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세상이 돌아가는지에 관한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역할은 신화가 수행하였다.
제사장: 에헴 이 세상은 가이아 여신께서 만드셨고, 포세이돈께서 분노 하시면 파도가 치고, 제우스께서 분노하시면 번개가 치는 거요.
사람들: 오 위대한 제사장이여
하지만 세상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 해석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탈레스, 그는 신화가 아닌 나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해석하고자 했다. 그리고 훗날 그는 서양 최고 철학자라고 불리게 된다.
탈레스: 내 생각에 세상은 물로 이루어졌을 것 같아. 왜냐하면 물을 뜨거워지면 기체, 차갑게 되면 고체로 변하고, 씨앗에 물을 부으면 생명이 쏟아나지 않는가?
그의 제자들은 세상이 하나 혹은 소수의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탈레스의 의견에는 동의를 했지만 그것이 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 이 세상은 아페아, 공기, 4원소,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그리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꽃피우게 되면서 철학의 관심은 이 세계의 근원에서 인간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게 된다.
소피스트: 이 세상에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아. 특히 도덕이라는 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하는 거야.
사람들: 도덕이 상대적인 거라고요?
소피스트: 그렇다네, 여기서는 나쁜 행동 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다른 지역에 가면 아무 상관도 없는 행동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어떤 행동이 ‘착하다 나쁘다’를 판별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인간일세. 즉 다시 말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소크라테스: 절대적인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하는 건가. 당신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 엉터리야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한다고!!
또 소크라테스가 말하길
소크라테스: 내가 충고하나 하지, 아는 것이 곧 행하는 것이네 우리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안다면 절대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걸세,
소피스트: 그럼 도둑질이 악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도둑질을 하는 도둑은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소크라테스: 그건 도둑이 착각을 했기 때문이네, 도둑은 도둑질이 악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야, 악한 행동은 영혼을 비참하게 만들 뿐 절대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네, 만약 도둑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도둑질을 하지 않았을 것이네.
소피스트: 웃기는 소리하지 말게,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인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소크라테스: 내가 왜 그대들이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알겠네, 그건 바로 그대들이 무지해서 절대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일세. 당신들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마냥 떠들지만 내가 볼 때 머리가 텅텅 빈 무식한 사람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드네, 너 자신을 알라고!!
소피스트: 뭐 우리보고 무지하다고? 이... 이런 건방진 놈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너무나 많은 적을 만들었고 결국 불경죄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배심원들에 의해서 사형을 집행 받게 된다.
젊은 플라톤: 이런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시민들이 위대한 스승님을 말도 안 되는 죄명으로 사형시켰다. 민주주의는 정말 최악의 제도야!!
한편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이데아’론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플라톤: 개, 사람, 사랑, 우정 등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은 모두 각각 궁극적인 형상 즉 이데아를 가지고 있어.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스승님의 주장을 당연히 맞아 그게 바로 이데아인거야!!
젊은 아리스토텔레스: 스승님 이데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플라톤: 이 세계에 있는 것들은 모두 이데아의 허상에 불과하다네, 예를 들어서 자네 앞에 있는 의자는 의자 이데아를 조잡하게 모사한 거지. 이데아가 진짜인거고 현실세계에 있는 의자는 이데아를 조잡하게 베낀 가짜야. 이데아는 절대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어. 오로지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젊은 아리스토텔레스: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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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우리의 지능을 통해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 예: 13+7은 20이다.
감각(경험): 눈, 코, 입, 귀, 피부를 통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드리는 것 예: 저 책상에 있는 사과는 빨간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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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그렇지! 우리가 의자를 의자라고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이성이 의자의 이데아를 인식하기 때문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데아가 진짜 세계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데아를 조잡하게 베낀 가짜세계일세, 즉 이성을 통해서 얻는 이데아의 지식이 중요하며, 감각을 통해 이 세계에서 얻는 지식은 저급한 지식일세.
젊은 아리스토텔레스: 이 세계가 가짜라고요?
플라톤: 그렇다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동굴에 묶인 죄수라고 가정해보세,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기둥에 묶여서 벽만 바라보고 있고 우리의 뒤에 불이 있다네. 간수들은 말, 꽃 같은 사물을 가지고 불과 죄수 사이를 지나가는데, 불에 의해서 간수가 들고 있는 사물이 그림자로 벽에 비치게 된다네.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동굴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그림자가 진짜라고 생각하네. 이데아가 이 동굴의 예에서 말하는 실제 사물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그림자라고 할 수 있네. 그러므로 우리 철학자들이 할 일은 그림자를 보는 것이 아닌 등을 돌려 진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일세.
젊은 아리스토텔레스: 우리 이성은 어떻게 이데아를 인식 합니까?
플라톤: 사실 우리의 영혼은 육체에 들어오기 전에 이데아의 세상에서 거주하면서 이데아를 알게 된다네, 그러다가 영혼이 육체에 들어오면서 영혼은 이데아에 관한 상당수를 잊어버리게 되는 거야. 그래도 약간이나마 남은 이데아의 지식 때문에 이데아를 조금이나마 인식하는 거지,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성을 통해 잊어버린 이데아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네.
또 플라톤이 말하길
플라톤: 그리고 그 이데아 중에 가장 상위의 것으로 모든 이데아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이데아가 있는데 그게 바로 ‘선함’의 이데아야. 마치 태양처럼 다른 이데아들을 비치는 존재지.
젊은 아리스토텔레스: 스승님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가장 우수한 정치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플라톤: 좋은 질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욕망, 용기, 지혜로 구성되어 있는데 국가도 이에 대응하는 시민, 전사, 통치 3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계급은 그 사람의 출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사람의 역량(능력)에 따라서 해당 계급이 정해지는 거야. 만약 영혼에 욕망이 많다면 시민계급이 되는 거고, 영혼에 용기가 많다면 전사계급이 되는 거지.
젊은 아리스토텔레스: 계급이 순수한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건가요?
플라톤: 그렇다네, 또한 모든 아이들은 국가에서 양육하며 국가에서 교육을 해야 하네.
젊은 아리스토텔레스: 그럼 통치자는 누가 됩니까?
플라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 아주 이성이 뛰어나서 모든 이데아를 꿰뚫어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만 한다네. 또한 모든 통치자들은 모든 사유재산과 배우자를 소유할 수가 없네. 이런 것들은 사적인 욕심을 만들기 때문이야. 또한 아무리 여자라고 하더라도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다면 마땅히 통치자가 되어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네.
젊은 아리스토텔레스: 여자도요? 제 생각에 그건 요즘 같은 시대에서는 받아드려지기 힘들 것 같은데요..
플라톤: 하.. 나도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가 받아드려지기가 힘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네(플라톤이 실제로 한말)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훗날 플라톤에 버금가는 철학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플라톤의 이론을 계승하였지만 플라톤의 철학과 다소 다른 철학을 전개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스승님은 현실세계가 이데아의 모방한 가짜라고 하셨지. 하지만 난 스승님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아. 현실세계는 절대 모조품 같은 것이 아니야. 현실세계야 말로 진짜 세계라고.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기를
아리스토텔레스: 이 세상 모든 사물에는 각각 형상인(플라톤의 이데아와 비슷하다), 질료인, 목적인, 작용인이 존재한다. 비너스 석고상으로 예를 들자면 형상인은 비너스 상(비너스 모습)이야, 우리가 비너스 상을 볼 때 이것이 비너스 상이라고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형상인이야, 스승님 이데아가 이 세계를 떠나서 어떤 초월적인 곳에 존재한다고 했는데 나는 생각이 달라, 모든 물체마다 고유의 형상인이 존재하는 거야.
