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거창
쌤침
앞편
1899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완공된 해다
그리고 경인선은
경부선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바로 출발역을
서대문(경성)역으로
통일한 것이다
이때문에
본래 영동(강남)에
지어질 예정이었던
경부선 출발역은
건설 계획이 무산되고
경인선과의
연결성 증대를 위해
우리가 알고있는
구로 분기로
계획이 바뀌었으며
그렇게 1899년에
3차로 진행된
구노 후루야의 측량은
평야란 평야는
몽땅 훑기 위해
영남대로축에서
호남대로축으로
옮겨갔다
공주시 모습
"뭐야, 우리 철도 들어와?"
이 과정에서
기존의 청주를 대신해
공주를 경유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고
대구에서 부산으로
바로 향하던 노선도
창녕을 거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특히 이렇게 계획이 바뀐
가장 큰 이유로는
더 획기적인
수탈물류를 위해
미래의 호남선까지
앞서 내다보고
논산에서 두 노선을
서로 만나게 해
노선의 경제성을
더욱 높히기
위함이었는데
이 노선도
큰 문제가
많이 산재해 있었다
공주가 백제시대때
수도가 되고
호서지역의 대도시로
군림하며
인조가 이곳으로
런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북쪽으로는
차령산맥이라 불리는
구릉이 있고
(엄밀히 말해 산맥은 아니다)
남쪽으로는 계룡산이
존재하기에
방어하기에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거니와
이렇게 산지가 그득한
헬반도에서
금강의 존재는
물류 운송에도
직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로 넘어오고
철도가 지어지면서
산맥과 하천의 존재는
오히려 장애물로 변모해
도시 발전에
방해를 끼쳤고
이건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계획이 잡힌 만큼
천천히 공사를 하면
경제력에 직빵인
효율 좋은 노선이
지어질 수 있었는데..
"야"
경부철도주식회사의 로고다
"?"
"네 눈에는 저게 안보이냐?"
"ㅎㅇ ㅋㅋ"
바로 러시아의 위협이
일본제국의
눈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있던
3차 계획안
이 계획안은
왜 엎어졌을까?
한국사를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대략 눈치 챘을것이다
바로 러시아와의 전운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일본제국은
의주로의 병력 급파를 위해
경부철도주식회사에
계속해서 시공 압력을
넣어댔고
"계속 이러면 밥줄 끊어버린다"
일본제국은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사업 취소라는
카드를 내밀며
완공 협박을
하기까지 했다
"이대로면 노선 개판나는데;;"
이때문에
개깔끔하게 뽑힌 노선에
환호하던 경부철도 측은
눈물을 쏟으며
대사업을 뒤집어엎고
결국 4차 계획안을 내놓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보는
경부선 철도이자
확정노선이다
최대한 빠르게 건설을 위해
산지와 하천을
최대한 배제한
이 노선은
공주 맨 동쪽 끄트머리를
통과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공주군 산내면 대전리에
지어진 역이 대전역이다
대전'리' 라는
일개 마을에 지어진
작은 역은
철도가 지어진 지
2년 뒤인 1906년에
공주에서 벗어나
회덕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에는 회덕군의 이름을 빼앗고
진잠과 유성까지 먹어치워
대전군이 되기까지 이른다
대전의 발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부선을 빼앗긴 공주를 위해
1907년에 진행된
호남선 답사는
조치원에서 분기해
공주를 거치는 노선이었는데
이 경우 영남지방에서
호남지방으로 갈 때
너무 비효율적 이라는
문제와 함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도움이 됐던 금강은
이젠 교량 건설에
장애물이 될 뿐이었으며
기관차를 보관하고 정비하는
기관고를 이미 대전에 지어서
이걸 조치원으로
옮기는 건
추가 지출이기에
호남선마저
대전역에서
분기하는 것으로
결정나면서
공주는
철도 음영지역으로
남게 됐다
그렇게 점차 커지던 대전은
1932년, 공주에게서
충남도청까지 빼앗으면서
그대로 칼을 박았고
그대로 공주는 쇠퇴하고
대전은 부(府)로 승격하였으며
그 이후는
필자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다
그렇게 대전은 대도시가 되었고
공주는 10만 명의 소도시가 되었다
사실, 그 이후로도
공주에 철도가 지어지거나
발전을 할 수 있을 계기는
꾸준히 나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잘 설명해두었기 때문에
추가로 부연설명도
하지 않겠지만
공주시가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할 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잊혀 가는 터미널, 그리고 폐업을 앞둔 상봉터미널 이야기