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strange/4610872
여기서 선정한 세명은 외국인이 아닌 아프간인으로 한정합니다.
1. 무하마드 오마르
1960년생 추정 2013년경 사망 추정
탈레반의 1대 지도자 그러니까 탈레반을 만든 인물입니다.
가난한 파슌툰족 출신이었던 오마르는 3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의 손에서 자라던중
1979년 10대의 끝자락에 소련의 침공을 맞이합니다.
그의 가족들은 소련군을 피해 우루즈간이라는 지역으로 잠시 이주했으나 그는 곧 아프간으로
돌아왔고 무자헤딘에 투신합니다.
그러던 중 그의 운명을 바꾼 인물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오사마 빈 라덴입니다.
빈 라덴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한층 맹렬하게 무자헤딘 활동에 매진하였고 젊은 나이에도
곧 강력한 지도자로 떠오릅니다. 한쪽눈도 그때 잃은 것이죠.
소련의 철군후 아프간에는 새정부가 들어섰으나 소련과의 전쟁중 형성된 무자헤딘의 여러 군벌들이 저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뛰어들어 극심한 혼란이 시작되었고 카불의 정부는 이걸 수습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마르에게 큰 호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아프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파슌툰족이 오마르와 그의 세력인 탈레반을 지지한 것이었죠.
파슌툰족이 오마르를 지지한 이유는 원래 파슌툰족 출신의 군벌로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던 어느 인간의 막장 행각에 파슌툰족이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마르와 탈레반은 카불을 향해 진군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1996년 카불에 입성 아프간을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그의 본모습이 드러난것도 이때 부터였죠. 오마르는 정권을 차지하자마자 과격파 근본주의 이슬람의 본모습을 드러내며 광신적인 행보를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막장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과격주의 이슬람의 모습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여성은 남자 의사에게 진찰조차 받을수 없다거나 여성은 외출할때 눈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위를 가려야 한다거나 어떠한 사회활동도 불가하며 교육도 받을수 없고 이를 어길시에는 길거리에서 투석형으로 처형한다거나 이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복장 부터 구분되게 만들어 두고 강력한 차별 정책을 펼친다거나 하는 것들이었죠. 정도야 덜하지만 남자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율법 이란건 사실 정체조차 불분명한 것이었는데 그런 율법을 내세워 사정없이 감옥에 쳐넣고 태형을 가하고 하는 것은 일상이었죠. 그야말로 공포정치의 시대였습니다.
오마르는 스스로를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자칭했지만 실상은 이슬람의 이름을 내세운 사이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이 시기 한국의 한 기자가 아프간을 찾아가 이자를 인터뷰 했는데 한국인 기자조차 잘 아는 쿠란의 기초적인 율법에 대한것을 이 작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말문이 막히자 화를 내며 기자를 내쫓았다고 하죠. 화가난 이 기자는 한국에 돌아와 오마르는 인터뷰할 가치도 없는 사이비놈이라며 신랄하게 깠다고 합니다.
아프간 국민들에게는 선풍기 같은 서구문물은 사악한 것이라며 쓰지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정작 자기의 거처에는 빵빵하게 에어컨을 틀어놓고 티비와 최신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죠. 일제 전자제품과 샹들리에 수집이 취미였다고도 하니 사이비 사기꾼들의 행동은 대개가 다 비슷한건가 봅니다.
그러나 오마르에게 진짜 위기가 찾아옵니다. 바로 반탈레반 무자헤딘의 연합체였던 북부동맹의 존재였죠. 착실히 힘을 모으던 북부동맹은 곧 탈레반의 세력을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북부동맹의 지도자는 오마르 같은 사이비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능력자 아니 영웅이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오마르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나 다름없던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와 손을 잡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암살이었고 후술할 이 북부동맹의 지도자를 암살한 알카에다는 곧 9.11 테러를 저지릅니다. 이후 아프간에 미군이 찾아오고 곧 허무할 정도로 쉽게 탈레반 세력이 쓸려나가자 오마르는 곧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그렇게 여러곳을 도망다니던 끝에 2013년경에 사망한 걸로 추정됩니다.
