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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이순신家 종손들의 항일 활동 증거‘충무공 종부’가 증언하는 항일 역사

작성자lanni|작성시간23.09.26|조회수2,034 목록 댓글 2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cheolsu2660&logNo=222960780155&proxyReferer=https:%2F%2Fm.search.daum.net%2Fsearch%3Fw%3Dtot%26nil_mtopsearch%3Dbtn%26DA%3DYZR%26q%3D%25EC%2584%25B1%25EB%25B2%2594%25EC%25A3%2584%25EC%259E%2590%2B%25EC%258B%259C%25EB%258F%2599%25EC%2583%259D

[단독 발굴] 이순신家 종손들의 항일 활동 증거

‘충무공 종부’가 증언하는 항일 역사

/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hlee@chosun.com
















⊙ 13대 종손 조선총독부가 ‘독립운동 혐의자’로 명시

⊙ 충무공 종부, “독립운동 가문으로 인정받고 싶다”

⊙ 독립 유공자 선정 가능성 높아

⊙ 서자(庶子) 논란 등 충무공 16대 종손 문제

⊙ 고택 터 경매·문화재 유출 의혹 등 해명

⊙ 충무공 종부, “조상님께 누를 끼쳐 죄송”






1928년 조선사편수회가 이순신 집안을 방문해 유물 조사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

원 안은 이종옥·이응렬 선생 父子.

1934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은 극비로 《국외 용의(容疑) 조선인 명부》를 작성했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해외 조선인 범죄자 명단’이다. 명단에는 조선인 독립운동가 2400여 명의 생년월일, 본적, 활동사항이 기록돼 있다. 이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대한독립을 위해 몸바쳤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로 인정한 문서이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 경무국은 밀정(密偵), 독립운동계 변절자 등 첩보·정보망을 총망라해 문건을 작성했다. 명부에 기록된 주요 인물은 이렇다.



* 김구(金龜)

•별명 김구(金九), 백범(白凡), 1876년 7월 11일생.

•1922년 9월 상해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를 폄하하는 용어) 내무총장에 취임한 이래 노동총판, 국무령, 민단장의 요직에 있으며, 재외 불령선인(不逞鮮人·못된 조선인) 중의 거두임. 1932년 1월 동경 이봉창의 불경(不敬) 사건(일본 천황 폭탄투척 사건) 및 같은 해 4월 상해 윤봉길의 폭탄투척 사건 사주.

•현재 애국단장 및 중한호조연합회 간부로서 중국군사위원회와 연락하여 소속 군관학교 간부훈련단에서 조선인 단원의 양성에 노력함과 함께 재외 동지를 규합하여 불령운동(독립운동)에 분주 중임.



* 김원봉(金元鳳)

•별명 약산(若山), 운봉(雲峯).

•재외 불령선인의 거두로서 1919년 6월 중국에 건너간 이래 의열단장으로서 불령운동에 분주 중인 자로, 최근의 정보에 따르면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단의 중요 간부로서, 단원의 모집 및 단원의 훈련에 노력하고, 재외동지와 함께 흉포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극력 노력 활동 중.



* 지대형(池大亨)

•별명 이청천(李靑天), 지용기(池龍基), 1888년생, 거주지 지나(支那, 중국) 북평(北平, 북경), 본적 경성부(서울) 내자동 128

•적시 내용 : (일본군) 보병중위로서 제10사단 제10연대에서 근무 중, 1919년 6월 만주로 도주한 이래 한국독립당 수령으로서 부하와 함께 여러 차례 흉포행위(무장독립투쟁)를 감행한 이래, 만주사변 발생 이후 황군(일본군)의 토벌을 만나 소련 영내로 도망함. 그 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1933년 북평(중국 북경)에 잠입하여 현재 그곳에 있으면서 (중국) 남경정부의 원조를 받아 김구, 기타 동지와 연락하며 각종 흉포계획을 세우며 반일본, 반만주국(일본의 괴뢰국) 운동에 활동 중임.



* 이동녕(李東寧)

•별명 이석오(李石梧)

•1910년 상해로 도항(渡航)하여 1919년 참칭(僭稱, 분수에 넘치는 칭호) 임시정부를 조직함. 이하 임시정부 간부 내력 열거

1919년 대리 국무총리,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1921년 대리 국무총리, 군무총장, 국무총리

1924년 대리 대통령

1926년 법무총장

1927년 국무위원 주석, 법무총장

1931년 의정원 의장

1933년 3.6 국무위원에 취임함.


