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부터 그림상은 다 내꺼였다.
부모님께선 내가 당연히 미대를 목표로 학창시절을 보낼거라 생각하셨었고 나 또한 다른 꿈을 꿔보지 않았었다.
6학년 6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고 중학교에 입학.
모두가 치루는 중간고사 음악실기 가창시험 때 “주현인 성악을 하는구나”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아뇨. 전 그림 그리는데요.”
선생님은, 넌 꼭 성악을 해야한다, 어머님과 면담을 해야겠다고 말씀하셨고 그 당시 난 단순히 그림vs노래, 어느 쪽이 내 적성에 더 맞을까? 난 좀 산만하니까 가만히 앉아서 하는 것 보다는 돌아다니며 할 수 있는 노래가 어쩜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뭐 잘못했냐 - 날 왜 오라고 하시냐고 묻는 엄마께 선생님의 면담 이유에 대해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음악선생님께서 재차 면담 요청을 하셨고, 선생님과 면담 후 "미술학원은 한달에 한번 돈내면 되지만 성악레슨은 갈 때 마다 내야한다는데 엄마는 해줄 능력이 없다. 그러니 원래 하던거나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림 그리는게 싫었던 적은 없는데 괜히 청개구리 심리가 발동해 ‘성악,,배워보고싶은데,,어쩌지..?’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게 된 동네 피아노 학원.
창문에 바이올린 플룻 피아노 성악 이라고 붙어 있었고(옛날엔 피아노 학원 창문에 다 그렇게 붙어 있었다) 혼자 불쑥 가 보았다.
원장님처럼 보이는 선생님께서 피아노를 치시며 노래를 부르고 계셨고, 이 분이 날 도와주실 것 같다는 예감이 이상하게도 확신처럼 들었던 그때의 그 순간이 생생하다.
내 사정을 들으신 선생님은 피아노학원 한달치 비용으로 내가 갈 때 마다 성악 기본 레슨을 해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선, 이탈리아에서 한국 학생을 양성하시는 음악 선생님이 잠시 한국에 들어 오시는데 내 노랠 들려드리자고 제안하셨다.
무슨 드라마처럼 - 그 선생님은 나를 이탈리아서 공부 시키고 싶다고 하셨다. 그 당시 이탈리아는 자기나라 사람 뿐만 아니라 유학생에게도 저렴한 학비를 제공했어서 유명한 예술학교의 학비가 가장 저렴한 곳이기도 했어서 엄마도 동의하셨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넘어가 수녀원에서 생활하며 일년 동안 언어를 익히고 그 다음해에 산타체칠리아음악원에서 시험을 보기로 계획해주셨다.
친구들이 연합고사 준비로 예민할 때 나 혼자 여유부리며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딸내미를 해외로 보내는게 너무 불안한 엄만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가셨고, -다녀오면 이름 떨치는 성악가가 될거다- 라는 말을 기대하고 가신 엄마는 다녀오시자마자 나를 앉히고 “너 유학 못보내겠다. 절대 안되겠다”
고등학교 셤도 안 보고 졸업한 나한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대꾸했다.
“니가 이번 해에 바다건너 가는건 제주도도 안된대. 니가 유학가면 니가 죽는다는데 내가 어찌 보내니 절대 안돼!”
난, 죽어도 가겠다고 우겼다.
엄만 나를 끌고 그 점쟁이에게 갔다. 직접 들으라고.
난 속으로 그 사람에게 쏟아낼 이야기를 단디 준비해갔다.
-당신이 내 인생을 책임져줄건가요?
-증명하지도 못할 말로 내 인생 망치면 당신이 보상 해줄건가요?
눈이 튀어 나올 것처럼 생긴 그분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한데, 나를 앉히더니 “너 유학가면, 니 엄마가, 니 관 치울 일 생겨.” 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준비한 말은 커녕 온순한 양처럼 되더라. 그 아주머니는 내게 “올해 시간 잘 보내다가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 그러면 니가 그해에 니 인생 귀인을 만난다.”
죽어도 간다고 하던 옥주현은 온대간데 없었다.
마냥 믿기도 어이없지만, 일찍 죽긴 싫었던거지..
난 몹시 말 잘 듣는 어린이처럼 시키는대로 했다.
친구들보다 일년 늦게 고등학교에 진학한 난, 반에서
‘저 80 언닌 무슨 사건으로 일년을 꿇었나’
베일에 덮힌 덩치 좀 있는 언니였다-..-
늘 그렇듯 첫 중간고사에서 치루는 가창실기시험 이후 난 수업 중간중간 교탁에서 노래하는 시간이 많았고 같은반 아이들이 라디오 노래 경연코너에 엽서를 보냈다.
그 당시 ‘별밤 뽑내기’와 ‘최할리의 내일로 가는 밤 애청자노래경연대회’가 있었는데, 별밤은 전화연결로, 최할리의 내밤은 방송국으로 직접 가서 치루는 방식이였다. 친구들은 당연히 방송국 구경을 꿈꾸며 최내밤에 신청.
주장원 월장원 연말장원까지 가게 된 나는 토요일 연말장원 리허설 때 어떤 매니저의 요청으로 엠비씨 음악프로 대기실로 함께 가게 된다.
문을 열자마자 젝스키스가 보였고 안경낀 아저씨가 나를 훑더니 첫마디가 “넌 살을 좀 빼야겠다.” 그러더니 좀 있다 라디오부스로 오시겠다며 다시 나가보라는거다.
‘아 뭐야 내 살에 뭐 보태준거있나…’ 생각하며 올라가 경연을 했고 그 아저씬 내가 노래 할 때 피디님 자리 옆에서 팔짱끼고 지켜보셨다.