오마르는 분명 한때는 뛰어난 지도자이자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제멋대로 해석해 억압과 폭정을 일삼았고 앞과 뒤가 다른 종교사기꾼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씨를 뿌린 이슬람 근본주의(실은 전혀 근본과는 다른)와 과격주의 사상은 오늘날 전세계 이슬람 국가를 오염시키고 선량한 사람들을 지옥의 고통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2.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1947년 출생 ~ 현재
오마르가 그래도 한때는 뛰어난 지도자이자 투쟁가였다면 굴부딘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 천하의 개쌍놈입니다. 아프간의 이완용이라고 표현해도 이완용도 이정도 까지는? 이라는 소리가 나올만한 인간입니다.
오마르처럼 파슌툰족 출신이었던 굴부딘은 일찌기 과격주의 이슬람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학생시절 이미
살인을 저질렀던 그는 출소후에 우연히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후에 무자헤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 이 인물에게 굴부딘은 처음부터 아주 강한 적대감을 품게 됩니다.
추정하건데 아마 그 인물이 민족주의자 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관대한 종교적 포용력과 원대한 사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봅니다.
간사한 소인배 기회주의자들일수록 이런 사람을 더 잘알아보죠. 그리고 혐오하고 증오합니다.
이런 기회주의자들에게 전쟁이라는 혼란은 때로는 엄청난 기회가 되기도 하니 굴부딘 역시 소련의 침공은 그런 기회였습니다. 때마침 파키스탄의 과격파 지도자들은 앞에서는 무자헤딘을 돕는척 하며 뒤로는
이 혼란을 틈타 아프간을 파키스탄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으로 선택된게 굴부딘이었죠. 미군과 무자헤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던 파키스탄 정보부는 미군의 막대한 전쟁물자와 무기중 상당량을 자신들이 빼돌리고 남은건 무자헤딘에게 나눠 주었는데 이때 굴부딘은 중간에서 많은양을 착복하였고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이 적대하던 그 무자헤딘의 영웅에게는 거의 어떠한 물자도 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 사람을 수차례 암살할려고 시도했었고 자신에게 반감을 품은 다른 무자헤딘 세력도 거침없이 공격하고 살해를 일삼았습니다.
그 오마르조차 이 시기에는 소련군과 맞서 싸웠지만 굴부딘은 최소한의 선도 지키지 않았던 놈이었죠.
오죽하면 나중에는 아프간에 공작을 일삼던 파키스탄 정보부조차 굴부딘에게 적당히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경고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소련군이 철수하고 전쟁을 틈타 온갖 막장스러운 행보를 하던 굴부딘에게도 업보의 댓가를 치를 시기가 찾아오게....................되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굴부딘에게는 여전히 전쟁중에 모은 막대한 물자와 세력이 존재했으니까요. 1992년 마침내 후원자였던 소련이 붕괴하고 지원이 끊기자 아프간의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하였고 곧 카불에는 여러 군벌들이 모여들었는데 굴부딘 역시 그들중 하나였습니다. 아니 이시기 가장 큰 세력은 굴부딘이었죠.
(아래의 녹색이 굴부딘의 세력권입니다)
굴부딘은 이 시기에도 또한번 평생 자신이 혐오하던 그 아프간의 영웅이 지배하던 세력을 집어 삼키고자 공격을 가했으나...상대도 못되고 개박살 나 버리게 됩니다.
어쨌거나 92년 카불에 모인 군벌들은 연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협상에 들어가고 소련과의 전쟁중 벌인 수많은 막장행각에도 불구하고 세력과 물자를 가진 굴부딘은 국무총리를 제안받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나..................역시나 간사한 이 인간은 거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임시 대통령이었던 모자메디가 탑승한 비행기를 rpg로 공격 협상을 파토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파키스탄과 파키스탄을 지원하던 미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카불을 장악 마침내 권력을 차지하는듯 했으나 다시 한번 평생 그가 그토록 죽이고 싶어했던 그 영웅이 이끄는 군대가 카불로 진격 포위에 성공해 탈환을 목전에 두자 카불 시내에 불을 지르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며 카불을 빠져 나갑니다.