제자: 그러면 나머지 질료인, 목적인, 작용인은 어떻게 됩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질료인은 그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야, 예를 들어서 비너스 석고상의 질료인은 석고겠지. 목적인은 그 물체가 존재하는 목적이야, 비너스 석고상의 목적인은 아름다움으로 보는 사람들을 기분 좋도록 하는 것이지. 마지막 작용인은 그 물체를 만든 것이야, 비너스 석고상의 작용인은 장인이겠지.
제자: 플라톤 사조님은 이성만 중요하고 감각은 필요 없다고 말하셨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리스토텔레스: 물론 이성도 중요하지만 감각 역시 중요해, 현실세계에서 지식을 얻으려면 감각이 필요하니까.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아리스토텔레스: 또 각 사물에는 이 4가지 말고 가능태와 현실태라고 하는 것이 있어. 가능태는 장래에 현실태가 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하고 현실태는 목적을 달성한 상태를 말하지. 예를 들어서 나무의 씨앗이나 어린 아이는 가능태고 나무나 어른은 현실태야. 그런데 모든 가능태는 현실태가 되려는 성질이 있어, 이게 바로 모든 사물이 변화하는(ex:나무나 아이가 자라는) 원리야.
제자: 스승님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모든 물체에 목적인(물체의 목적)이 있다고 하셨는데 인간의 목적인은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좋은 질문이다. 인간의 목적인은 행복해지는 것이야.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덕을 따르는 중용의 삶을 살아야 돼.
제자: 중용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 너무 지나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는 중간의 자세이다. 예를 들어서 용기가 너무 부족하면 인간은 소심해지고, 용기가 너무 지나치면 인간은 만용에 휩싸이게 된다. 언제나 적절한 자세를 유지해야만 한단다.
제자: 스승님 국가란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네, 벌이나 양이 군집을 이루려는 습성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 역시 사회적으로 모이려는 본성이 있단다. 국가는 이러한 사람들의 본성 때문에 생긴 거야.
제자: 그렇다면 가장 우수한 정치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아리스토텔레스: 나는 긍정적인 정치체제로 군주정, 귀족정, 혼합정 부정적인 정치체제로 참주정, 과두정, 빈민정이 있다고 생각한단다. 부정적인 정치체제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도자는 충분한 자격을 가져야 해, 또한 지도자와 시민들 모두 합의한 법을 따라야 하고, 마지막으로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바람직한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외에도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시학, 심리학 등 많은 학문들을 창시하였고 이런 학문들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업적으로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만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다.
한편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고 그는 인류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을 돌아다니며 신의 말씀을 설파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예수는 민중들을 억압하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맹비난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 세력들은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형에 쳐하게 한다.
베드로:(예수를 잡으러 오는 로마의 군인을 보고 칼을 꺼내며) 이 개자식들...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어라,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할 것이다.(마테복음 26장)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그의 제자들은 예수의 사상을 온 세상에 전파하게 된다. 온 인류 심지어 자신의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포용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일개 지방의 신화에 불과했던 히브리 신화를 세계구급 종교로 변신시켰다.( 비록 유대인들은 예수를 여전히 부정하기는 하지만..).
한편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된 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공인되게 된다. 그러나 초기의 기독교는 정체성도 다소 모호하였고 철학적인 기반이 너무 약하였다. 그러한 기독교의 철학적 기반을 만드는 작업을 바로 교부철학이라고 부른다. 교부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철학을 기독교에 받아드리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도대체 왜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애초에 악을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 일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철학을 접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바로 이거야,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가 다른 이데아들을 존재할 수 있도록 태양처럼 비쳐준다고 했지? 선의 이데아가 바로 신이 틀림없어. 신이 온 세상을 태양처럼 비쳐줌으로써 이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거야.
제자: 스승님 그럼 악은 무엇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악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신의 빛이 닫지 않는 것이 악인거야. 빛이 닫지 않는 곳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야. 즉 신이 악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선의 부재가 바로 악인거야!!
제자: 스승님 질문 있습니다. 신앙하고 이성하고는 어떤 관계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 당연히 신앙이 우위지, 이성도 신의 빛이 우리를 비춰줘야 가능한 거야. 즉 신이 없으면 우리는 어떠한 진리도 알 수 없어, 모든 지식은 신의 은총 때문에 가능한 거야.
한편 교부 철학에 의해서 기독교의 철학이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정리가 된 후, 이를 이성적인 사유로 논증하려는 했는데 이것이 바로 스콜라 철학이다.
한편 유럽에서 잊혀 졌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이슬람에서 다시 유럽으로 역수입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재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정말 위대해, 나는 이 철학이 기독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또한 아퀴나스는..
아퀴나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 모든 물체에 작용인(그 물체를 만든 것)이 있다고 말했어. 예를 들어서 비너스 상의 작용인은 장인이지, 그리고 그 장인의 작용인은 장인의 부모님이겠지 그리고 그 부모님의 작용인은 조부모님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작용인이 있을 거야, 그게 바로 신이야!
제자: 스승님 질문 있습니다. 신앙하고 이성의 관계에 아우구스티누스님의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이성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봤지만 내 생각은 달라, 신앙하고 이성은 동등한 거야. 우리는 신의 개입 없이도 이성을 통해서 진리를 알 수 있어! 오히려 이성은 신앙을 보완할 수 있는 거라고, 내가 아까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한 것처럼 말이야.
제자: 스승님, 국가는 법을 어떻게 제정하여서 국민들을 다스려야 합니까?
아퀴나스: 나는 법을 총 3가지로 분류하고 싶어. 첫째는 영원한 법으로 바로 신이 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절대적인 법이야. 두 번째는 자연법이야. 자연법은 영원한 법의 일부분으로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법이야. 예를 들어서 국가에 형법이라는 것이 사라지더라도 살인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 그게 바로 자연법인 거야. 마지막으로 실정법이 있는데 바로 국가가 국민을 다스리기 위해 만든 법이야. 실정법은 반드시 자연법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야 돼.
중세시대에는 신을 위해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의 권위가 엄청났지만 종교 개혁, 과학 혁명 등 여러 가지 사건으로 기독교의 권위가 점차 떨어지게 된다. 아울러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면서 신이 아닌 인간이 다시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드디어 근대철학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데카르트: 중세의 철학자들은 일단 신이 존재한다고 전제를 깔아버리고 철학사유를 시작하던데, 난 동의하지 않아, 막말로 신이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또한 데카르트는..
데카르트: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한번 의심해 보자. 예를 들어서 1+1은 3인데 악마가 나에게 최면을 걸어서 2라고 믿게 하는 것 일수도 있어. 어쩌면 내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악마의 환영이 아닐까?
이렇게 데카르트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의심하고 제거해 나갔다. 모든 지식을 지워나갈 때 그는 마침내 도저히 거짓일 수가 없는 진리 한 개를 발견하게 된다.
