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거창
쌤침
공주 공산성의 모습
공주시는 충청남도에
위치한 도시로
무령왕릉, 공산성과 같은
문화재와 함께
흔히 "공주사대"라 부르는
공주대 신관캠퍼스가 위치해있어
많은 사람들이
매해 이 도시를 찾는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수도인 웅진성이
이곳에 있었고
조선시대까지도
호서지방의 4대 목 중
(충주, 청주, 홍주, 공주)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인조가 한때
'런' 하러 오기도 했던
공주인데
이랬던 대도시가
인구 10만명 밖에 안되는
소도시로 전락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철마를,,놓겠다,,했슈??"
바로 공주에 살던
사대부 양반들이
경부선 철도 부설을
극렬히 반대했고
이때문에 철도가 지나게 된
일개 소촌락이었던
대전이 커졌다는 것이다
공주가 쇠퇴한 이유는
진짜 유교탈레반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왜 공주에는
철도가 들어오지 않았던 걸까?
오늘은 한번
경부선 부설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레츠고
조선시대의 도로 중
동래(부산)로 내려가는
대표적인 도로는
바로 영남대로다
한성부터 동래까지
거의 직선 코스에
흔히 조령이라 부르는
문경새재를 지나는
영남대로는
조선 후기까지
주요 도로 중
하나로 군림했고
이때문에
1892년, 처음으로
경부선 사전 측량을 맡은
고노 텐즈이는
영남대로를 따라
비슷하게 노선을 짰으며
이것이 바로 1차 답사 노선이다
대로를 따라
도시가 형성됐으니
이게 옳은 생각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 계획안에는
문제가 있었으니
"소백산맥 씨발아"
소백산맥이
육로로면 모를까
철도가 넘기에는
너무 험난했고
이때문에
소백산맥에서
그나마 덜 험난한
추풍령을 지나는 것으로
사실상 결정이 됐다
2차로 진행된 답사는
일제시기 철도부장관까지
역임하게 되는
센고쿠 미츠기의 측량으로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에 진행되었다
상주시 풍경
"우리 철도 안지나?"
특징으로는
추풍령을 넘으면서
상주가 계획에서
아웃되었고
그 외에는 1차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1899년에
한가지 격변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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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 가는 터미널, 그리고 폐업을 앞둔 상봉터미널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