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24346
“좋은 디자인도, 거기에 한글만 앉히면 후져진다니까요.”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봤을 푸념이다. 하지만 처음 잡지사에 들어가 동료 디자이너에게서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이 무슨 해괴한 사대주의적 미감인가 싶어서 귀를 의심했다. 아니, 글자가 다 거기서 거기지, 영문자를 깔았을 때는 근사하던 디자인이 그 자리에 한글을 넣었다고 밉상이 된다고? 혹시 영어를 섞어 쓰면 같은 사람도 더 유식하고 고상하게 보는 촌스러운 사고의 소유자가 아닌지, 함께 일하는 동료를 새삼스레 뜯어보기도 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오해는 저절로 풀렸다. 디자이너들의 미감은 멀쩡했고, 우리 글자에는 그 엄청난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당최 해결이 안 되는 조형상의 어려움이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예를 들어보자. 다음의 영어 문장을, 뜻을 새기지 말고 외형적인 모양새로만 관찰해보라. He is a policeman. 따로 선을 긋지 않아도, 문장의 하단에 ‘가상선(假想線)’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말 번역문을 보자. 그는 경찰이다. 어떤가? 앞서 영어 문장에서 보았던 ‘가상선’과 같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가?
여기엔 조형적인 의미에서 일관적인 흐름을 잡아주는 요소가 전무하다. 한 자 한 자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뒤죽박죽이다. 그러니 우리 글자를 오브제로 삼는 편집 디자이너들이 걸핏하면 체머리를 흔들 수밖에. 흔히 편집 디자인의 백미로 치는, 활자만 빼곡한 지면에서 배어 나오는 고졸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영어 원서에서는 흔히 만나는)을 우리 글자 갖고는 실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말 난 김에 부연하면, 이 문제를 보완하려고 디자이너들이 흔히 택하는 방법이 지면의 상하좌우에 의미 없는 선을 긋고, 꼭 필요치도 않는 박스를 씌우는 일이다. 구미의 알파벳에는 있지만, 우리 글자에는 없는 ‘가상선’을 억지로라도 새겨 넣으려는 것이다. 문제점이야 나 역시 공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능상으로 불필요한 디자인 요소를 보태는 것은 찬성하기 어렵다. 요소가 하나하나 추가될 때마다 디자인이 간결성을 잃고 텁텁해지기 때문이다. 간결성이란 디자인의 핵심 아닌가.
(중략)
하지만 길게 얘기해봐야 이미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다. 누구나 알다시피, 한글 세로쓰기는 가로쓰기와의 싸움에 밀려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도 ‘일제의 잔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서 말이다. 다 지나간 얘기지만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등 한자 문화권, 달리 말해 ‘붓의 문화권’의 언어는 전통적으로 세로쓰기였다. 그 편이 붓놀림도 편안하고, 동양적 사유의 흐름에도 부합한다. 즉, 위에서 아래로 글줄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들떴던 기운은 차분히 아래로 가라앉고, 밖으로 활개 치던 생각의 방향은 골똘히 내면을 향한다. 마음 한복판에 자연스레 사유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또,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읽다 보면 문장의 리듬감을 몸으로 체현하고 체득하게 된다.
반면에 가로쓰기는 횡으로 펼쳐진 현실세계의 작동 원리를 그대로 수용한다. 사람이 걷고, 말이 뛰고, 기차가 달리듯이, 두 눈은 횡으로 이어진 글자를 따라서 또 달리고 달린다. 현실세계를 관찰하던 습성을 고스란히 글쓰기의 영역으로 이어온 것이다. 그만큼 두 눈의 움직임이 기민하며, 편의성도 뛰어나다. 가로쓰기가 가진 현실추수적인 특성은, 현실과 유사한 체험을 제공하는 게 목표인 영화를 봐도 알 수 있다. 가로로 4대3이었던 화면이 1.85대1로 커지고, 2.35대1로 확장한 데 이어 지금은 파노라마로 진화 중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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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예쁘지 않다는 말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한글은 세로쓰기에 특화된 글자기 때문인데 세로쓰기를 일제잔재라는 말도 안되는 말로 한글이 세로쓰기를 이용해서 자유롭게 디자인되는 것에 불쾌감을 가지는 분위기가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예전 기사를 가져왔어.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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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벚꽃허그 작성시간 23.10.21 오 근데 진짜 세로로 쓰인 글 읽으니까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서 마음도 차분해지는 것 같아.. 새로운 관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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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여성시대_댓글알리미 작성시간 23.10.21 ※ 여성시대 인기글 알림 봇 v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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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예쁜 강아지 작성시간 23.10.21 그럼 세로쓰기 하고 좌-우 읽기가 생기면 괜찮지않을까?
세로쓰기 우-좌로 눈이 움직이니까 읽기가 힘들다 -
작성자무한한 부 작성시간 23.10.21 헐 너무너무 흥미로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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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내가더잘할게는개뿔나만한사람없다 작성시간 23.10.21 옛날 신문 세로쓰기였는데 읽기 힘들어서 가로쓰기된 연재소설란이랑 스포츠란만 읽었던 기억 남. 본문처럼 공간 많이 띄우고 쓰면 몰라도 신문처럼 빼곡하게 세로쓰기 해놓으면 가독성 별로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