데카르트: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거짓일 수가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 역시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야. 그래 그거야!!! 드디어 나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를 알아냈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의 존재를 증명한 데카르트는 순차적으로 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데카르트: 나는 불을 만져보고 뜨거움이라는 관념(생각)을 배우게 되고, 꿀을 먹어보고 달콤함 이라는 관념을 배우게 되지, 근데 나는 무한함을 경험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무한함에 대한 관념을 알고 있을까? 그래 그건 신이 우리에게 무한함의 관념을 넣어줘서 일거야. 고로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신은 절대 선한 존재이니까 거짓된 세상으로 우리를 속이지 않을 거야, 고로 이 세상은 존재해!!!
이렇게 ‘나’, ‘신’, ‘세계’의 존재를 증명한 데카르트는 이어서..
데카르트: 이 세상에는 정신, 영혼, 신처럼 부피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정신계와 육체, 강아지, 나무처럼 부피와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계 총 2가지로 구성되어 있어.
이렇게 정신의 영역과 물질의 영역을 철저하게 분리했던 사상을 이원론이라고 한다. 한편 국왕 찰스 1세의 조카딸 엘리자베스 공주는..
엘리자베스: 데카르트 질문이 있어요, 도대체 정신계에 있는 나의 정신이 어떻게 물질계에 있는 나의 육체를 조종하는 것인가요?
데카르트: 공주님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의 뇌에 송과선이라고 하는 부위가 있는데 이 기관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육체에게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엘리자베스: 송과선이라는 것은 물질계에 속하는 것인데 그럼 정신이 송과선에 깃드는 순간 정신도 물질계에 속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데카르트:...... 공주님 더 이상 그 문제로 어여쁜 머리를 괴롭히지 마십시오(데카르트가 공주에게 실제로 한 말)
한편 데카르트의 이러한 철학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 스피노자는 아주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게 되는데..
스피노자: 신은 무한한 존재인데, 기독교의 신은 무한하기는커녕 너무나 유한한 존재 아닌가? 신이 정말 무한한 존재라면 이 우주, 이 세계전체가 신이 아닐까?
또한 스피노자는..
스피노자: 데카르트는 이 세상이 정신계와 물질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사실 이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은 신의 수많은 속성들 중 2개에 불과한 거야, 인간의 인식능력이 미약해서 비록 그 2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거고.
기독교 신자: 그럼 우리 기독교의 교리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건가?
스피노자: 적어도 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은 아닐 겁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너무나 인간답지 않습니까? 또한 신이 명령했다는 절대적인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칼을 꺼내며) 이런 불결한 놈!!!
(다행히 칼을 맞지는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옷이 크게 찢어지게 된다.)
스피노자: ‘모든 인간이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죽을 때 까지 이 옷을 보관하겠다.(실제로 한말)
그리고 스피노자는..
스피노자: 이 세계 전체가 신이라면 인간 역시 신안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야, 즉 우리는 신의 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지. 우리의 모든 행동, 감정 등이 신이 정한 필연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분노, 슬픔 같은 불필요한 감정에 휘둘릴 필요가 없어. 이런 감정들에 대해서 초연해 진다면 잔잔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근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철학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국가가 왜 탄생하였는지에 대한 질문이 근대 정치철학의 주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제자: 스승님 국가란 어떻게 만들어 진 것 입니까?
홉스: 좋은 질문이다. 국가가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려면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의 자연 상태가 어떤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인 자연 상태는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지. 어떠한 법이나 제약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살인, 강간, 절도 폭행이 난무했겠지.
제자: 정말 끔찍했던 곳이었겠네요..
홉스: 그렇지, 결국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끔찍한 상황들이 계속 연출될 거야, 나는 이런 상태를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부르겠네. 이런 지옥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딱 한 개가 있다네.
제자: 그게 무엇입니까 스승님?
홉스: 바로 한명에서 모든 권력을 양도하고 왕으로 추대하는 것일세. 그리고 왕이 우리를 강력한 권력으로 다스림으로써 사회 전체의 평화를 유지시켜주는 것일세.
제자: 만약 왕이 너무 과도한 폭정을 행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홉스: 제아무리 과도한 폭정이라도 그 지옥과도 같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태라네. 그러므로 나는 국가가 붕괴해서 다시 자연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왕의 권력이 더욱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한편 이 시기에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우리가 얻는 지식들이 정말로 확실한지, 혹은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는지를 탐구하는 인식론이 철학의 주요 주제가 되게 된다. 플라톤을 계승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론 철학자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고로 이성을 통해 진리를 알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한 로크, 버클리, 흄 같은 경험론 철학자들은 ’우리의 모든 지식은 감각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로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모든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참 웃기지도 않는 말이야. 인간이 태어날 때는 아무 가진 지식도 없는 백지와 같은 상태야. 그 후에 오로지 감각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거야.
제자: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로크: 인간은 감각을 통해 단순관념을 받아드리고 이것을 복합관념으로 합체시켜서 지식으로 습득한단다. 내가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주지. 우리가 사과를 바라볼 때 감각기관을 통해서 ‘사과는 빨갛다, 사과는 둥글다, 사과는 꼭지가 달려있다’와 같은 단편적인 단순관념을 받아드린다네, 그리고 이런 단순관념을 사과라는 복합관념으로 합체시켜서 우리가 이것을 사과라고 인식하는 것이지.
제자: 스승님 질문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유니콘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한테 유니콘이라는 관념이 있는 겁니까?
로크: 그 이유는 자네가 여러 동물들의 단순관념을 합체시켜서 유니콘 이라는 복합관념을 만들었기 때문일세, 말의 몸, 염소의 뿔, 새의 날개 같은 것들을 말일세.
제자: 스승님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국가란 어떻게 만들어진 것 입니까? 또 이에 대한 홉스의 답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로크: 홉스는 자연을 지옥 같은 곳이라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달라, 인간은 홉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마냥 쓰레기 같은 존재가 아니야, 나름 이성적인 존재라고.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어느 정도 평화롭게 공존해서 살았을 거야.
제자: 평화롭게 공존해서 살았다면 왜 국가가 탄생한건가요?
로크: 그러나 평화로운 곳이라도 인간관계라는 게 갈등이나 시비가 일어날 수 있거든. 때문에 이를 공평하게 중재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해진거야.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국가를 탄생 시킨거지.
제자: 그럼 시민은 아무리 폭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왕한테 저항하면 안 된다는 홉스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로크: 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야, 만약 통치자가 폭정을 한다면 시민들은 얼마든지 통치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통치자와 사회계약을 맺을 수 있어.
한편 후대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흄: 선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인식론을 관념이라는 것으로 너무 애매하고 뭉뚱그려서 설명했던 것 같아. 나는 기존의 이런 인식론을 인상과 관념 이 두 가지로 나누고 싶어.
제자: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흄: 인간은 눈, 코, 입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외부의 지식을 습득하지, 이때 감각기관을 통해서 뚜렷하게 받아드리는 것이 바로 인상이야, 그리고 인상이 사라진 후 상상이나 회상으로 떠올리는 것이 바로 관념이고. 예를 하나 들어주자면 네가 사과를 눈으로 볼 때 생생하게 보고 있는 사과의 이미지가 바로 인상이야, 그리고 네가 눈을 감았을 때 떠올리는 사과의 이미지가 바로 관념인 거고.
또한 흄이 이어서 말하길
흄: 나는 인과관계라는 것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해. 우리는 A에 의해서 B가 작동할 때 이 둘은 인과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A의 움직임과 B의 움직임만 봤을 뿐 이 둘의 인과관계에 대한 어떠한 인상도 얻을 수가 없어.