이때문에 카불 시내는 불바다가 되었고 이때 죽은 시민만 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가히 악마도 울고갈 막장스런 행보였죠.
그리고 이런 행동의 반작용으로 그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던 파슌툰족 마저 등을 돌리게 되고 새로운 군벌을 지지하게 되니 그게 바로 탈레반이었습니다. 앞서 오마르의 이야기에서 말한 그 막장놈이 짐작하셨겠지만 바로 굴부딘이었던거죠. 그야 말로 만악의 근원같은 놈입니다.
굴부딘의 막장행보 덕에 새로이 들어선 아프간 새정부도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여전히 위협적인 군벌들의 견제속에 흔들리던 새정부는 96년 결국 탈레반에게 카불을 내주고 후퇴를 하고 맙니다.
그리고 굴부딘 역시 탈레반과 척을 지게 되버리죠. 하기사 원래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파슌툰족이 탈레반에게로 돌아섰으니 막대한 지지세력을 잃고 낙동강 오리알이 되버린 굴부딘의 입장에서는 탈레반에게 원한을 품을 만도 했습니다.
그런대 말입니다.
기회주의자는 역시 그 본성을 드러낼 시기를 놓치지 않나 봅니다.
탈레반 정권시기 눈치보며 짱박였던 굴부딘은 2001년 미군이 탈레반과 전쟁을 시작하자 느닷없이 탈레반에게 붙어 지하드를 선포해 버립니다.
외부의 침입을 자신의 지지세력을 되찾을 호기로 본 굴부딘은 탈레반과 척을 지느니 같은 편에 서서 그 세력중 일부라도 찾는게 나을거라 계산기를 두들겼고 실제로 그 계산은 상당히 적중해 탈레반과 함게 반미 전선을 결성한 굴부딘은 다시금 어느정도 세력을 되찾게 된 거죠.
또 그런대 말입니다.
이 답이 안나오는 기회주의자 놈은 2015년 이번에는 is에 붙어 버립니다.
아프간의 혼란을 틈타 is가 세력을 뻗치고 탈레반과 대립을 시작하자 간을 보던 굴부딘은 와해되어 버린 탈레반이 힘을 못쓰고 밀리기 시작하자 is에 붙어 버린겁니다.
이쯤 되면 쟤들도 뭘 믿고 이런놈을 받아주나? 싶지만 이런 천부적인 간잽이 기회주의적인 처신이야 말로 우리같은 상식속에 사는 범인들은 상상도 못할 간사한 놈이 살아남는 비법이었겠죠.
하여간 그래서 이제는 is의 주요인물 굴부딘으로 정착했을까요?
아 놔 이쯤되면 좀 지칠 지경입니다
2016년 is 지지선을 한지 고작 1년만에 굴부딘은 이번에는 아프간 정부에 다시금 붙어 버립니다.
2015년만해도 맹위를 떨치며 당장에라도 아프간을 집어 삼킬줄 알았던 is가 지나친 막장행각으로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조차 강력하게 견제를 받으며 세력이 흔들리자 완전사면을 조건으로 아프간 정부에 가세한 겁니다.
아프간 정부입장에서는 미군이 철수라도 하는 순간 당장에라도 무너질지 모른다는 현실의식을 못할 정도의 바보들은 아니라서 어떻게든 세력을 늘리고 싶어했고 굴부딘은 그 틈바구니를 파고 든 것이죠.
2021년 8월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현재 이 간사한 기회주의자의 운명은 어찌 될까요?
비열한 생존왕의 능력을 이용해서 이번에도 살아 남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탈레반 정부에게 배신자로 낙인 찍혀 처형이라도 당할까요?
카불에는 아직도 이자가 30년전 저지른 학살극에 치를 떠는 시민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을텐데요.
과연 이자의 운명은 어찌될까요?
https://youtu.be/b9QN3AkydYY
2001년 9월11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테러가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본토에서 벌어집니다.
이 테러는 이후 현재까지 20년간 가장 큰 여파를 일으킨 시발점이 되었죠.
그리고 이 테러의 진짜 시작은 9월9일 아프간의 한 곳에서 기자로 위장한 알카에다 테러리스트의 자폭공격이 시작이었습니다. 두 사건은 하나로 이어지는 사건이나 다름 없죠.
