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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선전포고 없이 미국을 공격했던 일본의 최후 (스압/데이터주의)

작성자Louisttttt|작성시간23.07.25|조회수2,367 목록 댓글 5

 출처 : https://theqoo.net/1743326657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파리강화회의에서 승전국으로써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일본. 그들은 탈아입구를 외치며, 유럽의 나라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서 제국주의의 야망을 펼쳐보고자 했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약 10년 동안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했던 일본.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고 1929년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대공황은 일본도 피하지 못했어.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와 경제 자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7월 중일전쟁까지 일으키며 전세계에 제국주의의 야욕을 선보였어. 급기야 1940년에는 인도차이나반도(동남아)까지 침공을 시작...


이런 일본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석유 등 전쟁필수자원에 대한 금수조치(일본은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에서 수입함)를 하고 미국내 일본인자산을 동결시켜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했고


영국, 네덜란드, 중국과 ABCD동맹을 결성해서 일본에게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손 떼라고 경고...


이러한 미국의 조치에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개소리를 외치며 미국과 서방권이 아시아 일에 간섭한다고 불쾌해했어.


그러면서도 일본은 미국에게 전쟁할 일 없으니, 미국 웨이크섬, 미드웨이섬,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 공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함과 동시에 미국에 외교특사를 파견해서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어...


그러나!

뒤에서는 미국과의 전쟁준비를 매우 착실히 했고


(1941.12.7 진주만 공습: 일본의 공격을 받은 미국 태평양함대)

1941년 12월 7일 오전 8시
일본 전력의 핵심이자, 당시 세계 수위급의 전력을 자랑했던 일본 해군의 연합항공함대가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 하와이 오아후섬에 있는 미 태평양함대의 진주만 기지를 기습공격(진주만공습) 70여 분만에 미 태평양함대를 초토화 시킴.



당시 일본이 시도한, 항공모함에서 전투기와 폭격기를 보내서 상대를 공격하는 전술은 그 당시 획기적인 것이였어. 이것은 거함거포 함대결전의 교리를 취하고 있던 미국이 진주만공습 이후 곧바로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를 재편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후에 일본을 지옥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어.




(대일선전포고문에 서명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잠자는 거인, 미국을 분노케 했어. 진주만공습 이튿날, 분노에 찬 연설과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2차세계대전(태평양전쟁)참전 선언.


게다가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동맹국인 일본의 진주만 공습 후에, 대미 선전포고를 함. 일본과 독일이 참전할까말까 고민하고 있던 미국에게 좋은 명분을 준 셈이지. (히틀러는 미국의 참전이 나치 패망의 지름길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으려나...)


이렇게 태평양전쟁 발발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운명은 급격히 바뀌기 시작해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동남아를 침공. 그런데, 히틀러의 유럽 침공으로 정신이 없었던 유럽국가들은 식민지인 동남아에 병력을 파견할 힘이 없었고, 덕분에 일본은 손 쉽게 동남아를 넣게 되면서 자신들의 힘이 엄청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정말 정신승리이었어ㅎㅎㅎ. 이렇게 전선을 태평양전선과 동남아, 중국전선으로 이원화한 것이 결국에 일본에게 엄청난 데미지로 돌아오게 되었어.


(1942.6 미드웨이 해전 : 폭발하는 일본 항공모함 아카기)
그러나, 개전한 지 딱 6개월 째,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된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로 유명해.

진주만 공격에 참여했던 일본 항공모함 4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과 일본 해군력의 핵심이었던 제1, 제2 연합함대 병력 3000여 명이 모두 이 해전에서 침몰했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한 미국이 본격적으로 반격태세에 들어가기 시작해. 그리고 6개월 간의 과달카날 전역 이후, 미국의 점점 거세지는 군사력과 생산력은 일본 뿐만 아니라 유럽전선까지 야금야금 장악하기 시작해.