제자: 스승님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니요?
흄: 이해하기 쉽게 물이 100도가 되면(원인), 물이 끓는다(결과)로 예를 들어보지. 우리는 이 둘에 대해서 어떠한 인과관계에 관한 인상도 얻을 수 없어. 그냥 전에도 계속 물이 100도에 끓으니까 당연히 이 둘이 인과관계에 있다고 착각한 거야. 하지만 앞으로도 물이 항상 100도에 끓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 지금까지 100도에 잘 끓다가 갑자기 100도에 안 끓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우리는 ‘전에도 늘 그랬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바로 이게 귀납법의 오류야! 앞으로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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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역법 모든 사람은 죽는다.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니까 죽겠군.
귀납법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플라톤은 죽는다..... ->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 거 보니까 모든 사람은 죽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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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하지만 스승님 그러면 우리의 과학지식이라는 것은 그러한 개개의 실험을 통해서 인과관계로 법칙화해서 가능한 건데요.. 그럼 우리의 과학은 불확실 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겁니까?
흄: 그건 나도 모르지(흄은 회의주의자였다.)
제자: 스승님 이번에는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어떠한 행동이 선한 행동이고, 어떠한 행동이 악한 행동입니까?
흄: 좋은 질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많이 알수록 선한 행동을 한다고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야. 이성은 인간의 도덕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해, 머리가 좋은 사람과 착한 사람은 다른 거야.
제자: 그럼 스승님 도덕성에 이성 말고 무엇이 중요합니까?
흄: 오히려 도덕성에서 이성보다 감정이 더 중요한 덕목이야.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공감능력이 바로 선한 행동의 원천인거지. 예를 들어서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고아를 보면 동정심이 들고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즉 선한 행동은 이러한 도덕적인 감정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말일세.
한편 프랑스의 한 철학자는 홉스의 사회계약설에 불만을 제기하는데...
루소: 뭐 자연 상태가 지옥 같은 곳이라고? 천만의 말씀이야, 자연 상태야 말로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천국 같은 곳이라고.
제자: 그렇다면 왜 국가가 탄생한 겁니까?
루소: 자연 상태에서 인구가 늘어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된 거네. 그러나 기득권층들은 평등과 보호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계약을 맺는 것을 강요하게 되었지.
제자: 그리고요?
루소: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실상 이런 사회 계약은 재산 불평등을 영구화 시키며 기득권에게만 좋은 정책이라고!! 결국 국가란 이런 기득권들 때문에 탄생한 것이네..
제자: 그러면 지금 사람들이 모든 국가와 법을 없애고 다시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루소: 현실적으로 다시 자연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겠지. 그러나 어떠한 불평등도 없었던 자연 상태의 이상향을 국가가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러므로 국가에서 특정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은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루소의 이러한 혁신적인 사회계약론은 당시 유럽을 강타하게 되었고, 이는 당시 유럽의 시민혁명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절대왕권 시대를 붕괴시키게 된다.
한편 독일의 한 철학자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통합시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가지게 되는데..
칸트: 태어날 때부터 관념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합리론자들의 주장도 맞고, 관념을 얻으려면 감각경험을 통해 가능하다는 경험론자들의 주장도 맞아. 나는 사람이 지식을 얻으려면 이성과 경험 모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제자: 스승님 사람이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을 얻는지 알려주십시오.
칸트: 그 전에 내가 자네에게 질문 하나 하겠네. 자네는 자네가 보고 있는 이 사과와 실제 사과가 똑같다고 생각하나?
제자: 그.. 당연히 똑같지 않겠습니까?
칸트: 그런데 자네 그거 알고 있나?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너무나 제한적인 것 일세. 우리는 모든 전자기파 중에 가시광선이라는 지극히 좁은 부분밖에 인식할 수 없다네. 일부 곤충이나 파충류가 적외선이나 자외선까지 인식이 가능하다지만 이 역시 모든 전자기파와 비교하면 매우 좁은 영역일세. 즉 자네는 이 사과의 매우 적은 부분밖에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일세. 나는 이런 감각을 초월한 진짜 그 사물 자체를 ‘물자체’라고 부르겠네.
제자: 물자체요?
칸트: 그래 그리고 자네가 감각으로 보고 있는 그 세계를 현상계라고 부르겠네. 즉 자네가 눈을 통해 보는 사과 이미지는 현상계이고 인간의 모든 감각을 초월한 그 사과 자체는 물자체인 것 일세.
그리고 칸트가 말하길..
칸트: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는지 설명하겠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감각경험과 이성 두 가지 전부 필요하다네. 경험론자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 백지와 같은 상태라고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다네.
제자: 선천적인 형식이요?
칸트: 내가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감각경험과 이성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지? 감각경험의 선천적인 형식은 바로 시간성(시간을 인지하는 능력), 공간성(공간을 인지하는 능력)일세, 시간성과 공간성은 어떠한 감각경험을 통해 받아드리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형식일세.
제자: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요?
칸트: 그렇지, 마찬가지로 이성의 선천적인 형식으로는 범주화를 통해 사물을 개념화 시키는 능력(분량, 성질, 관계, 양상)이 있다네. 그럼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겠네. 자네는 자네의 눈을 통해 이 사과를 받아드린다네. 그렇게 받아드린 것을 감각의 선천적인 형식인 공간성과 시간성 그리고 이성의 선천적인 형식인 범주화 이 3가지를 통해서 자네의 머릿속에서 재구성을 시키는 거야. 즉 자네가 보고 있는 이 사과는 원래 이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 자네가 재구성해서 만든 이미지일세.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람을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거네.
제자: 스승님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어떠한 행동이 선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칸트: 좋은 질문이다. 어떤 행동이 선한지 나쁜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그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선한 행동을 하겠다는 선의지가 중요한 거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는 것(가언명령)은 선이 아니야. 어떠한 목적도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선한 행동을 하는 것만이 선인거야. 예를 들어주지. 길을 가다가 한 노인이 쓰러졌다고 가정해보자. ‘착한 일을 해서 천국에 가려고 혹은 선행을 해서 주목받으려고’ 와 같은 의도를 가지고 심폐소생술을 했다면 그것은 선한 행동이 아니야, ‘그 노인을 살리기 위해서’와 같이 행동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때만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야.
제자: 스승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한 행동을 해야 합니까?
칸트: 자네의 행위가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해야한다. 쉽게 말해서 어떤 행동을 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해야 한다는 뜻 인거야. 예를 들어서 길에 담배꽁초를 버리면 안 되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행위를 하면 길에 담배꽁초가 수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야.
경험론과 합리론을 통합한 칸트의 철학은 당시 유럽 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후 셸링, 피히테, 헤겔 같은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은 칸트의 철학을 계승한 철학을 펼치게 된다. 이런 철학을 독일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헤겔: 칸트는 정말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나는 사람이 감각할 수 없는 물자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칸트의 말은 동의하지 않아. 나는 이 세계가 우리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
제자: 그럼 물질이 정신에서 비롯된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헤겔: 그렇지, 우리의 정신은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한다네. 정반합이란 정과 반의 대립에서 그 타협점인 합이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하네. 예를 들어서 정이 속박이고 반이 자유라면 합으로 타협점인 규칙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이 합은 또 다른 정이 되고 새롭게 나타난 반과 대립하게 되고 여기서 또 다른 합이 생기는 거네, 이런 정반합의 과정의 무수히 반복되지.