이순신 종손들의 독립운동 증거들



《국외 용의 조선인 명부》 문건 이외에도 충무공 종손들의 독립운동의 증거 자료는 많다.



13대 종손 이종옥 선생(1887~1941)은 항일 무장투쟁의 본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1914년 3회로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충무공의 12대손 이세영(1869~1938)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곳이다.



이종옥 선생의 장남 14대 이응렬(李應烈) 선생(1914~1993)은 보성전문 상과를 졸업하고 일제의 내선일체를 비판하다 옥고를 치렀다. 14대 종손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을 보면 활동상이 구체적이다. 14대 종손은 1942년 10월 19일부터 1943년 2월 24일까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됐다. 기록에는 얼굴 사진과 지문기록까지 남아 있었다. 그는 경성지방법원 재판을 통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일제가 반정부·반체제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제정한 법률로 독립운동 탄압에 주로 이용됐다.



① 《신한민보》(1919.6.21자 3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재미한인 (독립운동) 교민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 발행하던 《신한민보》에 “우리 독립군 50여 명이 결사대를 조직하고, 경성에 들어가… 군비를 조달하다가 왜놈에게 빼앗기고, 11명의 독립군이 체포됐다”고 보도됐는데, 이 명단에 ‘리종옥’ 선생 등장.



② 1942년 4월 14일 이응렬 선생 신문조서



이응렬 선생은 1942년 4월 14일 경성 용산경찰서에서 일본 경찰의 심문을 3회째 받고, 1942년 10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3년 2월 24일 석방되었다.



1942년 4월 14일 세 번째 일본 경찰의 심문기록을 보면 여러 차례 부친 이종옥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부친 이종옥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있고 독립운동과 사상 사건 등으로 2·3차례 경찰에 끌려간 적이 있고, 중국군관학교(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가서 상당히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활약했다고 진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종옥은 시기가 오면 조선은 독립한다고 아들 이응렬에게 가르쳐 왔다.



1942년 4월 14일 경성 용산경찰서에서의 신문조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망부(亡父·죽은 아버지)의 성명은.



“이종옥이다.”



- 몇 남으로 태어났는가.



“나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 왜 창씨개명하지 않았는가.



“망부 이종옥이 그 당시 수속을 하지 않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현재 조선의 상태로서는 조선독립은 불가능하지만 시기가 오면 독립이 가능하다고 말하였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부친이 소화16(1942)년 1월 돌아갔을 때 조선의 실정을 이야기하며 현재 조선의 상태로서는 조선인은 무기도 없고 모두 일본화하고 있으므로 도저히 실현이 어렵다고 말하였다. 만약 조선인 전 체가 일치단결하여 조선인이라는 각오를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조선도 독립할지도 모른다고 들려주었다.”



- 망부는 주의 사상가였는가.



“주의 사상 사건으로 경찰에 2~3회 정도 끌려간 사실이 있다.”



- 망부의 경력은 어떠하였는가.



“나의 부친은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어렸을 때는 만주로 도망쳐 상당히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활약했다고 한다.”



- 그대는 민족주의 사상을 망부로부터 교양 받았는가.



“그렇다.”



충무공 13대 종손 확인


1934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이 발간한 《국외 용의(容疑) 조선인 명부》.

《월간조선》은 해당 명부에 충무공 이순신 13대 종손(宗孫) 이종옥(李種玉) 선생(1887~1941)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단독 확인했다. 이종옥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은 언론을 통해 조금씩 알려져 왔다. 그러나 《국외 용의 조선인 명부》에 적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졌다. 이름이 ‘이종우’로 잘못 기재되었기 때문이다. 인적사항을 보면 이름은 ‘이종우’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지만, 나이(1887년생), 본적(충남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이 일치하는 것으로 볼 때 이종옥 선생이 분명하다.



활동내용을 보면, “민족주의. 1914년 봉천성(지금의 지린성) 통화현에서 항일 조선인이 의병(독립군) 교양을 목적으로 설립한 신흥학교에 입학할 목적으로 만주로 건너가 현재 위 주소지(길림성 액목현 이정만의 집)에서 영농 중에 있다”고 적혀 있다.