애당초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기보단 미국과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갖기 위해 진주만을 공습한거였어. 그런 일본은 본인들이 선제공격하면 미국이 평화의 제스쳐를 취할거라고 뇌피셜을 돌렸지.
그런데, 일본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의 대일전쟁 수행의지는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그 이상이었어. 일명 양키정신.


(솔로몬제도 툴라기 언덕에 있었던 홀시 제독의 명언)
윌리엄 홀시제독이 외쳤던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잊지말자 진주만" "복수하자 진주만"를 외치며 미친듯이 일본을 때려잡는 미국 군인의 항일정신은 어마했어.



영국이 미국에게 전수한 당시의 최첨단 기술력과 미국의 거대한 생산력이 결합하면서 1943년부터 미국은 완전한 전시체제로 돌입했어. 총력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미국과 그들의 생산력은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었어. 풀빵 찍어내듯이 무기와 군수물자 등을 생산하는데, 그 양이 전세계 군수물자의 40%였다고 해.


게다가 미국의 전쟁 정책은 Germany First. 미국은 미 해군과 해병, 육군 일부 병력 등 미국 병력의 단 20%로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했다고...


전쟁 후기인 1944년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일본의 산업격차는 더욱 더 벌어지게 되고, 군사력 또한 마찬가지였어.



(레이테만 해전에서 처음 등장한 자살공격 가미카제. 그리고 최초로 가미카제 공격을 받은 USS세인트로)
1944년 6월 사이판 전투와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만 해전까지 연이어 승리한 미국은 일본 본토를 사정거리에 둔 지역들을 하나하나씩 점령해나갔어. 그렇게 일본 폭격을 위한 전진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1944년 말 부터는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해.


한편, 위의 세 전투를 겪는 동안 일본 해군 병력과 그들이 보유했던 함대들은 궤멸되었어. 그리고 사이판 전투와 필리핀해 해전에서의 대패로, 전쟁을 일으켰던 도조 히데키 수상과 도조 내각이 퇴진했지. 이 때부터 일본 군부는 자신들이 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처음으로 느끼면서 일본 군부는 강경파와 항복파로 나뉘어 항복할지 말지로 싸우기 시작했어.



1944년 말부터 사이판, 괌, 티니안 등 마리아나 제도의 주요섬을 폭격기지로 삼아 미국은 헨셀 소장의 지휘 아래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


(미국의 희망이자 당시 최신 폭격기였던 B-29 슈퍼포트리스)
공습 초반에는 도쿄, 나고야 등 군수산업 도시를 위주로 정밀폭격을 했어. 또한 폭격기가 일본의 대공포에 격추될 것을 우려해 고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다보니 제트기류때문에 명중률이 바닥이었어. 게다가 일본은 군수물자 생산지역을 민간인 주거지역과 혼재시켜 놨기때문에 미국의 목표였던 일본의 무기생산중단은 이뤄지지 못했지.

저런 이유가 일본 정부와 국민을 더욱 안심하게 했어. 심지어 미국 폭격기가 나타나면 일본인들은 구경하러 나오기까지 했다고 해.


그로 인해 일본 군부는 "아, 미국 폭격기는 형편이 없나봄ㅋㅋㅋ. 우리가 총력전을 한다면 일본 본토는 미국이 공격을 해도 괜찮을거야"라는 뇌피셜을 쓰게됨과 동시에 강경파의 입김이 쎄짐. 이런 일본 군부의 오판이 결국.....


어쨌든,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되겠다 생각한 미국은 전략폭격대대사령관을 교체하는데,



(커티스 르메이는 미 육군항공대의 에이스로 미 공군 창설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야. 그는 중국전선과 유럽전선에서 전략폭격을 두루 경험했던 전략폭격의 전문가. 한국전쟁 때, 한반도도 불바다로 만들었어)
바로 그 유명한 석기시대 마니아 커티스 르메이.
1945년 초, 당시 미 육군 항공대 소장이었던 그가 일본 본토공습 폭격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해.