제자: 정반합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하게 되는군요.
헤겔: 그렇지. 그리고 정반합을 통해 주관적인 정신은 객관적인 정신으로 발전한다네, 객관적인 정신에서는 더 이상 한 개인에 속하지 않고 시민사회, 국가를 아우르는 정신으로 확대 되게 된다네. 그리고 계속된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달성된 정신의 가장 완성된 형태가 바로 ‘절대정신’ 이라네.
제자: 그럼 세계가 우리의 정신에서 비롯된 거고, 정신은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발전하니까 세계도 지속적으로 발전 하겠네요?
헤겔: 그렇지, 우리의 역사 역시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절대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인거야.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전쟁, 폭정 같은 온갖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의 역사는 결국 점점 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 갈 거야.
제자:스승님,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입니까?
헤겔: 남성과 여성은 결혼한 후 자녀를 출산함으로써 가족을 구성하게 된 다네. 이 가족(정)과 시민사회(반)가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발전한 것이 바로 국가이네. 국가는 가족과 시민사회의 통합으로, 개인들의 유기체적 통일체이라고 할 수 있네. 이러한 국가를 통해 개인은 이성적 자유를 실현할 수가 있는 것일세.
제자: 앗 스승님 저기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이 우리 독일의 국경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헤겔: 내가 말했지, 세계는 점점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 갈 거라고. 나폴레옹이야 말로 우리 독일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더 발전된 국가로 만들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나플레옹을 보며) 저기 세계정신이 걸어가고 있구나(헤겔이 실제로 한말..)
제자:..(아무리 그래도 적군인데.. 너무 한 거 아닌가)
당시 근대철학자들 사이에서 이성에 대한 믿음은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 헤겔은 이성이 우리 역사를 발전시킬 것이면 이를 통해 낭만적인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헤겔의 철학에 열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만능주의 특히 헤겔주의에 반발하는 3명의 철학자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가 등장하게 되고. 이들의 등장은 현대철학의 시대를 열게 된다.
니체: 플라톤!! 기독교인들!! 당신들이 서구 사회를 망쳤어!, 당신들은 있지도 않은 이데아나 천국 만들어서 사람들의 가치를 마구 짓밟아 놓았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진짜며 현실 삶은 가짜라며 현실 삶을 비하했고, 기독교 역시 천국의 삶이 강조하고 현실에서는 희생과 인내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늘 선포한다. ‘신은 죽었다’! 더 이상 현실의 삶을 희생할 필요도 없고 등한시 될 필요도 없다.
또한 니체가 말하길
니체: 플라톤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도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기독교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야. 항상 우리에게 나약한 희생을 강요하게 되지.
지나가는 사람: 하지만 니체 천국이 없다면 우리는 왜 사는 걸까요?.. 만약 천국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 허무하지 않나요?
니체: 우리 인간에게는 존재를 뛰어넘어서 초월하려는 ‘힘에의 의지’ 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존의 기독교의 도덕관은 이러한 힘에의 의지를 억누르려고 했습니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힘에의 의지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초인’이 되어야 합니다. 초인이란 자신의 삶을 무한히 긍정하며 삶의 모순까지도 견딜 수 있는 존재입니다.
지나가는 사람: 그렇다면 니체, 우리는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니체: 예를 들어서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똑같이 반복된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에 우리가 죽는다면 다시 태어났을 때로 돌아가 완전히 똑같은 삶을 무한히 반복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만약 내가 삶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제 내 행동 하나가 무한히 반복될 것입니다. 그럼 나는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갈까요? 나는 나의 행동 하나 하나에 집중할 것이고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한편 니체와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독일 철학자가 등장하는데..
마르크스: 헤겔은 정신이 이 세계를 만드는 거라고 했지. 참 웃기지도 않는 말이야. 정신이 물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물질이 정신을 만드는 거라고. 정신도 뇌라는 물질의 작용에 불과한데 말이야. 그리고 헤겔은 변증법에 의해서 우리 역사가 절대정신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는데 나는 역사란 공산주의를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지나가는 사람: 공산주의요?
마르크스: 그렇소, 우리의 역사는 원시공동사회- 고대노예사회- 중세사회- 근대자본주의사회의 순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저는 각 시대를 계급 간 투쟁의 장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자급자족을 하던 원시공동사회에서 농경기술의 발전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여서 노예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첫 번째 계급투쟁입니다. 노예들은 자신이 일해서 생산한 결과에 대해서 소유권을 받지 못하고 모든 것은 노예의 주인이 독식하게 됩니다. 중세시대에 들어서면서 농노들과 영주들 간의 계급투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농도들은 노동의 결과들에 대해 아주 약간의 소유권을 얻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영주들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지나가는 사람: 그러면 근대자본주의사회에서 어떤 계급투쟁이 발생하게 됩니까?
마르크스: 현재 산업혁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동자들의 과잉공급은 그들의 임금을 최저수준까지 떨어뜨리게 됩니다. 한편 노동으로 생산된 물품들을 노동자들에게 지급된 임금보다 비싼 가격에 팔리게 되고, 여기서 차액인 잉여가치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 모든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독식하게 됩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 계급은 가난해지고 자본가 계급은 부유해질 겁니다. 결국 빈부격차는 점점 더 커질 것 입니다.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어나게 되고 이에 따라 사유재산을 없애고 모든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공산주의가 탄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어떤 형태를 지닐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여러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같은 공산주의자들은 독자적으로 공산주의를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 저런 것이 마르크스주의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실제로 한말)
마지막으로 프로이트는 이성에 대한 근대인들의 믿음을 산산조각으로 부셔버리는 획기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프로이트: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인식을 하고 판단을 하지. 아주 당연한 소리야. 근데 우리에게는 의식이 닿을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이 존재해. 우리가 지각하는 의식은 무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또한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의지와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야 우리의 이성이나 의식은 사실 무의식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라고.
젊은 융: 스승님 그럼 우리는 인간의 무의식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프로이트: 무의식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꿈의 분석, 최면 같은 방법이 존재하네. 보통 사람이 살면서 겪는 끔찍한 기억들이 트라우마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트라우마가 될 만한 기억은 무의식에 묻히게 되는데, 이렇게 무의식에 묻힌 기억은 정신질환을 야기하게 된다네. 히스테리가 대표적으로 무의식에 묻혀있는 기억 때문에 발생하는 정실질환이네. 나는 꿈의 분석이나 최면 같은 치료법을 통해 무의식에 묻힌 트라우마를 드러냄으로써 히스테리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네.
또한 프로이트는..
프로이트: 기존 사회에서 성욕은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받았지만 나는 성적 충동이 인간의 무의식 형성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 어린아이는 ‘구강기-항문기-남근기’라는 성격발전 단계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각 단계에서 성적 충동을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 성격장애가 생기게 될 거야.
기자: 그럼 혹시 박사님이 항상 시가를 피는 것도 구강성교에 대한 무의식적 집착 때문입니까?(기자가 프로이트에게 실제로 한말)
프로이트:....
한편 근대철학의 경험론은 실증주의와 공리주의로 계승되게 되는데, 이러한 실증주의는 우리의 현상계(칸트 참고)를 불확실하고 쓸데없이 주관적인 것이라며 깎아내리게 된다. 이를 보다 못한 후설은 우리는 현상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현상학이라는 학파를 창립하게 된다.