종부 최씨, “독립운동 가문으로 인정받고 싶다”



조선총독부 문건 발굴을 추진하게 된 것은 5월 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 가문 15대 종부(宗婦·종가의 맏며느리) 최모(60)씨 인터뷰가 계기가 됐다. 5월 초 충청남도 천안시 구성동 카페에서 만난 충무공 종부 최씨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자신에 대한 따가운 시선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4월 28일 충무공 탄생 471주년을 기념해 만나자는 요청을 최씨는 수차례 거절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오랜 설득 끝에 시작된 기자와의 만남에서 최씨는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놓은 집안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다”고 밝혔다. 최씨는 사업 빚에 몰려 아산 현충사 고택(故宅) 땅을 경매에 넘어가게 하는 등의 사건으로 과거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부정적인 보도가 대부분이었던 탓에 최씨는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절해 왔다.



첫 만남에서 최씨는 “집안의 독립운동 사실을 알리고 싶다”며 이렇게 부탁했다.



“일제시대 때 종손들이 독립운동을 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그분들로부터 직접 증언을 들었고, 증거도 가지고 있어요. 늦었지만 독립운동 가문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충무공 이순신 종손들이 항일에 나섰다는 사실은 과거 언론 등을 통해 조금씩 소개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했고 독립운동의 당사자들이 이미 사망해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독립유공자 선정 가능성 높아”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수원 교수실장.

이러한 이유에서 5월 초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수원 교수실장에게 자료 발굴과 검증을 요청했다. 장 실장의 협조를 얻어 잃어버렸던 역사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종손들의 독립운동을 확증, 검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 발굴됐다”는 연락을 5월 중순 받을 수 있었다.



장 실장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 6월 발행한 《국외 용의 조선인 명부》를 찾아냈다.



문건 발굴로 종손들의 독립운동 유공자 선정이 가능하게 됐다. 장 실장은 “이종옥 선생(13대 종손)은 가능성이 크고, 이응렬 선생(14대 종손)의 경우 1945년 8월 이전에 친일행적이 없고, 그 이후의 행적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독립유공자 선정(포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렇듯 독립운동 사실이 뚜렷한데 왜 아직까지 이순신 종손들의 독립운동 사실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최 종부에게 이유를 물었다.



“종손들이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했어요. 그럴 겨를이 없었죠. 다 돌아가시고 종부로서 여자 혼자 남았어요. 절차를 잘 몰랐어요. 저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을 잘 알아요. 혹시 제가 유공자 신청을 하면 돈을 노리고 신청했다고 말하지 않을까 두려웠어요. 오랜 기간 누구를 종손으로 정할지를 놓고 집안에서 싸웠어요. 이제야 종손을 제대로 세울 수 있었어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후손을 위해서라도 늦추면 안 될 것 같아 늦었지만 나서게 되었어요.”



어느 집안이나 나름의 갈등과 대립이 있다. 보통 이러한 갈등은 오랜 시절부터 시작된 뿌리가 있기 마련이다. 집안 내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간의 과정 전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이유다.





박정희 대통령, 14대 이응렬에게 아산 군수 권유



충무공 14대 종손 이응렬 선생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

14대 종손 이응렬 선생은 1942~43년 거의 1년간 일본 경찰에 반일 언동죄로 붙잡혀 심문과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42년 4월 14일 경성 용산경찰서에서의 신문조서에서 주의 깊게 볼 부분이 있다.



“망부(이종옥 선생)는 주의(主義) 사상가였는가”라는 조사관의 질문에, 이 선생은 “주의 사상 사건으로 경찰에 2~3회 정도 끌려간 사실이 있다”고 대답했다. 당시 ‘사상 사건’은 사회주의 운동을 말한다. 당시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은 좌익이었다. 혹시 최 종부가 관련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관련해 물었다.



― 시아버지(이응렬 선생)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세요.



“박정희 대통령께서 아산 군수를 권했지만, 아버님이 거절했어요. 주위에서 국회의원 나가라고 했지만 정치를 싫어하셨죠. 아버님은 보성전문 시절 좌익운동을 하셨어요. 마르크스 레닌 이론이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이론은 현실과 다르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말씀하시기를 ‘난 북도 싫다’고 하셨어요. 무정부주의자셨죠. ‘공산당은 이론 같지 않다’ ‘이론과 현실이 다르다’고 이야기하셨어요.”





