 날아간 후 뭔가 엄청난 소리도 났었죠.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 했습니다.
그리고 27일 새벽 집 앞에 천둥치는 소리가 나서 몰래 내다보니
티브이에서나 보던 탱크가 지나가고 그 뒤로 끝도없는
군인들의 행렬이 지나가는데 새벽4시 어스름에 흐릿한
형체와 엄청난 수가 내는 군홧발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디ㅡ.
엄마는 어쩐다냐. 도청에 학생들 다 죽일랑갑다 하시면서
문에 솜이불을 못으로 쳤습니다.
군대가 지나가고 한시간이 지났을까요?
애절한 도움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굉주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요. 계엄군이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라며
어떤 여자의 목소리는 울부짖고 있었고 도청 쪽에서는
끝없이 총소리가 나는 공포의 새벽이었습니다.
총소리가 잦아지며 아침이 왔고 골목마다 계엄군이 들어왔습니다.
골목 첫 집이었던 우리집에 물을 달라며 군인이 들어왔고
그가 메고 있던 총 끝엔 까맣고 날카로운 칼이 달려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모두 죽을거라고 했죠.
총보다 그 칼의 무시무시함은 지금도 선명하게 각인 되었습니다.
학교를 갔더니 같은반 친구의 책상에 국화꽃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갔더니 반사선생님이 안보이셨습니다.
도청앞 상무관에서 본 그 수많은 태극기가 시신을 덮고 있었다는.걸
나중에야 깨달았고 나는 지금도 5월이 되면 칼과 군화소리가
기억나 슬프고 무섭습니다.
오늘 대통령께서 유가족을 안아주실때 엉엉 울었습니다.
80년 5월 6학년이었던 나를 안아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대통령을 뽑아주신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5월 유가족, 그 당시 광주에 거주했던 분들 모두 오늘
치유의 눈물을 흘렸을거에요.
감사합니다.


(댓글)


저도 광주의 딸

원글님보다 한 두살 많은가 봅니다.
양동 시장에 살았습니다.
대학 시절, 가투를 나가서 백골단의 하이바에 부서진 턱뼈가 오십이 넘은 지금도 가끔 아픕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오늘 모처럼 실컷 울었고,
'정화' 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도

광주에서 6학년때 였어요
아빠가 교도관이셔서 집에 못들어오시고
집에 땅굴같은거 파놓으시며 여차하면 들어가라고 하셨어요 시장도 볼수없어서 여섯 가족이 텃밭에서 기른 토마토나 채소 먹으며 두려움에 떨며 보냈었죠
전대 다니는 친척오빠는 두둘겨맞아 거의 죽은상태로 집으로 돌아와 정상인으로 살지 못했고요
오늘 문대통령님 덕분에 위로받고 감동받고 억울함을 풀었어요 감사합니다~~
원글님 같은 기억입니다 먹먹하네요
오늘 많이 울었어요
오늘 많이 울었어요


다음

저도 비슷해요. 맞아요, 그 때 아빠는 헌혈하러 나갔고 엄마들은 모여서 김밥을 쌌어요. 지나가는 트럭에 넣어주셨죠. 친했던 앞뒤집 삼촌 오빠들은 돌아오지 않고 다들 피눈물을 흘렸어요. 직접 겪은 일이라 서울로 대학와 친구들이 새삼 놀라는 거 보고 더 놀랐어요. 왜 그렇게 다들 몰랐는지. 저는 일부러 사진이나 내용은 피했어요. 안 보고 싶더라고요.


안녕?