탈레반이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인물 그리고 알카에다가 미 본토테러이후 아프간과 탈레반에 자신들을 의탁하기 위한 댓가로 치뤄진 자살 테러. 그리고 이 테러로 사망한 한 사람. 그가 이 거대한 역사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3. 아흐마드 샤 마수드
1953년 9월 2일~ 2001년 9월9일
판지시르의 사자, 아프간의 체 게바라, 20세기의 살라딘, 최후의 지하디스트
마수드를 수식하는 말은 많지만 단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영웅'입니다.
20세기 이슬람 세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임과 동시에 이 사람의 죽음 자체가 오늘날 이슬람 아니 어쩌면 세계를 아우르는 비극이라고 표햔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마수드는 위대한 인물이었고 이슬람 세계 전체의 변혁을 가져올수도 있는 인물이었으나 너무나도 원대한 그 사상때문에 권력을 탐하는 자 모두의 미움을 받았고 그렇게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던 거죠.
1953년 판지시르의 한 지역에서 경찰을 하는 아버지를 둔 가정에서 태어난 마수드는 일찌기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살 것을 결심하고 학업에 매진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할것은 여기서 말하는 원리주의는 오늘날 변질된 원리주의 과격주의와는 전혀 다릅니다. 쿠란과 마호메트의 가르침 그 자체를 따르는 것이지 말도 안되는 이유와 억지해석으로 종파를 사상을 탄압하는 이름뿐인 원리주의와는 궤를 달리하는 사상이죠. 하여간 어린 시절부터 이런 목표를 세웠던 덕에 마수드는 여러 민족의 언어와 아랍어를 익히게 되었고 각 종파의 교리를 두루 공부하면서 훗날 그가 여러 종교와 종파를 차별하는 것을 배격하는 그의 종교적 사상의 기반을 만들게 되었죠.
(진짜 이슬람 원리주의가 가르치는 것들)
마수드의 어린시절 아프간은 참으로 묘한 나라였습니다.
서로 절대 어울릴수 없는 물과 기름들 그것도 둘이 아닌 셋이 묘하게 섞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싸우지도 않으면서 균형을 잡고 유지되고 있는 나라였죠
세속주의 이슬람이자 친서방세계인 왕정, 소련 유학파벌이 중심이된 친소파 군벌, 그리고 폐쇄적인 이슬람 세계를 유지하던 여러 부족들이 불가능해 보이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당시가 냉전이 한창이던 때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기묘한 상황이었습니다.
(카불의 60~70년대, 이제는 21세기 이슬람 국가에서도 보기 힘든 풍경들)
이러한 기묘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아프간의 지정학적 위치가 크게 작용한 것도 있습니다
냉전시절 나라의 한쪽은 강력한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들 또 한쪽은 강력한 이슬람 국가들이 위치한 탓에
누구라도 이땅을 자기들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는 순간 남은 두 진영과의 충돌은 피하기가 힘든 상황이 아이러니 하게도 기묘한 균형을 가진 나라로 만든것이죠.
서방세계가 세력권으로 완전히 편입시킨다면 이는 곧 소비에트 연방과의 충돌및 반 서방주의가 확장되던 이슬람 국가들과의 충돌, 반대로 소비에트 연방이 차지한다면 공산주의 진영과 이슬람 세계와의 직접적인 충돌및 동아시아 지역으로의 세력확장 의도로 보일수가 있으니 어느쪽도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는 섵불리 완전한 세력으로 편입시키길 꺼리고 있었던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죠)
1973년 아슬아슬 하고 기묘한 이 균형이 드디어 무너지게 됩니다.
당시 아프간의 국왕 모하마드 자히르 샤가 해외 순방을 나선 틈을 타 그의 사촌이자 매형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죠.
바자크라이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선언한 다우드 칸은 친서방 정책에서 친소 정책으로 노선을 바꿉니다. 그런대 또 친소파 군벌들과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탄압을 가하고 아프간 전역에 강력한 세속주의 개혁을 실시하며 이슬람 원리주의를 신봉하던 사람들을 탄압하고 자극해 버립니다. 한마디로 모든 균형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린 거죠.