충무공 16대 종손 문제

충무공 이순신 장군 15대 종부 최씨. 이응렬 선생의 며느리이다.

최 종부는 이제야 집안 내력을 알리게 된 것은 종손 문제가 해결되고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 종부는 15대 종손 이재국(李載國)씨와 1984년 결혼했다. 결혼 당시 최씨의 나이는 29세였다. 남편과의 나이 차이는 19세였다. 남편이 2002년 사망하자 누구를 종손으로 세워야 할지가 논란이 됐다. 종손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결국 양자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재국씨에게는 남동생 이재엽씨가 있었다. 2002년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남동생에게도 아들이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16대 종손을 누구로 해야 할지 집안 내부의 논쟁이 시작됐다.



― 종손 논란이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남기셨어요. 공증까지 마치셨어요. 시동생 이재엽의 아들을 종손으로 삼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부터 종손 문제로 시비가 많았어요. 후에 논란이 될 것을 염려해 미리 대비해 놓은 것이죠.”



유언장의 내용은 이렇다.



〈장자 이재국은 신병 중에 있으며 연령 50이 넘도록 소생이 없어 장차 호주 상속 및 대를 계승할 일이 염려되어 아래와 같이 유언합니다. 만약 장자 재국에게 끝내 소생이 없어 문제가 곤란하게 될 경우 차자(次子) 이재엽의 소생을 장자 재국에게 양자로 입양시켜 호주 상속은 물론 선조 충무공의 제16대 종손으로 책정할 것을 덕수이씨 충무공파 문종 제종 여러분께 유언합니다. 1987년 12월 15일 유언자 이응렬.〉



이재엽씨는 2004년 아들 윤용을 낳았다. 논란은 이재엽씨가 배다른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점이었다. 일부 종친들은 서자는 종손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윤용 군이 16대 종손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 서자 논란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아버님이 주위에서 자손을 더 두어야 한다고 해서, 다른 분을 통해 아이를 낳았어요. 아이를 낳은 후 3일 만에 저희 시어머님이 데리고 오셔서 키웠어요.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키워서 고등학교 때까지 시어머니가 친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자랐어요. 시동생의 친모는 암자에 들어가서 생활했어요. 시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49재를 그곳에서 지냈어요.”





서자(庶子) 종손 논란



― 그럼 왜 집안에서 윤용을 종손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한 것인가요.



“사실 요즘 세상에 서자라고 종손이 안 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죠.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종친회 간부 이모씨였어요. 시아버지와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어요. 이런 감정적인 요인 때문에 종손 문제를 건드렸다고 생각돼요.”



― 현재는 어떻게 되었나요.



“간부 이씨 사망 이후 종친회에서 윤용을 16대 종손으로 인정했어요.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에요. 천안 수학영재로 뽑힐 정도로 우수해요. 본인은 카이스트에 입학하고 싶어 하는데, 해군사관학교에 보내는 것이 꿈입니다.”



최 종부는 이렇듯 후계 문제가 정리되어 공개적으로 나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듯하다. 최 종부는 작심한 듯 집안 내력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이제는 털고 가고 싶다고 생각한 듯 오랜 기간 마음속에 담아놓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남편과 나이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시어머니와 친정할머니가 의자매였어요. 전라북도 김제에서 살았는데 남편이 저희 집에 휴양차 방문했어요. 처음에는 동정(同情)을 했어요. 동정이 깊어지니 사랑이 되더라고요. 시어머니가 먼저 욕심을 냈어요.”



남편 이재국씨는 화려한 인맥으로 유명한 경기고(52회)를 졸업했다. 유명 졸업생으로 이종찬, 김우중, 고건 등이 있다. 연세대 법학과에 진학한 이씨는 지병으로 졸업하지 못했다.



― 집안의 기대가 상당했을 것 같아요.



“남편이 인물이 좋아요. 이순신 장군 영정을 보면 저희 남편하고 많이 비슷해요. 시아버지 얼굴을 참고로 그렸다고 하더라고요. 키도 180으로 너무 멋졌어요. 종친회에 시아버지가 남편을 데려가면 종손 인물도 좋고 하니 종가 사정이 필 것으로 다들 기대했대요.”



― 시집살이가 힘들지는 않았나요.