광주 후배분 저는 그때 고1 이었고 전대 입구에 집이 있었어요. 우리집이 전대 오빠들 하숙집 이었거든요.
전대는 전남대학교.. 밤이면 점령군 들이 방호? 안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고 새마을 주택 처럼 똑같이 지은 집들이 주욱 있었는데
작은 옥상밑 이 외부 화장실 있었고 동네 약간 지능이 떨어지신분이 계엄령 하에 돌아가셨어요..저녁 6시? 이후로 걸어 다니면 발포 했어요.. 우리집 앞에서 총에 맞아서 그자리에서 죽고..그 총자국이 오래 남았었어요..
오늘밤 상념에 잠기고 남편은 잘 자지만 잠이 안옵니다..그때 그 기억이 큰 트라우마 일까요?
애써 광주를 떠올리기 무서웠어요..
오늘 저는 많이 치유된 고1 입니다..문재인님 감사합니다..
1년 을 다시 다녔죠.. 학교를요.
지금 저는 서울에서 잘 살아 가지만 37년전 전대앞에 살던 경신여고 1학년이 도청앞에 구경 같다가 광여고 3학년 언니랑
총 쏘는거 피해서 골목으로 막 도망 갔던거... 무서웠던 그 날을 잊고 싶었던것.. 지금도 막 눈물이 납니다..
그 날 집에 와서 놀란 가슴으로 엄마가 알까봐 언니랑 숨도 못쉰거..
광주의 사춘기는 무서웠어요..
지금 50대 인데도 tv의 그날의 광주가 나오면 바로 꺼버려요 그런 영화도 안봅니다..
그렇다구요..그게 그렇답니다.위로 받은 하루 감사합니다



제닝


제가 2학년이었을 때에요. 서울에서 태어났죠.
부모님 고향이 전라도에요.
당시 아빠가 퇴근해서 저희 남매들 부르시더니
애들하고 놀지말고 바로바로 들어와라.
경찰이나 군인들 보이면 집에 바로 들어와서 문 잠궈라.
누가 물어봐도 부모님 고향 어딘지 모른다 해라.
당시는 정라도 경상도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몇번을 말씀하셨어요.
밤이면 저녁먹고 치우고 바로 불 끄고요.
어린 나이에도 뭔지 모르게 불안했던 기억이 있네요.
서울에서도 조용히 소문은 돌고 이었나봐요.
나중에 광주대학살을 알게 된 후 얼마나 살떨리게 분하고 두렵던지

오늘 대통령의 공감은 위로의 시작이었어요.
사무실에서 기념식을 조용히 이어폰으로 지켜보면서 숨죽여 몇번을 삼켰고요 광주 연고의 사람은 아니지만 깊이 위로받는 것을 느꼈고 광주 분들에게 같이 위로를 나누고 싶었어요.

대통령과 광주시민 여러분
버티고 견뎌주셔서, 우리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


광주 도청 근처에 살았었어요. 제 나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전이었어요.
뭔가 기억날 법도 한 나이인데 이상하게 아무 기억이 없고 하나 기억나는 장면은 두꺼운 솜이불을 사방에 둘러 막아놓고 방한가운데 앉아있던 기억.
삼촌이었나 할머니였나 누군가가 움직이지말고 가만있으라고 저한테 소리지르던 장면.
어릴적 삼촌들이나 아빠 친구분들이 가끔 저는 나가라고 하고 방문도 꼭꼭 잠그고 이름없는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놓고 본적이 있어요. 엄마는 그걸 보고나면 많이 우셨어요.
나중에 보니 5.18 장면이 담겨있던 끔찍한 영상같은 거였죠. 외국인 기자들이 찍은 걸 몰래몰래 숨겨서 돌려보곤 했었던것 같아요.
저는 못보게해서 그냥 흑백 장면이었던것만 기억나지만 그렇게 끔찍한 시절이 있었어요.
난 다 알고 있는줄 알았는데 대학교를 서울로 와서 그때 처음 알았죠.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걸요.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전라도사람들은 배신자다 하는 말들을 철썩같이 믿고 있더라고요.
오늘 기념식 보고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직접적 피해가 없었다 생각했던 저같은 사람도 트라우마가 여전히 있다는걸 느꼈어요.