커티스 르메이를 비롯한 미 육군, 해군 장성들은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전진기지로 이오지마, 오키나와를 선정하며, 이 섬들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어.


(이오지마 스리바치산에 성조기를 꽂는 미 해병대)
1945년 2월, 일본은 구리바야시 육군 장군의 지휘 아래, 너죽고 나죽자는 심정으로 이오지마를 요새화시키며, 미국과의 일전을 준비했어.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많은, 미군 사상자를 낸 이오지마 전투. 일본군과의 혈투 끝에 결국 이오지마를 탈환한 미국은 본격적으로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했어.




그런데,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의 엄청난 희생과 비상식적인 일본군의 총력전을 본 커티스 르메이는,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라는 무자비한 말들을 함과 동시에,

"일본은 실제로 이렇게 되어 있다. 공장이 하나 있다. 인근의 가구들은 집에서 작은 부품을 제조한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제조하고, 옆집의 하루노보 가족은 64호, 65호나 63호 너트 그리고 기타 잡동사니를 만든다. 이웃에서도 똑같은 걸 제조한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정해진 순서대로 부품을 가져간다."

라는 말을 남김과 동시에 민간인까지 동원해서 군수물자를 만들어내는 일본의 총력전이 얼마나 집요한 지를 깨달은 르메이. 그는 더 이상 일본 민간인들이 민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들은 무장해서 미국과 싸우는 적군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할 전략 목표라고 설정해버렸지.


그리고 일본 본토 공습의 첫번째 목표도시는 일본의 수도이자 심장, 도쿄였어.


1945년 3월 9일 늦은 밤
미국의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가 도쿄의 밤하늘을 소이탄(네이팜탄) 1700여 톤으로 물들임



곧이어 도쿄는 불지옥으로 변했어. 대부분이 나무로 된 도쿄의 건물들은 손 쓸틈도 없이 화마에 휩쓸렸고, 도쿄시민들도 화재로 많이 죽었어

또한 불이 만들어낸 뜨거운 공기에 질식해서 죽은 사람들도 많았었고


살아보겠다고 스미다 강에 뛰어들었다가 뜨거운 강물에서 그대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해


단 몇시간 동안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쿄의 피해는 원폭을 맞은 히로시마의 것보다 더 컸으며, 약 600만명이었던 인구가 거의 반토막났다고 해.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도쿄대공습". (이후에도 도쿄는 두어번 더 폭격을 당함)

한국인들이 전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6.25전쟁 때 탱크 타고 38선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의 모습인 것처럼, 일본인이 전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이 도쿄대공습일 정도로 불지옥이 된 도쿄의 모습은 그들에겐 엄청난 충격과 공포였다고 해.



(1945.3.13 오사카 공습 )
3월 11일 도쿄대공습으로 시작된 일본 본토 공습. 르메이는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지. 곧바로 다음 날 3월 12일 나고야를 공습, 13일 오사카 고베 등 일본 주요 대도시와 공업도시를 폭격.

르메이와 미 육군 폭격기들은 3월 11일부터 19일, 약 열흘 동안 2달 치 소이탄(네이팜탄)을 일본 본토 폭격에 모두 쓰는 바람에 폭탄이 부족해서 공습 휴지기를 가짐.


동시에 미국은 기아작전을 실시하며, 일본 연안에 기뢰를 살포해서 일본으로 오는 수송선들을 들어오는 족족 격파시킴. 이 작전으로 인해, 일본으로 오는 원자재, 식량 등의 물자공급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일본인 몇 십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해


그 사이 오키나와는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감. 이로 인해 일본 본토 공습이 더욱 유리해진 미국은 전열을 가다듬고 공습 재개. 노빠꾸 모드로 가열차게 일본 본토를 때림




심지어 미국은 일본인들에게 피난을 가라고 삐라까지 뿌리지만, 시민들이 피난가면 전쟁물자에 차질이 생길 걸 우려한 일본정부는 피난금지령을 내림 (사실 전쟁말기엔 배급 물자도 부족해서 일본의 도시나 시골이나 상황이 참담했다고...)