1973년 마수드는 이런 정부의 정책에 분개해 봉기를 추진하는데 그때 만난 평생의 지독하고 지독한 악연이 바로 기회주의의 화신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였습니다.
둘은 함께 봉기를 추진하긴 했으나 시작부터 전혀 어울릴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앞서 말했다시피 철저한 기회주의자에 과격주의 노선을 신봉하던 굴부딘에 비해 마수드는 민족주의자이자 이슬람 원리주의자였습니다. 어울릴래야 어울릴수가 없었고 이때부터 굴부딘은 마수드에게 강력한 적의와 살의를 품게 됩니다.
하여간 이 시기 추진했던 봉기는 결국 실패하고 마수드는 파키스탄으로 탈출합니다.
파키스탄의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며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실천하던 마수드는 1979년 (여러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곧 조국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것을 결심합니다.
1980년 정말 힘들게 구한 구식소총 700자루와 자신을 따르는 (전투라고는 모르는) 학생들과 난민들이나 다름없는 사람들 천명과 함께 아프간으로 돌아온 마수드는 곧 그의 천재적인 지도력과 군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전투라고는 모르는 사람들 천명과 그 사람들 숫자보다 적었던 구식 소총 700자루로 시작한 마수드의 무자헤딘 세력은 4년이 지나자 5천명의 강병으로 탈바꿈합니다.
마수드는 자신의 고향인 판지시르 협곡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곳은 소련군의 보급로가 직접적으로 지나는 위치였고 비교적 소련군의 공세가 덜한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던 대다수의 무자헤딘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직접적으로 소련군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앞선 굴부딘의 이야기에서 적은것처럼 마수드는 그래도 미국의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던 다른 무자헤딘 세력과는 달리 거의 아무런 지원조차 받을수 없었습니다.
굴부딘을 앞잡이로 내세워 아프간을 자신들의 세력권인 수니파 무슬림 국가로 만들고 싶었던 파키스탄과 마수드를 몇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기회주의자 굴부딘의 협잡 거기에 전쟁을 기회로 소련을 견제할 수단으로 아프간을 이용하려 했던 미국은 정작 아프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체 파키스탄 정보부에게 되려 놀아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슌툰족이 다수를 이루던 무자헤딘 군벌들 사이에서 타지크족인 그는 또한 견제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수드는 군사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련과의 전쟁이 끝난 훗날의 아프간이 더이상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완전한 자주독립적인 국가가 되기를 희망했고 그때가 되면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 되려 족쇄가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에 폐쇄적인 국가가 되는것을 바라지도 않았기에 ngo등 민간 단체의 인도적인 지원이나 교류는 활발히 했고 훗날 그가 죽기전까지도 서방세계의 기자들과도 활발하게 소통했습니다. 자주적이지만 폐쇄적이지 않고 외세에 휘둘리지 않지만 활발히 교류하는 나라 그것이 마수드가 꿈꾸는 아프간의 모습이었으니까요
마수드는 분명 수니파 무슬림이었지만 시아파와 수니파를 차별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아파에도 수니파에도 속하지 않은 이슬람의 소수종파인 수피즘에 대한 차별도 두지 않았습니다.
수피즘은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는 시아파와 수니파 모두에게 박해받는 종파였는데 마수드는 항상 수피즘의 경전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에게 탄압받는 종파도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 진정한 원리주의적 사상이었죠.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독교 심지어 유대교조차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와 교류하던 친구중에는 미국의 대학에서 교수를 하던 유대인 신학자도 있었죠.
마수드의 군사적인 재능에 대해서는 제가 잘 설명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군사적인 재능은 소련의 집중견제를 받는 와중에도 세력이 전혀 줄기는 커녕 계속 늘어나 종전시에는 1만3천명에 달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잡기 위해 소련이 수차례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판지시르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음에도 귀신같이 그 사실을 사전에 알아채고 철수했다가 다시 돌아와 재건하기를 반복했다는 정도만 말해두겠습니다.
이때 마수드는 심지어 소련군과 아프간 정부군 내부에도 정보원을 심어둘 정도였다고 할 정도였으니 단순한 게릴라 지도자급을 아득히 넘어선 능력자였던 것이죠.