제가

제가 들은것과 흡사합니다
지금은 50대후반이신데 그집은 딸만있는 집안이라
모든 문에 이불을 다 못으로 박아서 걸고
밖에선 전쟁과같은 총소리ㆍ어마어마한 포탄?소리
어른들은 시장 가는척 바구니에 빵ㆍ먹을것 가득
사들고 지나가며 어린학생시나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들어오고 매일밤이 공포ㆍ지옥 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전 ?전남쪽이구요

저도 오늘 518 식을 보면서 눈물이 마구흘렀어요
그동안 누구도 입밖으로 함부러 낼수도 없고
큰소리로 떠들수도 없는 시대와 아픔이 있어서
다들 꾹꾹 눌러놓은 응어리를
오늘 대통령이 꺼집어내서 말할수 있게
울수있게 해주셨어요



엄마최고


전 그때 나주에 있었어요. 나이는 8살
길거리에 젊은 청년들이 트럭을 타고 긴 장총같은거 들고 라면박스 같은거 던지며 지나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경찰서에서 무기를 챙겼다 들었어요.. 사촌 오빠들이 그때 광주에서 자취하며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고 했는데 길이 다막혀 며칠만에 산으로 해서 돌아오고 했어요.
살아돌아온걸 다행으로 여겼던 기억..당시에 벌어진 여러가지 끔찍한 얘기들 어린 나이에 정말 충격이었고(살아있는 임신부 배를 갈랐단 얘기등) 한편으로는 믿고싶지 않았고 괴로워서 외면하며 지금껏 살아온거 같아요..문대통령으로 인해 내 생애 처음으로 5.18에 대해 바로보고 마음 아파하는 계기가 된거같네요.
수십년 묻어두고 괴로웠던 일을 갑자기 눈앞에 드러내고 그래서 이 새벽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마음 아프지만 이제는 전 국민이 알고 책임자 꼭 처벌하고 광주분들 조금이라도 위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



우리 엄마 친구분 딸이 남편이 집에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자 걱정되어 대문 밖에 나갔다가 총에 맞아 죽은 그 당시 신혼이었던 임신부에요. 총에 맞은 딸을 계엄군 때문에 병원에도 못 데려가고 마루에 눕혔었다고 한 것 같아요. 딸은 사망했는데 애기가 뱃 속에서 꿈틀댔었는데 손을 쓰지 못 했다고 ㅠ.ㅠ
그 얘기 듣고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속상하고 안타깝던지... 우리 아래층에 사시던 분은 총에 맞아 장애인이 되셨지요. 광주에서는 어렵지 않게 518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저는 5살

그때 만나이 5살이었어요
어렸을때 기억은 안나지만 5.18 기억은 나요
그만큼 어린저에게도 무서웠던것 같아요
엄마 심부름때문에 언니들과 수퍼에 빵사러 샀다가 대학생들 탄 버스가 오니까 수퍼 주인 아줌마가 막 음식 싸서 버스에 넣어주더라구요

그러더니 저와 언니들보고 숨어있으라 해서 숨어있으니 얼마 안되서 총든 군인들 차량이 와서 수퍼를 샅샅히 뒤지고 갔어요

너무 무서웠고
부모님은 먹을거가 없는데 밖을 못나가니 집에서 계속 굶었어요




ㅇㅇ


80년 9월생이에요. 5월에 저는 엄마뱃속에 있었고 그때 집이 화순이라서 아빠가 양동에 있는 회사까지 통근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때 너릿재터널을 군인들이 막아놔서 산타고 집에 겨우 돌아오시고 그 뒤로 보름 이상 출근도 못하고 광주에 전쟁이 났다는 소문만 들으셨대요. 나중에 회사 나가보니 직원중에 4분이 행방불명되셨다고. 조선대뒷산에 묻혀있다는 말도 있고 했는데 결국 다 못찾았다고 했어요.. 어제 518이 생일이신 유가족분 편지 읽는것 보면서 저도 엄마도 많이 울었어요. 유가족들 맘은 어떠할지...



,,


원글님은 서석초를 다닌것 같네요
시내 중심가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다 알거에요
게시글에 27일에 방송하던 그 분이
울 고등학교(그때 고2)에서 가야금 지도하셨던 선생님이었네요
나중 뉴스보고 우리도 깜짝 놀랐어요
원글님 초등기억인데도 생생하게 게시글 올리고
대단하네요.