1945년 5월~6월, 도쿄를 비롯한 일본 대도시를 모조리 초토화시키고 더 이상 때릴 대도시가 없다 판단한 미국.
이후에는 도시 크기 상관없이, 후쿠오카 오카야마 센다이 와카야마 치바 고치 토쿠시마 시모노세키 구마모토 등 일본의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골고루 폭격.


(1945.7 구레 군항 공습 : 히로시마현에 있던 구레 군항은 태평양전쟁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군항)
7월부터는 유럽 전선에서 대활약한 미국 제8공군 폭격기들이 일본 본토 공습을 위해 참전했고, 미 해군 항모부대들도 구레를 비롯한 요코스카, 사세보 등 일본의 주요 군항들을 파괴시킴


그렇게 미국 폭격기는 일본 전역에 소이탄(네이팜탄)을 뿌렸고, 일본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림
(※ 미국이 일본에게 했던 이 소이탄 공습은 일본이 했던 중국 충칭대공습도 참고했다고 함...)




(태평양전쟁 말, 일본 정부가 미국의 일본 본토 상륙을 대비하기 위해 민간인에게 나무 죽창 훈련시키는 모습)

이와중에도 일본 군부는


1.천황제 유지해달라, 내정간섭 하지마
2.미국과 연합국은 일본본토 점령하지마
3.무장해제는 일본이
4.전범재판도 일본이
5.그리고 조선과 대만은 일본이 갖겠다.

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조건들과 함께 조건부 항복을 미국과 연합국에게 요구하며 1억 총옥쇄, 결사항전을 외침


(2차 세계대전을 끝낸,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포츠담선언 이후에도, 이 미친자(=일본)들과는 말이 안통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은 미국은 자국 군인들의 희생이 더 이상 있어선 안된다는 판단을 하고 1945년 8월 3일,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신무기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해도 된다는 문서에 서명.



티니안 섬을 출발한 미 B-29 에놀라게이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라는 원자폭탄이 투하
(왜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냐고 묻는 이들이 있는데, 히로시마는 일본본토공습 당시 단 한번도 공습을 받지 않아서 원폭의 위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미국이 판단했어. 무엇보다 히로시마는 일본 육군의 근거지로, 당시 일본의 핵심 군사도시였어)


그러나 국민들이 죽어나가는 그 순간에도, 상황파악 못한 일본군부는 항복할지 말지로 편을 나누어 싸우고 있었고


그 사이에




1945년 8월 9일
미 B-29 복스카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팻맨을 투하
(나가사키에는 일본 해군 잠수함 기지가 있었고, 전투함을 만드는 미츠비시 조선소와 어뢰를 만드는 병기제작소가 있었어. 일본에겐 중요한 군수공업도시)



두 번째 버섯구름을 보고나서야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 의사를 밝혔고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




1945년 9월 2일
미 군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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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나랑 변보러 가지 않을래 | 작성시간 23.07.25 걍 항복 전에 몇개 더 터뜨려서 저나라 개박살내지 안타깝
  • 작성자올라울라랄 | 작성시간 23.07.25 저렇게 개박살났는데 아직도 인구많아서 내수 빵빵한게 넘 신기해..버블경제때 어마어마하게 낳은건지ㅎ...
  • 작성자예쁜 꿈을 꾸라고 | 작성시간 23.07.25 저때 다 뒤졌어야..
  • 작성자ㄷㅆ | 작성시간 23.07.25 최근에 저 원자폭탄 스토리 말해주는 프로그램 봤는데 흥미로웠어
  • 작성자웅짤래미 | 작성시간 23.09.29 너무 잘 정리 되어있다 고마워 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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