후설: 바보들아, 니들 실증주의는 현상계를 마치 저열한 것 취급하지만, 철학의 진정한 목표는 바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현상자체를 탐구하는 거라고!!
한편 후설의 제자였던 하이데거는 스승의 세운 현상학에 큰 감명을 받는다. 그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그의 철학을 시작할 결심을 하게 된다.
하이데거: 존재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 예를 들어서 ‘책상 위에 사과가 존재한다’ 라는 문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고. 여기서 ‘존재한다’ 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나는 철학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존재’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또한 나는 과거 철학자들이 이 존재라는 것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해.
제자: 과거 철학자들이 존재에 대해서 잘못 이해했다고요?
하이데거: 그래 과거의 철학자들은 존재를 너무 뭉뚱그려서 이해했어. 나는 존재와 존재자를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해. 존재자는 쉽게 말해서 존재하는 사물이야. 고양이, 나무, 책상 같은 것들이지. 그리고 존재는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그 무언가지. 한마디로 존재자가 존재를 하는 거야. 인간은 존재자이기는 한데 다른 존재자들과는 좀 달라. 인간은 ‘우리는 왜 존재할까? 존재란 무엇인가’ 라면서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는 존재이거든. 그래서 나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해.
제자: 현존재요?
하이데거: 그래 우리 중 그 누구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는 아주 우연히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연약하게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히 죽는 존재지. 따라서 우리 현존재들은 우리가 하필 왜 존재하는 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거야. 그러나 모든 현존재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것은 아니야. 자신의 삶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 없이 삶의 방향성을 잃고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지.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는 순간이 오게 돼, 바로 죽음과 직면 할 때야.
제자: 죽음과 직면 할 때요?
하이데거: 그래, 사람들은 마치 죽음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아주 먼 미래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어. 즉 우리의 존재가 사라지는 거지. 우리는 부나 명예가 인생의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막상 죽음과 직면하게 된다면 그런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될 거야. 현존재는 죽음을 통해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알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우리가 평상시에 지나쳐가는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같은 존재자들이 모두 경이롭게 느껴질거야.
하이데거: 한국의 시인 김춘수의 꽃을 낭송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번 강의를 마무리 짓도록 하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의 철학은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등 다양한 학파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실존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철학자로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가 있다.
사르트르: 나 역시 하이데거처럼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철학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해. 의자의 존재목적은 앉는 거고 망치의 존재목적은 못을 박는 거야, 하지만 인간의 존재목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우리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야. 나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존재의 근거를 만들어 가야한다고 생각해.
또한 사르트르가 말하길
사르트르: 하이데거는 이 세계를 존재자와 현존재로 분류했는데 나는 더 세분화해서 사물, 나, 그리고 타자(나 말고 다른 사람)로 분류하고 싶어. 나는 그 중에서 타자에 집중하고 싶어.
제자: 나와 타자는 어떤 관계입니까?
사르트르: 자네 혹시 자네한테 갑자기 시선이 쏠렸을 때 수치심을 느낀 적 없나? 수치심이 생긴 이유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자네가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일세. 만약 내가 혼자 있다면 남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겠지. 그러나 타자의 시선이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내 자신을 객체화해서 내 외모나 목소리 등을 신경 쓰게 되어 버리지. 나의 세계가 타자에 의해서 침범 당한단 말일세.
제자: 그러면 저는 타자의 시선에 대해서 어떻게 대항해야 합니까?
사르트르: 두 가지의 방법이 있네, 하나는 나 역시 타자를 바라보는 것으로 타자를 객체로 만들어 버리는 것 일세. 이 경우 나와 타자 사이에 시선 투쟁이 발생하게 된다네.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이나 증오가 이 방법에 속한다네.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시선에 의해 객체화 된 나의 모습을 내가 받아드리는 것일세. 사랑이 바로 이 방법에 속한다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객체화 된 나의 모습을 받아드린다면 나의 존재 근거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한편 프랑스에서 구조주의라는 독창적인 사상이 발전하게 된다. 구조주의란 나와 세계 사이에 하나의 구조를 놓고 탐구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이런 구조주의는 철학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소쉬르는 언어학,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 라캉은 정신분석학, 알튀세르는 마르크스학에 구조주의를 접목시켰다.
그러나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모든 것을 구조화시키고 획일화 시키는 이런 구조주의 철학에 반감을 들어내게 된다. 또한 그들은 구조주의 철학뿐만 아니라 데카르트부터 칸트, 헤겔로 이어진 모더니즘 철학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기존의 모더니즘 철학은 지나치게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였고 그 부작용으로 나치즘과 파시즘이 등장했고 세계 대전을 발생시켰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모더니즘의 대안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제시하게 된다. 대표적인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로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을 뽑을 수 있다.
푸코: 근대철학자들이 근대화가 인류를 더 나은 상태로 진보시킨다고 보았지, 하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아. 근대화는 오히려 인류를 억압시켜 놓았다고 생각해.
제자: 근대화가 인류를 오히려 억압했다고요? 어떻게 억압했다는 건가요?
푸코: 내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보지. 이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 인간 개개인 모두는 전부 수많은 개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지. 하지만 근대화에 들어서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가장 이상적이고 표준적인 인간상을 만들게 되네.
제자: 왜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런 표준적인 인간상을 만든 건가요?
푸코: 바로 국민을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지. 사람들은 사회, 학교, 미디어로부터 이러한 표준적인 인간상을 강요받게 된다네. 그 결과 수많은 개성을 가진 인간은 그 표준적인 인간상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네, 그리고 이 표준적인 인간상에 들지 못하게 된다면 사회는 그 사람에게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게 되지.
제자: 결국 국가는 과거처럼 강압적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킬 필요가 없는 거네요. 권력이 자신의 입맛대로 표준적인 인간상을 만들고 사람들은 이 표준적인 인간상에 들기 위해서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버리니까요.
푸코: 정확하네. 또한 나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지식들의 역시 권력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고 생각하네. 고정된 진리란 존재하지 않아. 진리라는 것은 권력층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일세. 나는 대표적인 예로 정신병자 즉 광인을 들고 싶네.
제자: 광인이요? 미친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요?
푸코: 그렇다네, 과거 광인은 전혀 부정적인 대상이 아니었어, 오히려 신통력을 가진 사람들이라 생각되었지. 그러나 근대로 들어서면서 광인들은 비정상적인 정신병원에서 격리 되어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네. 광인의 뜻이 완전히 달라져버린 것이지. 과거에는 정상으로 여겨졌던 광인들을 근대에 들어서 비주류라는 이유로 비정상으로 낙인을 찍어버린 걸세. 결국 권력이 모든 지식을 재생산 하는 거야.
한편 레닌, 스탈린은 마르크스를 잘못 이해했으며 서구 사회는 마르크스를 서구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사상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네오 마르크스주의라 불리게 된다. 네오 마르크스 주의의 대표적인 철학가로 벤야민, 그람시, 루카치를 뽑을 수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런 네오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독자적인 사회 철학을 펼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1세대 철학자로 아도르노를 뽑을 수 있고 대표적인 2세대 철학자로 하버마스를 뽑을 수 있다.
하버마스: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들은 근대화가 실패했고 이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비록 현대에 들어서 근대화의 부정적인 측면이 들어났기는 했지만 긍정적인 측면 역시 있다고 생각해.
또 하버마스가 말하길..