저는


1학년인가 2학년이었어요. 도청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삼거리 길가에 있는 집으로 이사한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갑자기 학교 안 가도 된다고 해서 신났었죠. 엄마는 이사하고 나서 아파서 앓아누우셨고, 학교 안 가도 되어 신난 저랑 제 동생은 밖에서 콩 볶는 거 같은 소리가 나면 뛰어나가서 구경하겠다고 했었고. 실제로 몇번은 나가서 거리 구경도 했었어요.
시민들이 무기고 탈취해서 무개 트럭 타고 끝없이 지나가던 거 기억나요. 동네 사람들 다 길가에 나와서 박수 쳐주고 응원했었고요. 이때 트럭 하나가 삐끗해서 인도 보도블럭이 내려앉았었는데... 이 보도블럭을 제가 초등 4~5학년 될 때까지 안 고쳐줘서 늘 그 자리 피해서 지나갔던 것도 기억나요.
이모가 부산 사시는데 시댁이 나주여서 들렀다가 엄마 보겠다고 광주 들어오려 했는데, 군인들이 길목 지키고 있다가 경남 번호판 단 거 보더니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는 와중에 전남 번호판 단 차는 들어가게 하길래, 이모가 나는 왜 못 들어가냐고 항의하다가 안되겠어서 부산집에 갔는데. 우리집에 전화도 안 되고 신문 보니 난리 났길래 그제서야 상황 파악을 했었다고...



음...

저 초1학년때 아빠가 잠시 발령 받아서 광주에 살았었어요. 초등학교 늦게 입학해서 얼마 다니지도 않았는데 휴교령떨어져서 초1 기억이 없어요.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웠는지 집앞 파출소 불에 타고 버스에 젊은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거 기억나요. 그때 아빠도 젊은 사람들 불쌍하다고 뛰쳐나가는걸 엄마가 완전 붙들고 늘어져서 울고 불고 해서 집에 있었는데 그날 밖에 나갔으면 저는 평생 아빠없이 살았을겁니다.
정말이지 그 당시에 데모 않하고 공부만하고 자기 뱃속만 챙겼던 안모씨 같은 사람들은 대통령 할 자격
없다고 생각합니다. 홍보다 더 싫네요.




아놧


독일 기자가 찍은 영상이
유럽전체에 퍼지고
미국에도 방송됐어요.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 세계는 다 아는데
국민만 모르는 상태였죠.

독일에 유학중이던 신부님께서
너무 놀라 한국에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몰라서 광주에 일이났다며 설명하셨대요
매일 매일 전화를 여기저기 걸어 실상을 알려줬는데
아무도 모르더래요.

답답해서 다음날도 전화를 계속했는데
어느 순간 어디도 전화가 안되더랍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세상에
전두환이 우리나라의 국제전화 선을 3주간 끊어놨대요 ㅜㅜ

그리고 광주시내 전화도 끊었고요.
광주는 철저히 고립되었어요.

이 사실을 독일 기자가 동영상으로 다 찍었어요.
자기가 광주에 들어가서 촬영을 했는데
모든 시민이 환영하고 박수쳐주는 모습을보고
말은 안통했지만 이상하고 놀라웠대요.

광주시민은 이곳의 실상을 알릴 기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 것이겠죠...

오늘 이 독일 기자의 영상을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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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맥날상하이스파이시 | 작성시간 23.05.18 그리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 아직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광주 시민이 많을 거 같아서 넘 가슴 아프다...
  • 작성자Ode of youth | 작성시간 23.05.18 진짜 마음 아파 아 ㅜㅜ
  • 작성자BestDriver | 작성시간 23.05.18 눈물나서 읽다가 진짜...
  • 작성자동성결혼합법화기원정권찌르기 | 작성시간 23.05.18 다읽었어 고마우ㅏ 눈물 줄줄 흐른다
    난 연고지도 아닌데도 매년 이 날만 되면 찾아보고 울고 찾아보고 울고... ㅠ
  • 작성자후장팔이재기단 | 작성시간 23.05.19 속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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