그가 단순한 게릴라 지도자가 아니었다는건 소련과의 전쟁중 그의 세력권이었던 판지시르 협곡이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만 봐도 알수가 있습니다.
마수드는 판지시르 협곡을 하나의 도시국가 수준으로 운영했습니다. 이때 판지시르에는 학교가 있었고 병원이 있었고 경찰서가 치안을 유지 했습니다. 범죄자는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포로는 학대받지 않고 합당한 대우를 받았고 전향을 할 경우 차별없이 그의 무자헤딘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런식으로 전향한 아프간 정부군 출신도 많았고 어떤때에는 수백명이 한꺼번에 투항해 오기도 했습니다. 당연하게도 남여의 차별도 종파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시기 마수드를 상대하느라 지친 소련이 일시적인 휴전을 제의한 일이 있었는데 소련은 마수드를 제쳐두고 다른 무자헤딘 세력을 토벌해 그를 고립시킬 생각이었으나 마수드는 오히려 이 때를 기회로 삼아 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자헤딘 소수파 130여개를 규합해 하나로 묶어내니 이들이 훗날 탈레반과 사투를 벌이는 북부동맹의 모체가 됩니다.
이후에도 소련군과 아프간 정부군은 몇차례나 판지시르 협곡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지만 그때마다 패퇴하고 장성급 지휘관을 잃거나 수백명의 아프간 정부군이 마수드에게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86년즈음에는 사실상 판지시르 공략을 포기하게 됩니다.
1989년 드디어 소련군이 물러나고 아프간에도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지만 마수드의 진짜 고난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굴부딘을 비롯한 무자헤딘 주요 군벌은 아프간의 패권을 두고 서로 다투기 시작합니다. 이시기 굴부딘은 자기 수하를 보내 판지시르 협곡에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마수드를 죽이려 했지만........정말 택도 없는 짓거리였죠.
소련과 10년을 싸운 마수드에게 협잡질이나 일삼던 굴부딘이 어디 상대할 꺼리조차 됐을까요?
그러나 소련군이 철수했음에도 나지불라의 아프간 정부군은 아직도 소련에게서 물자를 지원받고 있었고 무기의 질에서 한참 우세한 정부군과 무자헤딘은 92년까지 계속 싸워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카르말에 이어 아프간 정부의 수반이었던 나지불라는 막장인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름 유능했고 비밀경찰조직의 간부출신이었던 그는 심리전 정보전에도 유능했습니다.
거기에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이 사라지고 내전상황이 되자 무자헤딘의 일부 세력들도 약탈이나 살인 성범죄 같은 것을 저지르는 막장스러운 짓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모든 상황은 나지불라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갑니다.
더이상의 지원을 기대할수 없게 되자 정부군에서는 계속 이탈자가 발생하혔고 일부는 범죄자들이 되어 민가를 습격하고 다녔습니다. 내부 단속이 불가능해진 정부군의 와해를 틈타 무자헤딘 세력은 카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했고 1992년 4월 카불에 대한 무자헤딘의 대대적인 공세끝에 나지불라 정권이 붕괴 마수드는 드디어 카불에 입성합니다.
이때 여러 무자헤딘 파벌은 나지불라와 그 일당을 공개처형 할것을 주장하지만 마수드는 이에 반대합니다. 마수드의 신념에 항복한 적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고 그것은 알라와 마호메트의 가르침에도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카불에 입성한 군벌들은 회의를 통해 파키스탄에 망명해있던 정치지도자 부르하누딘 라바니를 임시 평의회의장으로 삼고 군벌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덨던 굴부딘에게 새로운 내각의 국무총리직을 제안합니다. 마수드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원한이야 둘째로 치더라도 이 협잡꾼이자 기회주의자를 그런 자리에 올리는 걸 탐탁해 했을리가 없었지만 굴부딘의 세력이 가장 컸고 더이상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대 이 기회주자는 그것조차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력과 외부(즉 파키스탄과 그에 휘둘리던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카불을 장악해 권력을 독하고자 하였고 이에 마수드는 일시적으로 후퇴하나 곧 전력을 재정비한 마수드는 우즈벡족 군벌인 압둘 라시드 도스툼과 연합해 굴부딘의 군대를 격파하고 카불을 포위 재탈환을 목전에 둡니다.