연말장원에 우승을 하고 방송을 마치고 나왔는데 그 아저씨,
“너 가수하고 싶은거지? 내가 너 가수 만들어줄게. 근데 너 살 많이 빼야한다.”
“전 가수 안하고 싶은데요?”
“근데 여기 왜 나왔어? 가수 안하면 너 뭐하고 싶은데”
“전 성악가가 될건데요”
“성악가보다 내가 가수 만들어 주는게 더 좋을거다”
“싫은데요. 가수는 유치해서 싫어요. 전 클래식 할거에요”
아저씬 강한 콧방귀 후 나와 내 친구에게 상당히 달콤한 제안을 하셨다.
“너네 젝키 콘서트 올래?”
우린 모두 네 라고 합창. 다음날 세종문화회관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인상이 그저 그런 웨이브머리 아저씨에게 나를 “내가 걸그룹에 넣을 메인보컬” 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난 동의한 적 없고 그저 속으로 ‘이 아저씨 진짜 무대뽀네’
어쨌든 우리 여섯명은 무대뽀아저씨 덕분에 명당자리에서 젝스키스 콘서트를 공짜로 관람했다. 무대뽀 아저씨는 다음날 맛있는거 사줄 테니 방배동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고
‘날 어떻게 해보려는 나쁜 남자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할 외모는 내게 없었으므로
내 노래를 전문가에게 인정 받고 있는 러브콜 그 자체를 즐겼었던 것 같다.
그렇다. 이 분이, 그 귀인이였던 것이야..
그렇게 얼레벌레 난 무대뽀아저씨의 블랙홀 같은 무대뽀 계획에 합체 되었다.
놀이공원에서 픽업된 유리, 내 친구를 통해 소개받은 이진, 그리고 꼭 네명이어야 한다는 무대뽀사장님의 고집에 따라 일인분의 분량만 남겨두고 녹음을 거의 마친 우리팀에 데뷔 한달전에 들어온 한명은 남겨둔 일인분을 급히 녹음.
남들은 데뷔까지 수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세상에 나오는데 우린 준비기간이 육개월도 되지 않고 심지어 무대뽀사장님의 ‘차별화’ 선언으로 “이 곡에 어울리는 옷은 이세이미야케다”
이세이미야케 의상과 함께 실력도 안되는 이 네명은 ‘발라드’ 곡 ‘blue rain’으로 -그것도 라•이•브• 로- 데뷔.
그렇게 우린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유치해서 대중가수는 절대 하지 않겠다던 옥주현은 숨쉬듯 잦은 윙크와 모두가 따라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유치한 제스쳐 제조기가 되었다.
마지막인사..
사장님 유골이 담긴 도자기함을 만지는 순간
아직도 열기가 느껴지는 그것을 안은 순간
꾹꾹 눌러 담은 슬픔이 터져나왔다.
“사장님 감사했어요. 감사해요..”
“마지막 모습을 찍어가셔요” 장례 안내자의 말과 함께 모든게 끝났다.
허망하구나..
모두들 말없이 버스 안에서 그 사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렇게,, 사장님과의 만남이 마치 얼마 전의 일처럼 선명하게 하나하나 떠올랐다.
보통 인터뷰 할 때마다 나오는 질문이
-성악전공하려고 공부했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가수가 되셨어요?
-핑클은 어떻게 모이게 되었나요?
라는 질문을 받는게 세상에서 젤 싫은 질문이였다.
일단 그 스토리가 넘나 길고,
준비기간이 너무나 짧은 것도 부끄럽기도 하고,
물론 그게 -운이 억수로 좋은 우리들- 을 강조하기엔 좋은데, 춤 노래 연마 좀 하고 나왔어야지 도 함께 따라 붙는 것 같아서
그래도
“안되는게 어딨냐. 되게 하는거다”
이게 이호연이라는 사람이
그분의 방식으로 그분의 신념으로 만들어낸 성공신화 라는걸.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걸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거다.
냉정하고 무뚝뚝하게 보여도 따뜻한 부분이 놀랍도록 많았다.
잠깐 휴가 나온 배우나 가수가 같은 식당에서 마주쳐 인사하면 휴가기간동안 맛있는거 먹고 들어가라고 수표 몇장 쥐어 보내시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니 우리에겐 어땠겠나.
내새끼들에겐 최고로 좋은거 멋진건 다 퍼주시고
내새끼들에게 안 좋은 것 같은 인물에겐 가차없이 무시무시한 호랑이 같은 사람..
세월이 지나고 다들 흩어져 나이 먹어가는 동안 사장님은 오랜시간을 침대에 누워보내셔야만 했다.
간병인 아주머니께서 “사장님. 티비에 저 사람 *** 잖아요. 기억나세요?” 하면 엉엉엉 우셨다고 한다..
그 오랜시간 동안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일이 너무 죄송하고 가슴이 아파서,, 누워 계시던 사장님 모습이 장례식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상주로 있었던 종혁이와 둘이 멍하니 앉아 이런저런 옛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사장님이,, 주현이 누나 봐라. 너 주현 누나한테 노래 배워 알려달라고 해 하셨어요..”
나한텐 그런 칭찬,, 표현 안하셨는데..
나에게 부탁을,, 숙제를 주고 가시는 것 같네..
꼭 그렇게 할게요..
8년 조금 넘는 시간동안 답답하고 서러웠던 시간을 뒤로 하고 이젠 편안하게 자유롭게 계실 나의 귀인 우리 사장님..
사장님께 못다 표현한 마음들은 살면서 계속 떠올리며 되내이며 멋지게 노래할 거에요.
역시 옥주현이야 하실 수 있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노래 인생의 시작을 열어준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