하버마스: 이전 철학자들은 근대화의 과정을 단순히 목적합리성(효율성)의 극대화라고 보았어. 예를 들어서 국가는 관료주의를, 그리고 시장은 자본주의를 극대화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 시켰던 거지. 그러나 이렇게 효율성만 극대화가 되게 된다면 인간이 도구처럼 취급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지. 하지만 근대화의 과정은 단순히 목적합리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제자: 그럼 근대화의 과정에는 목적합리성 외에 또 무엇이 있나요?
하버머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목적합리성과 함께 의사소통의 합리성 역시 발전하게 되지.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고 토론을 통해 더 나은 결론을 맺을 수 있는 능력 역시 발전한다는 거야. 다시 말해서 근대화 과정을 통해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의 합리성 이 두 가지가 동시해 발전하는 것이야.
제자: 스승님 질문 있습니다, 그럼 근대화를 통해 일어났던 부작용들은 이 두 가지 합리성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버마스: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사회가 존재하네. 하나는 ‘사회체계’로 국가의 행정체계와 자본주의 시장체계가 속하는 곳이지. 그리고 근대화가 진행되면 이곳에서 목적합리성이 극대화된다네. 나머지 하나는 바로 ‘생활세계’, 말 그대로 우리 개개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근대화가 진행되면 의사소통의 합리성이 발전하는 곳이라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이 두 가지 사회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된 걸세.
제자: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 입니까?
하버마스: 바로 사회체계가 생활세계의 영역에 침범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생활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걸세. 의사소통이 중요한 영역에서 지나친 효율성만을 강조했으니 사회적 문제가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시 이 두 가지 사회의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네. 생활 세계를 사회 체계로부터 독립시켜야 하는 것일세.
한편 유럽대륙에서 현상학, 실존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등 다양한 철학이 발달한 것처럼 영미권에서는 분석철학이라는 아주 독특한 철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분석철학은 프레게와 러셀에 의해서 만들어진 철학사조인데, 이 둘은 당시 영국에서 유행했던 헤겔의 관념론에 대항하여 분석적이고 실증적인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철학의 모든 문제는 언어에서 발생하였으며, 그러므로 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한다면 모든 철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한 오스트리아 청년이 나타나 분석철학의 기틀을 잡아놓기 시작하는데..
비트겐슈타인: 러셀 스승님, 저는 언어가 우리 세계를 반영해주는 그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복도에 고양이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나는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 사람을 복도로 데리고 갈 수도 있지만, ‘복도에 고양이가 있다’고 언어를 통해 말해줄 수도 있죠. 이것은 마치 복도에 있는 고양이를 그림으로 그려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다시 말해 언어란 세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인 셈입니다.
러셀: 음.. 그런가? (이 자식.. 감히 스승을 가르치려고 해? 많이 컸구나..)
비트겐슈타인: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언어가 이 세계를 재현하는지 알 필요가 있겠죠. 그러기 위해 저는 언어를 4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먼저 가장 하위 개념인 단어가 있고요(탁자, 사과), 그 단어들이 합쳐져서 단일명제가 만들어 집니다.(탁자위에 사과가 있다.) 그리고 단일명제가 합쳐져서 복합명제가 만들어지고요.(탁자위에 사과가 있다, 그리고 탁자 아래 강아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복합명제가 모두 모이면 언어가 되는 겁니다. 제 생각에 이 4가지 중에 단일명제가 세계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실과 대응되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단일명제가 모여서 생긴 언어는 사실이 모여서 생긴 세계를 재현하게 되는 겁니다.
러셀: 이봐 비트겐슈타인, 예를 들어서 책상 위에 사과가 있다고 가정해봤을 때 ‘사과가 책상위에 있다’라고 명제를 만들 수 있겠지. 그럼 이 명제와 대응되는 하나의 사실이 존재하는 것일세. 그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직접 책상에 데리고 가서 책상 위에 사과가 존재하는 사실을 보여주던지, 아니면 그 명제를 다른 사람에게 언어로 말해주던지 둘 중에 하나를 하면 되겠지. 그러나 항상 하나의 단일명제에 하나의 사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예를 들어서 ‘이 그림은 아름답다’ 혹은 ‘기부는 착한 행동이다’ 같은 명제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대응하는 사실이 없지 않나?
비트겐슈타인: 저는 하나의 사실에 대응할 것이 없는 명제를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이런 명제들을 가지고 왈가왈부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명제들에 대응될 수 있는 사실이 없기 때문에 증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기존 철학자들은 무슨 답이 있는 것 마냥 이 문제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선언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되어야 합니다.
러셀: 그래 대단한 발견을 하느라 참 고생했네...
비트겐슈타인: 저의 이론을 더 알고 싶으시다면 제가 집필한 책인 ‘논리철학논고’를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만 철학계에서 은퇴할 생각입니다.
러셀: (이런 싸가지 없는 놈..)
한편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은 당시 영미권 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여기에 자극을 받아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사변은 모두 제거하고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을 분석해야 한다는 논리실증주의 학파가 창설되게 된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시골로 내려가 선생님이 되었는데.
논리실증주의자: 헉...저기.. 혹시 비트겐슈타인씨 인가요?
비트겐슈타인: 네 그런데요?
논리실증주의자: 우리는 당신을 신으로 숭배합니다.
비트겐슈타인: 네?..............
그러나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자부했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이론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는 철학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향하게 된다.
무어: 이봐 러셀,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는데 말이야.. 박사학위를 따고 싶어 하더군, 그리고 자네에게 논문심사를 요청했네.
러셀: 논문 제목이 뭐지?
무어: ‘논리철학논고’, 20세기 초반 영미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철학저서...
러셀: ........... 내 살면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논문심사는 처음이군(러셀이 실제로 한말)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초기에 세웠던 철학 이론을 수정하게 되는데, 훗날 사람들은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을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부른다.
비트겐슈타인: 예전에 나는 언어를 그림이라고 표현했는데, 잘못 생각한 거였어요. 언어는 게임 같은 겁니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 하나의 명제는 하나의 사실에 대응한다고 했는데 이 역시 잘못 생각한 거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명제는 서로 다른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사실에 대응하거든요.
러셀: 하나의 명제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사실에 대응한다고?
비트겐슈타인: 네 맞아요, 예를 들어서 ‘이봐 자네, 망치!’ 라는 명제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지금 상황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 옆 사람에게 망치를 달라는 뜻이고, 망치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면 옆 사람에게 망치를 조심하라는 뜻이 되는 거죠. 다시 말해 명제는 상황에 따라서 대응하는 사실이 달라지는 겁니다. 마치 게임의 규칙 같은 겁니다.
러셀: 언어는 게임같은 거라고?
비트겐슈타인: 네 맞아요, 카드 게임을 할 때 게임의 참가자 모두 규칙을 알아야 게임이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대화를 할 때 같은 언어 규칙을 공유해야만 대화가 통하는 겁니다. 망치를 달라고 ‘이봐 자네 망치!’ 라고 했는데 상대방은 망치가 떨어지는지 알고 도망가면 대화가 되겠습니까?
논리실증주의자: 이럴 수가.. 우리의 신이 타락했다..