“결혼 당시 시아버지가 70세였어요. 보성전문 상과를 졸업한 인텔리였어요. 시아버지가 기관지 천식과 폐기종을 앓고 계셨는데, 약을 식전·식후 12번 먹었어요. 약탕기로 달여 드렸죠. 항생제를 매일 드시고, 1년에 2번 환절기에는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어요. 기침을 달고 사셨던 것이죠. 남편 역시 평생 병으로 고생했어요.”



최 종부는 12년 시아버지와 남편을 봉양(奉養)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러한 노력은 그 후 여러 사건에 휘말리면서 퇴색됐다. 2002년 남편을 잃은 이후 사고의 연속이었다. 종손과 종부는 이순신 장군 주요 유물의 소유자로서 잘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최 종부가 유물을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현재 현충사 충무공 관련 대부분의 유물 소유주는 최 종부이다. 유물은 현충사에 기탁(寄託)한 상태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장계별책》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015년 8월 대전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국보 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에 버금가는 국보급 유물로 알려진 이순신 장군 《장계별책》을 유출한 혐의로 김모씨와 이를 유통시킨 조모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장계별책》은 1592년부터 1594년까지 이순신 장군이 선조와 광해군에게 올린 임진왜란 상황보고서 68편을 모아 1662년 필사한 책이다. 경찰 수사결과 김씨는 2007년 6월 집안일을 도와달라는 최 종부의 부탁에 종갓집을 방문, 몰래 고서적 112권을 훔쳐간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해당 사건은 최 종부의 허락 없이 《장계별책》을 훔친 것으로 결론났다. 그러나 아직까지 종부가 해당 서적을 판매했다고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 《장계별책》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김씨에게 저희 집 이사를 맡겼는데, 책을 훔쳐갔어요. 경찰에서 불러서 그렇게 조사했어요. 되찾게 되면 현충사에 기탁할 예정입니다. 국보로 지정될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둑맞은 《장계별책》은 몇 단계를 거쳐 국립해양박물관에 팔렸다. 이번에 경찰 조사로 도둑맞은 것으로 밝혀져 현재 국립해양박물관과 현충사가 귀속 여부를 놓고 갈등 중이다. 최 종부는 이번 사건뿐 아니라 과거 비슷한 의혹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 유물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그건 너무 억울해요. 모두 현충사에 기탁했어요. 왜 소유권까지 넘기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400년이 넘도록 충무공의 유물은 종손이 관리했어요. 제가 함부로 넘길 성질이 아니에요. 일단 현충사에 기탁된 이상 저를 포함해 누구도 함부로 팔거나 할 수 없는 것이죠. 다만 종부로서 관리가 잘 되고 있나 일 년에 몇 번 들러서 확인하는 정도예요. 지금도 현충사의 뜻에 따라 보존·관리되고 있어요.”





“조상님께 누를 끼쳐 죄송”



2009년 최 종부는 사기 사건에 휘말렸다. 그 결과 고택 터가 경매로 나오면서 큰 비난을 받게 됐다. 일련의 사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 고택 터가 경매물로 나와 종갓집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이 있어요.



“남편 이재국 장학재단을 만들고 싶었어요.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도 하고요. 그렇게 시작했지만 이용당하고 사기당했어요.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아직까지 소송 중이에요. 어찌되었건 조상님께 면목이 없고, 누를 끼쳐 죄송해요.”



― 종부께서 관리하시던 충무공 유물이 외부에 유출돼 의혹이 커졌습니다.



“충무공 기념사업을 위해 필요하다고 해서 잠시 건네준 것이 돌아다녔어요. 결국 모두 회수해 현충사에 기탁했어요. 제가 유물을 빼돌렸다고 험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 아니에요. 유물을 팔 수도 없어요. 아무리 종부라도 유물을 마음대로 처리하면 기자님들이 가만히 있지 않죠.”



최 종부는 어떻게 해서든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 했다. 그 시작으로 일제시대 집안 종손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했다. 최 종부는 5월 안에 집안 종손들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한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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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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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저스틴 팀버레이크 | 작성시간 23.09.26 종부 종손에 큰 의미를 두는게 왜그럴까 싶다가도 책임감을 가지고 유물보존하고 가문 문화를 지키고 조상 모시는게 대단하기도 하네
  • 작성자시고르댕 | 작성시간 23.09.26 와 항일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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