그러자 이 막장 굴부딘은 카불을 탈출하면서 시가지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해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고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니 그 숫자가 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카불에 돌아온 마수드는 그 참상을 보고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죠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크리스토프 드 퐁푀이- 사진작가이자 마수드의 오랜 친구였던 프랑스인)
카불 탈환후 라바니가 새 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마수드는 국방장관에 취임하나 일련의 참상은 그를 너무나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새 정부하에서도 무자헤딘 세력은 여전히 파벌 싸움을 일삼았고 관리들은 무능했으며 부패했습니다.
이에 염증을 느낀 마수드는 국방장관직을 사임하고 판지시르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런 혼란속에 마수드라는 기둥마저 잃으면 상황이 얼마나 악화될지 알고 있었던 라바니의 간곡한 만류에 마수드는 결국 남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될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굴부딘의 막장행각에 지친 파슌툰족은 새로운 군벌 오마르가 이끄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인 탈레반에 대한 지지를 선언 곧 이들은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이번에는 도스툼이 배신 헤크마티아르와 손잡고 다시 카불을 공격했으나 마수드의 손에 격파되었습니다.
그러나 96년이 되자 더더욱 세력을 확장한 탈레반이 여러 지역을 접수하고 카불을 공격할 기미가 보이자 라바니는 다시금 굴부딘(지친다 지쳐)과 도스툼을 포섭했으나 일찌감치 굴부딘을 손절한 파키스탄 정보부는 지원 대상을 탈레반으로 옮겼고 이렇게 파키스탄과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탈레반은 1996년 9월 카불을 포위하니 마수드는 별 수 없이 라바니와 주요 인사들을 호위해 카불을 탈출하게 됩니다.
마수드는 이때 나지불라 에게도 함게 갈것을 제의했지만 나지불라는 이를 거절합니다. 적어도 같은 파슌툰족인 자신에게 탈레반이 박대하지는 않을거라는 착각 때문이었을까요? 그러나 나지불라는 탈레반 입성후 곧 발가벗겨져 거세를 당한후 조리돌림 당하다가 마지막에는 목이 메달리는 아주 처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카불을 접수한 오마르의 탈레반 정권은 곧 본색을 드러내 온갖 막장짓을 일삼기 시작하고 마수드는 근거지인 판지시르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마수드의 패배였을까요? 판지시르의 사자 마수드, 그에게 카불의 무능한 정부는 오히려 족쇄였고 판지시르 협곡은 우리가 아니라 드넓은 대초원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대초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소련과의 전쟁시절 부터 그와 함께 해온 진짜 동지들, 지하드의 전사들이었습니다.
북부동맹의 깃발아래, 맹수의 왕 마수드의 이름아래 뭉친 진정한 지하드의 전사들은 곧 맹진을 시작합니다. 아무리 많은 정보와 지원을 등에 업은 탈레반이었지만 그들은 전사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전쟁을 경험하지도 않은, 기껏해야 전후에 난립해 산적으로 돌변한 군벌들의 세력 정도나 상대하던
탈레반 따위는 마수드의 상대가 되질 못했습니다.
파키스탄과 미국의 지원하에 간신히 버티던 탈레반 정권이었지만 2001년이 되자 마수드의 북부동맹은 카불 근처까지 탈레반 세력을 몰아 넣습니다.
이러는 사이에도 마수드는 서방세력의 언론들 유엔 민간단체들과 끊임없이 교류합니다. 인도적인 지원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는 마수드였고 자신들의 입장과 상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당시 한국군으로 유엔 평화유지군 고문으로 아프간을 방문해 마수드를 만난적이 있던 채수문 중령은 마수드가 한국의 인삼을 좋아했으며 여성의 인권과 교육문제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여성도 당연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수세에 몰린 탈레반이 알카에다까지 끌어들이자 마수드는 크게 분개합니다. 알카에다는 지하드의 이름으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테러범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것도 모자라 알카에다 같은 테러리스트와 손잡은 탈레반은 마수드에게 더이상 관용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여성과 아이를 희생시키는 것을 어떻게 지하드라 부를수 있는가?"