한편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외도(?)에도 여전히 논리실증주의의 위세는 굳건하였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에 큰 타격을 입히고 마침내 무너뜨린 철학자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콰인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명제를 종합 명제와 분석 명제로 구분하였다. 종합명제는 그 문장이 사실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외부의 세계에서 확인해봐야 하는 명제를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유재석은 총각’이다‘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이 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재석이 진짜 총각인지 확인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분석명제는 참인지 확인하기 위해 외부의 세계에서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명제를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총각은 결혼하지 않는 남자이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총각과 결혼하지 않는 남자가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 종합명제와 분석명제를 잘 분석해서 이를 통해 과학 같이 다른 분야를 돕는 것이 철학의 주된 목표라고 생각했다.
콰인: 당신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모든 명제는 종합명제와 분석명제 구분할 수 있다는데 내 생각은 좀 다릅니다.
논리실증주의자: 무슨 말씀입니까?
콰인: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분석명제는 왜 외부세계에서 확인을 필요가 없는 겁니까?
논리실증주의자: 왜냐하면 주어와 주어 뒤에 있는 단어가 동의어(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는 분석명제입니다. ‘총각’ 과 ‘결혼하지 않는 남자’는 동의어이기 때문에 다른 문장에서 ‘총각’ 대신에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대입해도 여전히 참이겠죠. 철수는 (총각)이다 -> 철수는 (결혼하지 않는 남자)이다. 어때요 대입해도 여전히 참이죠? 따라서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는 분석명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논리실증주의자: 반면 종합명제는 주어와 주어 뒤에 있는 단어가 동의어가 아니므로, 다른 문장에 대입하면 참이 아닐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모든 백조는 흰색 새이다’는 종합명제일까요? 분석명제일까요? 이때는 ‘백조’ 대신에 ‘흰색 새’를 대입해 보고 여전히 참인지 확인해 보면 됩니다. 한번 ‘(백조)는 목이 길다’에 대입해 봅시다. -> (흰색 새)는 목이 길다. 하지만 비둘기 역시 흰색 새지만 목이 짧지 않습니까? 결국 이 문장이 거짓이 되므로 ‘모든 백조는 흰색 새이다’는 종합명제입니다.
콰인: 이런 명제는 어떻습니까? ‘심장을 가진 동물은 콩팥을 가진 동물이다.’ 심장이 피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역할을 한다면 콩팥은 피를 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심장과 콩팥은 서로 필수불가결 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장을 가진 동물은 모두 콩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른 문장에 ‘심장을 가진 동물’ 대신에 ‘콩팥을 가진 동물’을 대입해도 전부 다 참과 거짓이 변하지 하지 않습니다. 개는 (심장을 가진 동물)이다 -> 개는 (콩팥을 가진 동물)이다. 고로 이 두 개는 동의어고 ‘심장을 가진 동물은 콩팥을 가진 동물이다.’는 분석명제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논리실증주의: ...(이게 아닌데..)
콰인: 그런데 ‘심장을 가진 동물은 콩팥을 가진 동물이다.’ 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세계에서 확인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럼 종합명제 아닙니까? 도대체 이 명제의 정체는 분석명제입니까? 종합명제입니까? 결국 저는 종합명제니 분석명제니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리실증주의: .......
한편 물리학자였던 토마스 쿤은 어느 날 대학으로부터 과학사를 강의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토마스 쿤: 그래, 그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가르치면 되겠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자연학을 핀다.) 응? 이 끔찍한 오류는 뭐야? 아리스토텔레스는 역학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잖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시대에서 나름대로 뛰어난 탐구방법을 가지고 과학을 연구했지만 지금 기준에서 보면 맞는 말 자체가 없는 것 같아..
토마스 쿤: 지금 기준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의 과학을 보면 참 웃기지도 않는 말들이 많지만 어쩌면 미래의 기준에서 지금 과학을 보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현대 과학을 비웃지 않을까? 한번 과학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는 지 탐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아.
토마스 쿤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저의 유명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저술하게 된다. 그는 이 책으로 인해 과학철학계의 거두로 떠오르게 된다.
토마스 쿤: 과학은 전 과학 -> 정상과학-> 위기-> 과학혁명 이렇게 총 4가지 과정을 통해 발전합니다. 전 과학은 아예 과학의 패러다임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원시시대를 의미합니다. 패러다임이란 과학자들이 공통으로 이해하는 과학적 틀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뉴턴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 불변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뉴턴의 패러다임은 아인슈타인 이전까지 과학자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이해되는 상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이 확립되는 시기가 바로 정상과학 단계입니다.
청중들: 그럼 그런 정상과학에 어떤 위기가 오는 겁니까?
토마스쿤: 위기 단계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이상한 현상들이 지속적으로 관측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수성의 근일점 이동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뉴턴의 고전역학으로는 이 수성의 근일점이 이동하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다가 과학혁명 단계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드디어 아인슈타인의 패러다임에서 상대성 이론을 통해 수성의 근일점 이동의 설명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과학혁명 단계에서 다시 정상과학단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과학 단계들이 반복되는 됩니다.
청중: 그럼 우리의 현대 물리학도 언젠가는 그 패러다임이 깨질 것이라는 건가요?
토마스 쿤: 물론입니다. 대표적으로 표준모형에서 중력의 부재,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의 정체 등 현대 물리학의 패러다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상들이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들을 해결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때 한 수염 덥수룩한 남자가 일어난다.
청중: 앗! 20세기 후반 최고의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야!
스티븐 와인버그: 당신은 과학이 마치 상대적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나는 당신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 현대 과학자들은 뉴턴의 고전역학을 다소 보완한 거지, 완전히 갈아 엎은게 아니란 말입니다!!!!
토마스 쿤: 훗 과연 그럴까요? 그거야 미래에 가면 알게 되겠죠.
한편 존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했던 정치철학자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였다.
존 롤스: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 끼리 공정한 절차의 협의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 해. 그러나 현재 이 상태로는 합의점을 찾을 수 없을 거야.
제자: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고요? 왜 그렇죠?
존 롤스: 인간은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 하려고 하고 타인의 이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존재거든. 결국 서로의 이익만 극대화 하려다가 합의점을 찾을 수가 없는 거지.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지의 베일’ 이라는 가상의 실험을 제의하고 싶어.
제자: 무지의 베일이요?
존 롤스: 그래 이 무지의 베일을 머리에 씌우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 내 사회적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게 돼. 일종의 기억상실증 같은 거야. 이렇게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머리에 무지의 베일을 씌우고 협의를 한다고 생각해봐. 그럼 사람들은 부자와 빈민들 중 누구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결론이 날까?
제자: 자기가 빈민인지 부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 빈민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결론이 나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부자의 경우 사회의 이익이 우선시 되지 않아도 원래 돈이 많으니까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지만, 빈민의 경우 이익이 우선시 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빈민일 때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요. 아무래도 사람들은 위험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빈민의 이득을 극대화 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잡겠죠.
존 롤스: 아주 정확해, 그리고 사람들은 바로 이런 협의를 통해서 두 가지 원칙에 대해 동의하게 될 거야. 첫째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로 유일하게 불평등이 용인되는 경우가 있는데 아까 말한 것처럼 사회적 약자에게 이익을 극대화 할 때야. 정리해서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이 주어져야 하지만 약자를 배려하는 선에서 어느 정도 불평등은 용인될 수 있다는 거야.
존 롤스의 이러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영미권 철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곧이어 로버트 노직으로 대표되는 자유지상주의, 마이클 센델, 마이클 왈저 등의 공동체주의 등도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정치철학 이론을 발표하면서 소위 정치철학 논쟁의 불을 지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