이런 와중에도 마수드의 정보력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교류하던 서방세계의 언론들 인사들 그리고 전쟁중에 적으로 만났으나 그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구 소련의 장성들까지 그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수드는 서방세계의 기자들에게 수차례 경고를 합니다.
"탈레반과 연합한 알카에다가 곧 미 본토에 테러를 가할 것이다"
2001년 탈레반 세력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마수드는 늘 그가 자주 해왔던 것 처럼 서방세계의 기자들을 만나 아프간의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벨기에의 기자로 위장한 알카에다의 테러리스트도 있었습니다.
테러리스트는 자살 폭탄 공격을 감행하였고 그렇게 위대한 판지시르의 사자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날은 2001년 9월9일.............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틀 뒤에 마수드의 경고 대로 미국의 무역센터에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공기 자폭 테러가 벌어집니다
(america under attack..........이후 20년간 세계를 뒤흔든 문장)
(초등학교를 방문했던 부시가 비서실장에게 테러 소식을 전해듣고 있다)
9.11 테러의 원인은 명약관화 합니다.
탈레반에게 있어 자신들을 손에 넣고 휘두르고 있다고 믿고 있던 파키스탄이나 미국은 그저 이용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탈레반이 진정으로 두려워한것은 위대한 전사 위대한 지도자였던 마수드 뿐이었습니다. 탈레반은 미국을 적으로 돌릴지언정 마수드와는 싸우는 것이 두려웠던 겁니다. 세계의 슈퍼파워 미국이 아니라 판지시르의 사자를 두려워 했던거죠.
알카에다는 미국을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마수드의 목숨은 알카에다가 미국에 테러를 저지르고 자신들을 의탁하기 위한 댓가였던 겁니다.
마수드의 죽음 이후 20년, 이슬람 세계는 극도의 혼란 테러 학살의 시간이 이어졌고 아프간은 다시금 탈레반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미국은 결국 아프간을 등졌고 대통령은 도망갔으며 새로운 열강들은 아프간을 이용하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으며 아프간에서는 이제 길거리에서 여성들의 모습마저 사라졌습니다.
탈레반은 미국과 전정부에 협력했다는 죄목을 씌워 미군 기지를 드나들며 생계를 유지하던 청소부와 잡역부 그들에게 식료품을 팔고 나르던 상인들과 그 가족들까지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프간 부통령은 일부 인사들과 판지시르로 이동 마지막까지 탈레반과 싸을것을 결의했습니다.
마수드의 유지를 이어받은 땅에서 끝까지 싸울것이며 죽더라도 탈레반과 한 하늘아래 살지는 않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리고 마수드의 유지를 지킬려는 전사들도 속속들이 판지시르로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위대한 사자의 고향 판지시르, 그곳에는 아직도 그를 따르는 전사들이 있습니다)
"굴욕적인 삶 보다 존엄있는 죽음이 낫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
위대한 사자의 영혼이 숨쉬는 땅 판지시르에서 다시금 아프간의 평화의 불씨가 피어나길 기원합니다.
p.s
5~6년전 쯤인가? is 관련해서 자료를 찾기 시작하다가 거슬러 올라가서 만난게 마수드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이 사람에게 정말 매료되고 말았죠.
역사책에 나오는 영웅이 멀리있는게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사 그리고 그보다 고결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그리고 항상 이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살아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면 아프간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종교 종파 사상 성별 그 무엇에도 차별받지 않는 자유로운 이슬람 국가 아프간이 이 사람의 지도하에 만들어 질수 있었다면 이후에도 여러 이슬람 국가에도 그런 그의 사상이 성공이 전파되었다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을텐데 그의 죽음 이후에 남은건 알다시피........
언젠가 한번 이야기 하고 싶었던 인물인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을 못잡다가 하필이면 계기가 된게 작금의 아프간 사태가 되버리고 말았군요.
구글 검색에도 부쩍 마수드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한걸 보면 역시나 비극의 순간에 사람들은 영웅을 기다리게 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